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어둠의 이야기> 메인 예고편

먼저 고백부터. 막연히 <사랑과 어둠의 이야기>를 우울한 사랑을 그린 영화라고 예상했다. 배우 나탈리 포트만의 첫 장편영화 연출작이라는 사실과 제목 속 '사랑'이라는 단어를 보고 덮어놓고 그렇게 생각한 것. 물론, 예상은 완전히 비껴갔다. <사람과 어둠의 이야기>는 소년 아모스(아미르 테슬러)가 처참한 전쟁 후 심한 불면과 불안에 시달리며 야위어 가는 어머니 파니아(나탈리 포트만)를 바라보는 이야기를 그린다. 유대인과 이스라엘의 뼈아픈 역사를 감내해야 했던 한 여자의 '보이지 않는' 고통이 영화 전반에 서려 있다. 영화는 아모스 오즈의 소설 <사랑과 어둠의 이야기>(2002)를 원작으로 삼고 있다. 이 원작소설을 통해 영화 <사랑과 어둠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보자.

소설 <사랑과 어둠의 이야기>
작가 아모스 오즈 / 소설 <사랑과 어둠의 이야기>

이스라엘의 대문호 아모스 오즈는 1965년 <자칼의 울음소리>로 데뷔해 <나의 미카엘>, <블랙 박스>, <여자를 안다는 것>, <삶과 죽음의 시>, <친구 사이> 등을 발표해 문단과 대중의 사랑을 동시에 받으며 히브리어권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한국에서도 열 작품 이상이 현재 번역돼 있을 만큼 국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

<사랑과 어둠의 이야기>는 아모스 오즈가 예순을 훌쩍 넘겨 발표한 자전소설이다. 유대인 박해의 역사와 현대 이스라엘 건국에 대한 이야기를 작가 개인사를 통해 훌륭하게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으며, 출간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올라 있는 작품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작가 자신이지만, 그의 시선이 끈질기게 머무르는 곳은 작가의 어머니 파니아다. 아모스 오즈의 작품들 곳곳에서 그녀의 흔적을 엿볼 수 있긴 했지만, 직접적으로 그녀에 대해 언급한 것은 <사랑과 어둠의 이야기>가 처음이다.

감독, 나탈리 포트만

나탈리 포트만은 "눈앞에서 영화가 그려지는" 것 같은 원작을 읽으면서 "이 작품이 나의 첫 연출작이 되겠구나" 생각했다. 유대인 이민자로서의 정체성 역시 이 작품을 택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어려서부터 집안 어른들로부터 보고 들어왔던 옛날 이야기들이 소설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고 한다. 그녀가 연출뿐만 아니라 각본도 직접 담당한 건 아마도 이 친숙함에 기인하지 않았을까.

1000페이지가 넘는 원작 <사랑과 어둠의 이야기>는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친척들의 이야기, 부모님과의 기억, 여러 큰 사건들을 겪으며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 등이 한데 담겨 있다. 나탈리 포트만은 이 방대한 소설을 러닝타임 100분의 영화 <사랑과 어둠의 이야기>로 탄생시켰다. 전반적인 이야기를 짤막하게 다루기보다 특정한 부분에 집중하는 방식을 취했다. 그녀는 클라우스너 일가의 세부적인 가족사는 완전히 덜어내고, 아모스 오즈의 어머니 파니아에게 포커스를 맞췄다. 처절한 고난의 이미지를 전시하기보다는 파니아의 생기와 희망이 싸늘하게 식어가는 보여줌으로써 역사의 폭력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사랑과 어둠의 이야기>는 시종일관 단정하고 조용한 영화다.

배우, 나탈리 포트만

나탈리 포트만은 연출과 각본뿐만 아니라, 영화의 히로인 파니아를 직접 연기했다. 첫 장편영화인만큼 한껏 욕심을 부린 건가 싶지만, 사실 제작비 조달이라는 매우 현실적인 이유에서 비롯된 결정이었다. 그녀가 직접 출연하지 않는다면 영화에 투자하지 않겠다는 제의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나탈리 포트만이 파니아가 되면서 <사랑과 어둠의 이야기>도 비로소 탄생할 수 있었다.

그녀가 연기한 파니아는 병들어간다. 한때는 자신의 과거를 아들 아모스에게 전하며 흐트러지는 희망을 붙들려고도 하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그녀의 입은 굳어진다. 하지만 우리가 목격하는 파니아는 결국 강인한 사람이다. 심적으로 탈진해 있지만 단 한시도 날카로운 감정을 드러내는 법이 없다. 마음에는 온통 불안이 가득할지언정 불안의 징후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녀는 시어머니에게 감정을 억제하라는 호통을 들은 후 분에 못 이겨 제 얼굴을 때리며 눈물을 흘려도 남편이 들어오자 급히 화장을 고치고 머리를 메만지며 흐트러짐을 감추는 어머니 혹은 아내다.

<사랑과 어둠의 이야기>는 역사의 한가운데를 통과하는 이야기지만, 정치와 사회의 현실이 상당 부분 생략돼 있다. 다만 그 역사를 살아낸 사람들의 아픔을 전하는 데에 부족함이 없다. 숨막히는 과거와 이 상처를 씻어낼 수 없는 현재의 현실을 안고 살아야 하는 파니아의 굳은 심지는 끝내 희망이 아닌 자살로 향하는 걸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사랑과 어둠의 이야기>가 만들어내는 아픔은 깊고깊다.


씨네플레이 에디터 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