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널>, <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에서 묘사하는 기자들의 모습
권력 비리에 맞서는 언론인 다룬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좌), <인사이더>(우)

<터널>을 본 관객들이라면 특종을 위해 막무가내로 취재하던  캐릭터 '조 기자'를 기억할 겁니다. 정말 마주치기 싫은 얄미운 캐릭터였죠? 영화에 등장하는 SNC 방송국도 김성훈 감독의 전작 <더 테러 라이브>의 설정과 이어지는 것이어서 흥미로웠죠. (이스터 에그 기근난에 허덕이는 한국 영화계에서 벌어진 희귀 사례.)

<터널>과 분위기는 사뭇 다르지만 최근 영화 속에 등장하는 기자 중에는 <특종: 량첸살인기>에서 해고 위기에 놓여 특종 좇다가 살인사건에 연루되는 CNBS 사회부 '허무혁'(조정석) 기자와 <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의 연예부 '도라희'(박보영) 기자가 있습니다. 뭐랄까요, <소수의견>에서 김옥빈이 연기한 기자 수경처럼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열심히 뛰어다니는 기자도 있겠습니다만, 그보다는 자꾸만 앞의 두 영화 속 기자들의 이름이 눈에 밟히더군요.

영화와 현실 사이의 씽크로율은 머리 아프니 너무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는데, 아무리 영화 속 묘사가 비현실적이라 해도 그 이름에서는 '기자'란 어느 정도는 '돌아이'여야 하는 거고, 열심히 싸워도 결국엔 '허무'해지는 순간을 맞이하는 사람들이라는 걸 은연 중에 드러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물론 영화에는 <내부자들>의 고기자(김대명), <부당거래>의 김기자(오정세) 등등 비리의 온상인 캐릭터도 종종 등장합니다.)


기자에게 필요한 것이
뭔지 알아요?
<꼭지딴>
<꼭지딴>

그녀도 한때 기자를 연기한 적 있습니다. 영화 <꼭지딴>에서 배우 최진실이 연기하는 혜지는 어려웠던 유년 시절을 딛고 성장해 신문사 기자가 됩니다. 그리고  '꼭지딴'이란 별명을 지닌 길거리 노숙자들의 우두머리를 인터뷰하는데 알고 보니 그가 어린 시절 단짝 친구입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어떤 사건에 휘말려들죠. 배우들이 발차기하는 영화 스틸컷만 보면 마치 <종횡사해> 같은 홍콩 영화 분위기를 상상할 수도 있겠지만, 이 영화에 어쨌거나 그녀는 불의에 항거하는 발차기 액션을 글쓰기만큼이나 잘하는 기자입니다. 그런 그녀가 영화에서 이런 명대사를 남겼더랬죠.

기자에게 필요한 것이
뭔지 알아요?

냄새 잘 맡는 코,
360도를 보는 눈,
토끼와 같은 귀,
어디든 갈 수 있는 진흙발,

그리고 누구한테도
굽힐 줄 모르는
무릎을 가져야해요.

찾아봐요.
계속 찾다보면 나올 거에요.

이것은 수퍼히어로에 대한 소개 문구가 아닙니다. 낯간지럽기는 하지만 뭐든 찾아내서 밝혀내는 언론인의 존재감이 새삼 느껴지네요. (정작 영화는 모두가 발차기를 날리는 액션영화.)
이처럼 자본과 권력의 부정 부패, 나아가 매스미디어의 폐해를 다루고 있는 '기자 영화'는 많습니다. 그 영화들 중 일부는 판타지를 심어주기도 하지만, 또 일부는 현실에 메스를 대고 날카로운 비판의식을 담아내기도 하지요.

어쩔 수 없이 할리우드 영화를 많이 언급할 수밖에 없지만, 그동안 등장했던 영화들 가운데 매력적인, 그러니까 보다 나은 현실을 위해 비리와 사건을 파헤치려 노력하는 언론인이 등장하는 영화를 모아서 소개해볼까 합니다. (미처 언급되지 못한 캐릭터나 영화도 많을 겁니다.)

언론플레이 말고
'팀플레이' 보여준
<스포트라이트>
<스포트라이트>

최근 언론인들이 주인공인 영화 중에서 가장 화제가 됐던 영화는 바로 <스포트라이트>죠.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각본상을 수상하면서 국내 흥행에도 성공했던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가톨릭 교회에서 자행됐던 아동 성추행 스캔들을 폭로한 미국 일간지 보스턴 글로브 내 ‘스포트라이트’팀 기자들의 실화를 다루고 있죠. 스캔들 자체의 충격보다는 기자들의 취재 과정에 대해서 자세하게 다루고 있는 영화입니다. '발로 뛰는 기자들'이라고 해야 할까요? 기사를 손이 아니라 발로 쓴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상세하게 보여줍니다.

이걸 밝히지 않으면
그게 언론인입니까?

실존인물들을 연기한 배우들은 당시 기자들의 모습을 재현하기 위해 그들이 실제로 즐겨 입었던 옷의 브랜드까지 똑같이 따라서 입고 연기했을 정도로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입니다. 특히 마이클 키튼과 레이첼 맥아담스는 일종의 '기자 영화' 출연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서 더욱 흥미로웠죠.


'진실은 볼펜으로 쓰라'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

레이첼 맥아담스는 이전에 케빈 맥도널드 감독의 영화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에서 '워싱턴 글로브'지의 인터넷판 신입 기자 델라 프라이를 연기했죠. 그녀는 선배인 칼 매카프리(러셀 크로)와 함께 사설 경비업체 '포인트코프'와 하원의원 '스티븐 콜린스'(벤 애플렉) 사이에 얽힌 살인사건과 기업 비리에 대해 파헤칩니다.

러셀 크로가 연기하는 캐릭터 칼은 매력적인 기자입니다. 15년차이면서 16년된 구닥다리 컴퓨터를 쓰지만 언제나 취재는 발로 뛰고 어디에서든 볼펜을 지참해 적을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을 가르치는데요, 권력과 비리 앞에서는 냉혈한인 그가 후배에게 볼펜 목걸이를 선물하기도 하는, 달달해서 아찔할 정도로 선후배의 훈내가 진하게 풍기는 인물입니다. 이 영화에서 베테랑 기자 칼이 취재를 하면서 볼펜을 뽑아드는 장면은 거의 <리오 브라보> 같은 서부영화에서 주인공이 권총을 뽑아드는 장면처럼 비장하게 찍혔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겼죠.

난 퍼블리스트가 아니라
저널리스트입니다.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에서 또 유심히 볼 장면이 있다면 바로 엔딩크레딧 시퀀스입니다. 윤전기를 통해서 종이 신문이 인쇄되는 과정을 상세하게 보여주는데 너무 유려해서 할 말을 잃게 만듭니다. 흐르는 노래 제목은 'Long as I can see the light' 인데 너무 잘 어울리죠. 그럼 윤전기가 등장하는 또 다른 영화 한 편 볼까요?


'윤전기의 매력에 빠져'
<페이퍼>
<더 페이퍼>

론 하워드 감독의 1994년작 <페이퍼>는 윤전기의 매력을 한껏 강조한 '기자 영화'입니다. 아, 그리고 <스포트라이트>의 마이클 키튼이 역시 기자로 등장하는 또 하나의 영화이기도 하죠. 이 영화가 왜 '윤전기 영화'이기도 하느냐면, 소규모 신문사인 '뉴욕 선'지의 기자인 헨리(마이클 키튼)가 잘못된 기사를 수정하기 위해 윤전기를 멈춰 세우려는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뉴스는 왜곡해서도
돈을 따져서도 안돼요.

어느 흑인 소년들의 억울한 누명을 벗기기 위해 마감 4분을 남겨두고 1면 특종 기사를 고쳐 쓰겠다는 만행(?)을 저지르려 하는 것이죠. 그는 심지어 윤전기를 멈추기 위해서 사주와 육탄전을 벌이기도 합니다. 기자를 주인공으로 비리를 파헤치고 사회의 부조리와 시스템의 부재를 되짚는데 영화는 큰 관심을 보이지는 않습니다.

다만, 기자들의 일상을 좀 더 내밀하게 그리고 저널리즘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영화이지요. 그렇다면 기자의 하루, 그러니까 촌각을 다투는 기자들에 대해 다루는 영화는 또 어떤 것이 있을까요?


'어떤 기자의 24시간'
<트루크라임>
<트루크라임>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 연출과 연기를 모두 맡은 영화 중 하나인 <트루크라임>은 사생활이 엉망인 못된 노년의 기자가 우연히 한 사형수의 억울한 누명을 발견하면서 시작합니다. 그는 24시간 안에 취재를 완료하고 관료들을 설득해서 구해내야만 하는 엄청난 미션을 수행해야 하죠. 스릴러 영화를 방불케할 정도로 시간에 쫓기는 상황인 것이죠. 몇 년이 지난 살인사건을, 게다가 흑인범죄와 관계되어 백인 피해자나 목격자들이 전부 증언 번복을 꺼려하는 상황에서 그는 사건 자료를 재구성하고 증거와 증인을 확보한 다음 주지사한테 가서 사형 취소를 권고해야 합니다.

대중은
섹스 스캔들과 폭력사건
보도를 더 원해.

이 모든 게 24시간, 그러니까 아침에 시작해서 자정 전까지 끝내야 하는 것이지요. 결말은 아무쪼록 영화를 직접 보시길 권합니다. 노년의 한물간 기자의 사생활이 얼마나 엉망인지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묘사되는데 그 부분은 좀 보고 있으면 짜증이 나기도 합니다. 이 캐릭터를 꼭 이렇게 그려야 했을까 싶어서 말이죠.

아무튼 이 영화의 엔딩곡도 '기자 영화'로서는 조금 의미심장한 제목을 지니고 있습니다. 재즈에 조예가 깊으신 클린트옹께서 그런 마음으로 선곡을 하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다이애나 크롤의 명곡이죠. 'Why should i care' 입니다.


취재와 연애를 동시에
'취재 멜로'
<어느 멋진 날>

잠시 뒤에 소개할 <굿 나잇 앤 굿 럭>의 조지 클루니를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그가 1996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에서 기자이자 유명 칼럼니스트로 등장했다는 사실을 연결시켜 생각해볼 수 있을 겁니다. 잭 테일러라는 이름으로 지면 매체에서는 이름 꽤나 날리고 있는 그는, 이 영화에서 하루동안 우연히 마주친 멜라니(미셸 파이퍼)라는 여성과 연애도 해야 하고, 이혼남으로서 홀로 아이의 육아도 챙겨야 하며, 시장의 비리를 폭로할 증인 확보도 해야 합니다.

보통 연애는 취중에 이뤄지는 게 멜로 영화의 보통의 묘사인데 이 영화는 취재 중에도 일어납니다. <어느 멋진 날>은 심각한 내부 고발으 주요 소재는 아닙니다만, 나름대로 열일하는 기자의 모습을 멋진 멜로 영화 속에 등장시킵니다. 무겁고 어두운 영화만 보다가 가끔 이런 영화도 보면 정신 건강 밸런스에 좋을 듯 합니다.


진짜 내부자들
<인사이더>
<인사이더>

언론인 중에는 신문사 기자 뿐만 아니라 방송국 PD도 있죠. 조승우, 이병헌 주연의 영화 <내부자들>이란 영화 제목은 꼭 이 영화의 오마주 같기도 한데요. 물론 영화의 성격은 완전히 다릅니다. 이 영화는 일단 비리의 온상을 볼거리로 전시하는데 아무런 관심이 없거든요.
마이클 만 감독의 <인사이더>의 관심은 CBS의 TV매거진 뉴스쇼인 '60 Minutes'의 PD인 로웰 버그만(알 파치노)과 담배회사 '브라운앤윌리엄슨'의 비리를 내보 고발하는 제프리 박사(러셀 크로)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권력에 맞서는 개인의 갈등을 보여주는데 집중합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에서 러셀 크로는 복잡한 심경변화를 일으키는 내부고발자를 훌륭하게 연기해 아카데미를 수상하기도 했죠.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에서 기업 비리를 파헤치는 기자로 분하는 러셀 크로의 모습과 비교해서 보면 흥미롭습니다.

뉴스거리야?
그럼 방송해야지!

프로그램 PD인 로웰은 비리를 밝혀내려는 내부고발자 제프리의 인터뷰를 방송에 내보내려 하는데 중역들은 광고주와 스폰서의 동태를 살피면서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가져올 비리 폭로에 주저합니다. 평생 권력과 정면으로 싸워왔던 로웰의 입장에서는 자존심이 무척 상하는 반응인 것이지요.
방송국이란 결국 로웰과 같은 사람들이 정면에 나서서 자본과 권력과 싸워왔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 같은 방송국의 고민은 역사가 꽤 깊습니다. 여러 영화에서도 직접적으로 다루기도 하지요. 특히 언론인 에드워드 머로에 관한 다음의 영화를 주목할 필요가 있겠죠.


TV를 끄고 눈을 떠라
<굿나잇 앤 굿럭>
<굿나잇 앤 굿럭>

조지 클루니가 직접 연출과 연기를 도맡은 영화 <굿나잇 앤 굿럭>은 미국 미디어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CBS의 뉴스 앵커 에드워드 R. 머로(데이빗 스트래던)와 프로그램 PD인 프레드 프렌들리(조지 클루니)의 실화를 다룬 영화지요.
<인사이더>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도 머로와 프레드는 권력을 쥐고 흔드는 정치인의 마수와 광고 수익 저하를 두려워하는 사측에 맞서 방송의 공정성과 언론 자유를 사수합니다.
그로 인해 지금의 미국의 언론이 존재할 수 있었던 실제 사건이지요. 이 영화에서 머로는 유명한 명대사를 많이 남기는데요. 그는 평생 동안 TV를 통해 특종을 보도하고 자본과 권력에 맞서왔으면서도 TV의 맹신을 거부합니다. 

TV는 지식과 깨달음,
때로는영감도 준다.

하지만
그것은 오직
참고용으로 쓰여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TV는 그저 반짝거리는
전기 박스에 불과할 것이다.

이들이 싸우는 건 지금도 한국 사회에 만연해 있는 좌우논쟁이었죠. 권력에 맞선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그들은 철저한 자기검열을 통해서 증명합니다. (<조디악>에서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의 기자 폴을 연기하는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그보다 한 발 앞서 이 영화에서도 언론 종사자로 등장하는 점도 재미있습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이런 영웅과도 같은 언론인을 다루는 영화는 계속해서 이어질 겁니다. 다음에 소개할 역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인데요. 이번엔 여성 언론인을 다룬 영화입니다.

승리의 경험
<트루스>

역시 CBS의 TV매거진 뉴스쇼 '60 Minutes'를 다룬 이 영화 <트루스> 역시 대통령의 비리를 파헤치기 위해 윤리와 법 사이에서 맹렬하게 싸우는 프로듀서 메리 메이프스(케이트 블란쳇)의 실화를 다룬 영화입니다. 권력의 상징이자 꼭지점과도 같은 한 나라의 대통령을 상대로 의혹을 지기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되고 위대한 일인지를 영화는 메리라는 여성의 내면을 통해서 보여주죠. 특히 케이트 블란쳇의 멋진 연기가 언론인의 삶을 함축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트루스>는 다른 영화들과 달리 통쾌한 승리의 쾌감을 안겨주는 영화는 아닙니다. 메리 메이프스는 사실관계의 증명이란 늪에 빠져버립니다. 윤리적으로 싸운다는 것이 모두 법적인 승리로 이어지지는 않는 거죠. 그럼에도 그녀가 왜 끝까지 싸우길 두려워하지 않는지는 메리를 연기하는 캐이트 블란쳇의 표정 연기를 통해 드러납니다.


위에서 소개한 대부분의 영화들은 권력과 맞서 싸워 끝내 이기고마는 개인의 표정 혹은 상황을 세밀하게 묘사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이 영화들이 보여주고자 하는 영광의 순간이겠죠. 그 유명한 "굿나잇 앤 굿 럭"이란 인사도 그런 의미를 담고 있는 표현일 겁니다.

지금도 어디에선가 자본은 착취하고 있고, 비리는 벌어지고 있으며, 권력은 딴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들은 끝까지 싸우길 포기하지 않는 영화입니다. 오늘도 정치 사회 뉴스를 클릭하면서 이 영화들의 제목을 다시 한 번 되새겨봅니다.


씨네플레이 에디터 가로등거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