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이다. 생각보다 춥진 않은데, 그래도 춥긴 춥다. 이럴 때 따스한 햇살이 살며시 내려앉는 휴양지 여행이라도 가면 좋겠지만, 턱도 없다. 그렇다고 여행 영화나 예능을 보자면 조금 쓸쓸해진다. 더위는 더위로 이긴다고, 추위도 추위로 이길 수 있지 않을까. 추위를 잊게 할 추운 영화 5편을 소개한다.
<투모로우>는 지구 온난화 현상으로 갑작스럽게 빙하기가 도래하는 재난의 현장을 그린다. 기후학자 잭 홀(데니스 퀘이드)은 이런 징조를 읽어내지만, 학회와 정부 모두 그의 호들갑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아들 샘 홀(제이크 질렌할)이 퀴즈대회 참가를 위해 뉴욕으로 떠난 사이 우박과 태풍, 폭설 등 기상 기후가 시작된다.
재난을 이런 식으로 묘사하는 게 좋은 건 아니지만, 롤랜드 에머리히는 재난과 스펙터클을 가장 효과적으로 조합하는 감독답게 극단으로 치닫는 날씨의 비주얼, 각자의 상황에서 공포에 휩싸인 인물들의 표정을 정확히 포착한다. <투모로우>가 개봉한 2004년 6월, 극장에서 이 영화를 봤다는 친구를 만난 적이 있다. 어땠냐고 묻자 “내용도 추운데 극장 냉방이 너무 빵빵해서, 영화보다 추워 죽을 뻔했다”라고 투덜거렸다. 6월에 관객을 얼어 죽게 만드는 영화니 어떻게 잊을 수 있겠나. ▶<투모로우> 바로 보기
<히말라야>는 산악인 엄홍길 대장과 그의 팀원들이 고 박무택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시작한 히말라야 등반 실화를 다룬다. 황정민이 활짝 웃는 포스터를 보면 예상되겠지만, 코미디와 눈물을 쏟게 하는 장면이 곳곳에 배치된 산악 드라마다. 신파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고, 그 비판에 동의하는 바이다. 하지만 신파라고 해도, 이 영화만큼 추위를 비주얼로 정확하게 표현한 한국 영화는 찾아보기 힘들다.
시작하자마자 시점숏으로 펼쳐지는 등반 장면부터 관객들의 체온을 슬그머니 빼앗더니, 히말라야 중턱에서 엄홍길(황정민)과 박무택(정우)이 눈이 그치길 기다리는 장면은 서늘하다 못해 싸늘하게 만든다. 거기에 히말라야 8700m 지점에서 그 비좁은 텐트 안에서 벌벌 떨며 생사를 오가는 클라이맥스까지. 한 겨울에 따스한 집에서 뒹굴뒹굴하며 영화를 볼 수 있단 사실마저 감사하게 만든다. ▶<히말라야> 바로 보기
한 남자가 자신의 입에 총구를 넣는다. ‘이 세상에서 좋은 일을 하는 걸 그만둔다’고 읊조리지만, 방아쇠는 당기지 못한다. 다음날, 그는 알래스카에서 내륙으로 가는 비행기에 실는다. 허풍과 과격한 농담뿐인 노동자들 사이에서 그저 조용히 잠들길 간청하지만, 비행기가 추락하고 만다. 오트웨이(리암 니슨)는 사고 속에 살아남은 6명과 함께 생존을 도모해야만 한다.
리암 니슨의 힘 빡 준 눈빛을 보고 착각하지 말자. 이 영화는 <테이큰>류의 액션영화가 아니다. 어딘지 모르는 설원에서 늑대 무리에게 포위당한 인간들의 생존기일 뿐이다.<더 그레이>는 주인공 일행을 자연환경에 내팽겨친다. 이들의 사투를 통해 우리에게 위협적인, 하지만 동시에 어떤 악의 없이 무구한 자연의 민낯을 보게 된다.
<더 그레이>는 심지어 전개에 박차를 가하면서 생존 영화 이상으로 도약하려 한다. 리암 니슨의 캐릭터 오트웨이는 자살 기도로 영화를 여는 우울한 인물이지만, 이 사지에 던져졌을 때 유일하게 생존의 길을 도모한다. 나약한 6명의 인물을 이끌고 어떻게든 목적지에 도달하려는 그의 모습은 양치기 목자를 연상시킨다. 거기에 점점 생존이 어려워지는 환경 속에서 인물들이 죽음에 다다를 때, <더 그레이>는 시각적인 추위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혹한까지 느끼게 할 것이다. ▶<더 그레이> 바로 보기
다른 영화에 비하면, <세 번째 살인>은 되려 따듯하게 보일 수도 있다. 시작부터 활활 타오르는 불길, 새하얗지만 포근하게 느껴지는 설원, 손끝을 저릿하게 만드는 인물들의 신경전까지. 그럼에도 이 영화가 차다고 느껴지는 건 그런 따스함과 차가움의 대비가 극명하기 때문이다. 원래 감기도 일교차가 심할 때 자주 걸리지 않는가. <세 번째 살인>이 딱 그런 영화다.
미스미(야쿠쇼 코지)란 남자가 공장 사장을 살해하고 붙잡힌다. 변호사 시게모리(후쿠야마 마사히루)는 “이해나 공감은 필요없다”면서도 명백히 살인을 저질렀다는 의뢰인을 “감싸는 게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시게모리는 미스미의 형량을 낮추기 위해 조사를 해나가던 중 피해자의 딸 사키에(히로세 스즈)가 미스미와 접점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을 가족 영화로만 알고 있다면, 이 영화가 낯설 수도 있다. 살인범과 법정 공판이라니. 하지만 영화를 지켜보면 그의 다른 영화서도 엿볼 수 있는 믿음, 신의, 직시와 외면에 대한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교도소 면회실에서 만들어내는 다양한 화면 구성은 영화 전체에 신중함을 더한다. 야쿠쇼 코지, 후쿠야마 마사히루, 히로세 스즈를 비롯한 배우들의 앙상블도 눈 뗄 수 없이 흥미롭다. ▶<세 번째 살인> 바로 보기
진지한 영화를 연이어 소개했으니 가볍게 볼 수 있는 <아이스 에이지>를 마지막으로 소개한다. 빙하기가 찾아온 지구에서 맘모스 맨프리드(레이 로마노), 나무늘보 시드(존 레귀자모)는 어린 인간 아기를 줍게(?) 된다. 얼떨결에 인간들에게 아기를 돌려주게 된 두 동물. 그들에게 인간의 보금자리로 안내해주겠다며 나타난 호랑이 디에고(데니스 리어리)는 인간 아이를 빼앗기 위한 호랑이 무리의 스파이다.
<아이스 에이지>는 볼거리가 많은 애니메이션은 아니다. 2002년 영화를 지금 보면 기술력도 썩 좋은 편이 아니고. 하지만 무뚝뚝한 맨프리드, 까불이 시드, 츤데레 디에고가 함께 다니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호흡이 점차 맞아가는 과정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5편까지 이어지는 세 동물의 만남을 만들어준 인간 아이 로산의 귀여움도 여전하고. 미지의 괴수가 인간 아이를 맡는다는 설정이 픽사 애니메이션 <몬스터 주식회사>와 닮은 구석이 있다. 코미디부터 감동 드라마까지 오가며 재미를 선사한다는 것도 비슷하다. 아 참, 시리즈 전체에서 오프닝과 엔딩을 도맡은 다람쥐 스크랫의 활약 역시 챙겨 볼 만한다. ▶<아이스 에이지> 바로 보기
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