여름방학과 추석이라는 대목 사이, <터널>이 3주 내내 선두를 차지하고 있는 박스오피스 상위권은 어딘가 심심해 보인다. 하지만 이 영화들만이 개봉작의 전부는 아니다. 눈을 크게 떠보면 이제 막 개봉하고, 곧 개봉할 '다양성' 영화들이 즐비하게 준비돼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오늘은 작품의 뚜렷한 색깔에도 상대적으로 작은 개봉 규모로 개봉해 많은 관객을 만나지 못하는 다섯 작품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음치 소프라노의 실화를 말끔하게 구현한 <플로렌스>, 한진중공업 노동자가 이어온 투쟁의 역사를 회고하는 <그림자들의 섬>, 부시 대통령의 부정부패를 쫓는 언론인의 불안을 포착한  <트루스>, 영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인터뷰 현장에 초대하는 <히치콕 트뤼포>, 사랑이 금지된 디스토피아 속 연인을 그린 <이퀄스> 다섯 편이 바로 주인공이다.


<플로렌스>
(Florence Foster Jenkins, 2016)

감독 스티븐 프리어즈
출연 메릴 스트립, 휴 그랜트, 사이몬 헬버그

줄거리

플로렌스(메릴 스트립)은 세상 그 누구보다 노래를 사랑하지만, 자신이 음치라는 사실을 전혀 모른다. 플로렌스가 여기저기서 괴성(?)을 퍼트리는 사이, 남편이자 매니저인 베이필드(휴 그랜트)는 그녀가 세간의 악평을 모르게 하도록 바삐 뛰어다닌다. 그녀의 노래에 충격 받은 것도 잠시, 새롭게 피아니스트 맥문(사이몬 헬버그)은 플로렌스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게 성심껏 돕는다.

기대 포인트

<플로렌스>는 최악의 소프라노로 회자되는 플로렌스 포스터 젱킨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실제로 그녀가 남긴 레코딩은 현재까지 판매되고('인류 목소리의 영광(???)'이 음반의 제목이다.) 있을 만큼, 플로렌스의 일화는 클래식음악계를 넘어 인류사적으로도 독특한 사례로 손꼽힌다. 이를  <더 퀸>(2006), <필로미나의 기적>(2013), <챔피언 프로그램>(2015) 등 실화를 소재로 삼은 여러 드라마를 작업한 스티븐 프리어스 감독이 연출했다.

<플로렌스>의 장점은 상당부분 영화를 지배하는 세 배우의 매력에 기대고 있다. 메릴 스트립은 자신이 음치인 줄도 모른 채 자신있게 노래를 부르는 플로렌스의 천진함을 완벽하게 소화했다. 영화는 그런 유쾌함에서 멈추지 않고, 플로렌스가 결국 마주해야 하는 현실의 쓰린 순간까지도 잊지 않는데, 메릴 스트립의 플로렌스는 그 순간을 마주하는 처연함까지도 생생하다. 휴 그랜트의 연기도 좋다. 아내의 꿈을 지켜주려는 사려깊은 베이필드는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는 면모까지 더해져 캐릭터의 복잡한 심경을 제대로 전달한다. 플로렌스의 천진난만한 기행을 마주하는 사이먼 헬버그의 갖가지 표정은 영화의 밝기를 한껏 올린다.

<플로렌스> 메인 예고편

<그림자들의 섬>
(2014)

감독 김정근
출연 김진숙, 박성호, 박희찬

기대 포인트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그린 다큐멘터리. 30년 전, 대한조선공사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한진중공업 조선소 노동자들이 일궈온 그동안의 노동조합사를 차근차근 되짚어본다. 제목 '그림자들의 섬'은 조선소가 있는 부산의 영도(그림자 影 섬 島)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한편 이 제목은 오랜 활동과 노고에도 불구하고 세간에 주목 받지 못한 그림자 같은 존재였던 노동자의 일터를 뜻하기도 한다.

<그림자들의 섬>에는 대상을 설명하는 나레이션 대신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증언이 줄을 잇는다.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을 비롯한 박성호, 윤국성, 정태훈, 박희찬 다섯 사람의 인터뷰가 곳곳에 배치됐다. 감독이 그 투쟁의 역사를 해설하기보다 그들을 카메라 앞에 초대해 그 시절을 회고하는 모습과 목소리를 그대로 담아내고자 한다. 그리고 그 위에 한진중공업 노동조합 운동과 관련된 사진과 기사들이 더해지면서 관객에게 그 처절하고 고된 시간들을 보다 선명하기 보여준다. 영화는 3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한 연령 노동자들의 사연을 들으면서, 30년동안의 역사를 다양한 목소리로써 기록한다. 노동과 투쟁의 고됨이 그들의 '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가운데, '첫 월급을 받았을 때의 기분'같은 즐거운 기억도 끄집어내기도 한다. 그 순간, 노동자들의 벅찬 얼굴을 잊어버리기 어렵다. 

<그림자들의 섬> 메인 예고편

<트루스>
(Truth, 2015)

감독 제임스 밴더빌트
출연 케이트 블란쳇, 로버트 레드포드, 엘리자베스 모스

줄거리

부시 대통령의 재선 선거운동이 한창인 2004년, 미국 <CBS>의 시사프로그램 <60분>의 PD 메리 메이프스(케이트 블란쳇)는 부시가 베트남전 징집을 피하기 위해 주 방위군에 입대하고, 복무 기간 동안 여러  특혜를 받았다는 제보를 받는다. 메리는 팀원들과 방송국 간판 앵커 댄(로버트  레드포드)과 결정적인 증거를 찾아 주목받지만, 곧 그 증거가 거짓이라는 주장이 웹에 퍼지면서 그녀를 향한 비판이 쏟아진다.

기대 포인트

솔직히 얘기해보자. <트루스>의 예고편에는 '진실을 파헤치는 언론인'을 그린 영화들 특유의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특종과 오보가 어긋나면서 자신들의 의견이 진실이라는 걸 증명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과정을 그리긴 하지만, 비슷한 소재의 영화와 비교하자면 긴장의 밀도가 다소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왜냐하면 <트루스>는 애초에 주인공 메리가 찾은 증거가 특종인지 오보인지에 무게를 둬서 미스터리를 부풀리는 방식에는 별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영화는 그 단도직입적인 제목처럼, '진실' 그 자체를 따라가는 메리에게 더 집중하고 있다.

케이트 블란쳇의 팬, 특히 <블루 재스민>의 그녀를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이 영화에 대한 호감은 절대적일 것이다. 그녀가 열연한 <트루스>의 메리 메이프스는 시종일관 불안을 감추지 못한다. 여론의 호된 비난에도 흔들림 없이 제 길을 헤쳐나가는 언론인들과는 거리가 멀다. 만약 이 영화에서 긴장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은 이 혼란에 그대로 투신한 메리의 불안을 두눈 똑똑히 목격해야 하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메리가 그토록 수많은 심리적인 부침을 딛고 끝끝내 '진실'을 쟁취하는(<트루스>는 실화를 토대로 한다) 과정은 영화 내내 우직한 태도로 승리하는 주인공의 그것보다 훨씬 매력적이다. <조디악>(2007)과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각본을 쓴 제임스 밴더빌트의 연출 데뷔작이다.


<트루스> 메인 예고편

<히치콕 트뤼포>
(Hitchcock/Truffaut, 2015)

감독 켄트 존스
출연 알프레드 히치콕, 프랑수아 트뤼포, 웨스 앤더슨, 데이빗 핀처


기대 포인트

<히치콕 트뤼포>는 영화 역사상 가장 치열한 취재 현장으로 기억되는, 프랑스의 비평가이자 영화감독인 프랑수아 트뤼포가 할리우드의 거장 알프레드 히치콕을 인터뷰 한 일주일을 회고한다. <히치콕 트뤼포>(한국어 번역본은 <히치콕과의 대화>)라는 책으로도 출간된 인터뷰의 결과물은 당대는 물론 현재까지도 감독, 기자, 평론가 등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무한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저명한 영화평론가 켄트 존스가 이 다큐멘터리를 연출했다.

인터뷰 당시 히치콕과 트뤼포의 음성과 영상을 직접 만날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씨네필의 끓어오르게 하기에 충분한데, 켄트 존스는 마틴 스콜세지, 리처드 링클레이터, 데이빗 핀처, 웨스 앤더슨, 올리비에 아사야스, 제임스 그레이, 구로사와 기요시 등 이 시대 최고의 영화감독의 입을 빌려 이 역사적인 인터뷰의 가치를 반증한다. 웨스 앤더슨은 인터뷰집을 "고무줄로 묶고 다닐 정도로 읽었"다고 고백하고, 마틴 스콜세지는 "우리도 할 수 있다고 격려"하는 책이었다고 말한다.

<히치콕 트뤼포>는 '행동'을 맹렬히 자극하는 영화다. 다큐멘터리를 보고 나선 그 순간부터 히치콕의 전작을 찾아보고, 지금은 절판된 <히치콕과의 대화>를 찾아 헌책방을 기웃거리게 만들 것이다.

<히치콕 트뤼포> 메인 예고편

<이퀄스>
(Equals, 2015)

감독 드레이크 도리머스
출연 크리스틴 스튜어트, 니콜라스 홀트, 가이 피어스, 수현

줄거리

감정이 철제되고, 사랑이 유일한 범죄가 된 디스토피아. 동료의 투신을 목격한 사일러스(니콜라스 홀트)는 사건 현장에서 니아(크리스틴 스튜어트)의 미묘한 표정을 보고 그녀가 감정을 품고 있음을 알아챈다. 니아를 감시하던 사일러스는 이윽고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을 깨닫고, 둘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 몰래 사랑을 나누던 그들은 위험에 처하게 되고, 그들은 통제구역을 탈출하기로 결심한다.

기대 포인트

<이퀄스> 예고편에서 가장 먼저 눈을 사로잡는 건 영화 속 거의 모든 인물이 입고 있는 순백의 옷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관객이 결국 집중하는 것은 그 옷을 입고 있는 인물들의 얼굴에 서려 있는 엷디엷은 표정이다. 서사를 이루는 사건은 시리도록 차가운 미장센만큼이나 단순하지만, <이퀄스>가 지닌 감정의 파고는 넓고 깊다. 감정이 표백된 사회에서 숨죽여 사랑을 키워나가는 사일러스, 니아 두 주인공의 마음이 오히려 더욱 선명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미세하게 떨리는 표정, 미처 닿지 못한 두 손의 거리 등 디스토피아 안에서 발견하는 감정의 분명한 이미지는 <이퀄스>만의 방식대로 영화를 장악한다. 크리스틴 스튜어트와 니콜라스 홀트의 오묘한 얼굴과 빼어난 연기력이 없었다면 성립되지 못했을 긴장이다. 드레이크 도리머스 감독의 전작 <우리가 사랑한 시간>(2013)에 출연한 가이 피어스,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2015)의 한국 배우 수현이 조연으로 출연했다.

<이퀄스> 메인 예고편

씨네플레이 에디터 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