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유예된 손목시계
사고가 ‘사건’으로 바뀌면 찰나는 가없이 연장된다. 관습적인 배치로 보이기도 하지만 영화의 첫 화면에 등장한 아빠의 손목시계가 마지막 장면에서 아들에게 전달되는 건 이를 의도한 수미쌍관이다. 아빠의 시간을 물려받은 아이의 기억은 8월12일에 머문 채 흐르지 않을 것이다. 구조를 기다리던 생존자들의 차디찬 시간이, 멈춰버린 가족의 시간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다시 살아남은 자의 마음속에서 영원히 순환한다. 잠항 기간 잠시 주인을 잃은, 즉 시간의 흐름이 유예된 손목시계는 피해자들의 시간을 물리적 길이로 헤아리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쓸쓸한 대유법이다.
상영시간 중 한가운데에 배치된 탄약 카트리지 공수 장면은 절대적이지 않은 시간의 가변성을 숨막히는 연출로 보여준다. 생존자들은 격실에 산소를 발생시키는 데 쓸 탄약을 가져와야 한다. 해당 격실은 물에 잠겨 있다. 얼마나 숨을 참고 헤엄쳐야 찾아올 수 있을지 모른다. 산소를 위해 산소를 참아야 한다. 3분여 동안 진행되는 이 역설은 찰나와 영원의 상대성을 영화적으로 구현한 드문 체험이다. 물속에서 사물함을 뒤지고 카트리지를 손에서 놓치고 동료가 끝내 혼절하고 뻑뻑한 해치를 가까스로 연 다음 동료를 살려내야 하는 일종의 진공 상태를 관객의 몸에 전달함으로써 사고의 시간과 사건의 시간이 얼마나 다른지 가늠해보도록 해준다.
끝내 망설이다 마지막 단락을 쓴다. 이 영화는 얼핏 9·11테러의 항공기 내부로 카메라를 가져간 폴 그린그래스 감독의 <플라이트93>(2006)과 비슷해 보일 수 있다. 재난의 밖이 아닌 안으로 들어갔다는 점에서 그렇다. 찰나의 측면이라면 올리버 스톤의 <월드 트레이드 센터>(2006)처럼 쌍둥이 빌딩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그 속성에 가까울 터다. 영원의 단면이라면 <플라이트93>의 항공기 내부가 그 실체에 더 근접한 위치일 것이다. 9·11테러에 명백한 적(敵)이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는 점은, 테러 5년 만에 해당 항공기와 쌍둥이 빌딩 내부로 영화가 들어갈 수 있는, 심리적 저지선의 해제 지점이었을 것이다.
<쿠르스크>가 자리한 곳은 본질적으로 이들과 다르다. 빈터베르그 감독의 관심은 당시 구조 당국이 개입할 ‘시간’이 있었다는 사실에 있다. 이 골든타임에 카메라가 재난의 내부로 들어간다는 것은 영화의 윤리가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넘어감을 의미한다. 영화는 실제 있었던 재난을 관통해 어디까지 들어갈 수 있는가. 아니 그래도 되는가. 된다면 언제부터 되는가. 들어갔다면 얼마나 진실할 수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아직은, 한국인 누구도 답을 내놓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