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적 영상의 존재론
서사적으로 <뉴 유니버스>의 구멍을 지적하는 건 쉬운 일이다. 우선 스파이더맨 팀의 풍성한 팀워크와 성장 서사에 비해 킹핀이란 악역은 편편하게 제시된다. 10초도 채 되지 않는 코믹스풍의 회상으로 처리하는 킹핀의 사연은 분량으로만 보면 면피용으로 보일 지경이다. 덧붙여 6인의 스파이더맨 중 누아르, 햄, 페니 3인방은 작품의 톤과 따로 놀 뿐 아니라 매우 짧고 기능적으로 삽입돼 있다는 비판을 피해가기 힘들다. <뉴 유니버스>를 하나의 통합된 우주로 이해해야 한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캐릭터들이 마치 콜라주의 조각처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이 캐릭터드은 CG를 2D화한 마일스의 세계와 질감을 달리한다. 마일스의 세계와 거의 유사한 질감으로 표현되는 피터 B. 파커와 그웬은 서사적으로도 상당한 분량을 허락받고 필요하기도 하지만 나머지 캐릭터는 어쩌면 그럴 필요가 없는 게 아닐까. 정보량이 물리적으로 충분하지 않긴 하지만 그렇다고 얄팍하다고 말할 수 없는 건 이들 캐릭터가 간단한 선 몇개로 처리되는 스파이더 센서의 표현과 본질적으로 별반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보는 순간 이해되고 굳이 감정적 공감을 요구하지 않는 일종의 조형적 접근. 흑백(누아르), 카툰(햄), 셀(페니), 과장된 사이즈(킹핀) 등 조형적으로 이들은 지극히 비현실적인 만화의 세계에 속한다. 그래서 물리적인 정보량이 아니라 작화의 구별로 존재한다. 구태여 하나의 색깔로 통합하는 일 없이 병렬적으로 겹쳐놓는 것만으로 입체감이 부여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뉴 유니버스> 속 각기 다른 우주의 작화와 스타일은 칸칸이 구분된 만화의 프레임처럼 나열돼 있다. 그리고 이를 힙합, 베이퍼웨이브 등의 음악이란 사슬로 연결한다(이에 대해선 따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소년 만화의 왕도에 가깝다고 해도 좋을 진부한 서사는 창의적인 이미지의 입체적인 연결과 겹침, 콜라주를 거친 뒤 비로소 생명을 얻는다.
애니메이션은 본래 추상을 구체화하는 예술이다. 정지된 화면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는 비결은 두 가지. 하나는 캐릭터와 이야기를 통한 공감, 나머지 하나는 이미지 그 자체의 형태와 구성이 주는 직관적 충격이다. 사진이 사실을 찍는 데서 출발한다면 그림은 감정의 형태를 조각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최초의 포착 그대로 2차원에 머물기도 하고 거기에 입체감이 추가되어 3차원으로 연결되기고 하며 간혹 추상의 세계로 넘어가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가 100년 동안 쌓아온 연출, 애니메이션이 100년간 축적해온 문법들은 때로 견고한 장벽이 되어 상상력과 가능성을 옥죄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그런 관습은 흔히 ‘~적’이라고 표현된다. <뉴 유니버스>에 이르는 길은 서로를 배척하지 않고 입체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뼈대를 지배하는 관습은 영화나 애니메이션보다는 차라리 만화에 가깝다. 스파이더맨에 관한 상상이 여러 형태로 공존하는 이 살아있는 이미지들을 만화적 영상의 존재론이라 해도 과히 틀리지 않을 것 같다.
장 뤽 고다르가 <네 멋대로 해라>(1959)에서 점프 컷을 시도했을 때 그는 사람들이 깜짝 놀라고 쉽게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편집의 방향을 바꿔 충돌하는 차를 보여주면 당황할 것이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사람들은 놀람을 즐기는 한편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전혀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영화가 100년 동안 쌓아온 연출, 애니메이션이 100년간 축적해온 문법은 때로 절대적인 것인 양 착각하기 쉽지만 견고해 보이는 벽은 의외로 쉽게 관통된다. 다만 시도하지 않아 어디까지 쉽게 받아들여질지 가늠이 되지 않을 뿐이다. <뉴 유니버스>는 대중적인 호흡 안에서도 애니메이션과 영화가 가보지 않은 길의 여러 갈래 문을 두드린다. 그것만으로도 이 작품은 특별하다. 문득 마일스와 피터 B. 파커의 대화가 떠오른다. (관객이) “준비가 되었다는 걸 어떻게 알죠?” “그건 아무도 몰라. 그냥 믿고 직접 해보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