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함과 사악함. 참 공존하기 어려운 단어다. 하지만 어떤 배우들은 작품에 따라 때론 순수하게, 때론 사악하게 변신한다. 같은 사람이 맞는지 헷갈릴 때도 있다. 이렇게 순수함과 사악함을 모두 소화하는 국내외 남자 배우들을 뽑아, 각 캐릭터를 비교하며 그 차이를 실감해 보고자 한다.


히스 레저

패트릭 베로나 VS. 조커

<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

<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1999)의 패트릭 베로나

누군들 이 악동에게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온갖 무시무시한 소문을 달고 다니는 10대 패트릭.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차갑지만 내 여자에게는 한없이 다정하다. 그는 주변에서 사주를 받아 캣(줄리아 스타일스)에게 접근하지만, 실제로 사랑에 빠지고 만다. 사실 로맨틱 코미디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 뻔한 캐릭터는 그의 연기로 특별함을 갖게 됐다.

극 초반의 악동 같은 패트릭의 눈빛과 달달하게 사랑을 구애하는 눈빛은 비교할수록 놀라울 따름이다. 특히, 그가 운동장에서 ‘캔 테이크 마 아이즈 오프 유’(Can't take my eyes off you)를 부르며 캣에게 고백하는 순간은 명장면으로 회자되고 있다.

<다크 나이트>(2008)의 조커

“뭐가 그리 심각해?”(Why so serious?) 등골 서늘해지는 웃음과 함께 역대급 악당이 탄생했다. 혀를 날름거리거나 입맛을 다시는 등 광기 어린 표정과 행동들부터 신경질적이고 장난기 섞인 말투까지. 완벽하게 미치광이 살인마다. 히스 레저는 기존에 맡았던 배역과는 매우 다른 모습으로 조커를 연기했다. 조커는 그가 연기한 모든 캐릭터 가운데 단연 최고라고 할 수 있다.

엄청난 메소드 연기를 펼쳐, “실제 살인마를 고용한 것이 아니냐”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이니 말이다. 사실 영웅에게는 악당이 있어야 빛나는 법이다. 히스 레저는 극악무도한 악당을 만들어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배트맨> 시리즈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제임스 맥어보이

로비 VS. 비스트

<어톤먼트>

<어톤먼트>(2017)의 로비

갖은 설욕을 겪으면서도 애처롭게 한 여자만을 바라본, 순애보 그 자체인 남자가 있다. <어톤먼트>의 로비 터너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수려한 외모의 소유자로 지성과 다정함까지 겸비했다. 그야말로 꿈속에서나 나올 법한 남자이다.

그는 오랜 기다림 끝에, 짝사랑하던 세실리아(키이라 나이틀리)와 사랑을 나누게 된다. 하지만 그가 성폭행범이라는 누명을 쓰면서 비극이 시작됐다. 감옥에 수감되어 있다가 2차 세계대전이 터져 군대에 끌려간 그는, 세실리아를 다시 만나겠다는 일념 하나로 살아남기 위해 애쓴다. <어톤먼트> 속 제임스 맥어보이는 극 초반 순수하게 사랑에 빠진 소년의 모습을 보여줬다. 후반에는 온갖 고초를 겪은 군인의 야성미(?)까지 감상할 수 있다. 로비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관객은 그의 다양한 매력을 만나볼 수 있어 눈이 즐겁다.

<글래스>

<23 아이덴티티>(2017), <글래스>(2018)의 비스트

큰 키에 근육질 몸, 일반인보다 두 배가량 더 긴 손가락, 한 마리의 들짐승 같은 모습. 슈퍼히어로라고 가정하면 완벽한 신체조건이다. 하지만 이 자는 다중인격장애를 겪고 있는 케빈의 몸에 기생하는 가장 포악한 인격인 비스트. 어린이, 여자, 강박증 환자 등 케빈에게는 수많은 인격이 있지만 비스트는 독보적이다. 막강한 힘으로 쇠창살까지 휘고 짐승처럼 인간에게 돌진하는 그. 만약 그를 마주친다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사력을 다해 도망쳐라.


하비에르 바르뎀

펠리프 VS. 안톤 시거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2010)의 펠리프

“‘남자’말고 ‘챔피언’을 구해야지.” 리즈(줄리아 로버츠)가 남자 구하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 지겹다고 하니 펠리프는 이렇게 답한다. 맞다. 펠리프는 ‘챔피언’ 즉, 최고의 남자에 가깝다. 리즈를 집까지 태워주기도 하고, 과음한 그녀에게 숙취해소제를 건네는 이 남자. 상대가 부담스럽지 않을 만큼 적당하게 챙겨주는 것이 그의 매력이다. 심지어 가장 늦게 등장(1시간 38분만에)하여 리즈의 사랑을 쟁취한 데는 역시 그의 다정함이 통한 것.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는 완벽한 삶을 뒤로하고 여행을 떠나 자기 자신을 발견해 나가는 여자와 자신이 무척 사랑하던 애인과 헤어져 아직 상처가 남아있는 남자의 사랑 이야기. 스위트한 하비에르 바르뎀의 모습을 감상하고 싶다면 적극 추천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7)의 안톤 시거

‘똑단발’ 머리에 부리부리한 눈, 그리고 항상 가지고 다니는 캐틀건(동물을 도살할 때 쓰는 장치). 모두 희대의 악당이라 불리는 안톤 시거의 트레이드마크다. 그는 범죄조직의 돈 가방을 들고 달아난 모스(조슈 브롤린)를 쫓는 악랄한 살인마다. 만약 악마가 실존한다면 그것은 바로 안톤 시거일 것. 방문 앞에 나타난 그림자만으로도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한다. 그런데 소름 끼치게 미소까지 지으면 어떻겠는가. 보자마자 나자빠질 것이다.

보통 사람이 살인을 저지를 때는 이유라는 것이 있다. 하지만 안톤 시거에게는 그런 논리라는 것이 없다. 그는 아무 죄 없는 사람에게 동전을 던지며 어느 면인지 맞춰 보라고 한다. 섬뜩하게 낮은 목소리로 “맞춰 봐”(Call it)라 외친다. “이럴 필요는 없잖아요”라고 아무리 말해 봐도 소용없다. 물론 그가 정말 죽여야 할 사람들을 죽일 땐 동전 던지기조차 하지 않는다.


한석규

정원 VS. 정익호

<8월의 크리스마스>

<8월의 크리스마스>(1998)의 정원

죽음이 눈앞을 가려오지만 담담하게, 그저 덤덤하게 살아가는 인생. 정원은 죽음 앞에서도 신을 원망하기보다는 남아있는 사람들을 걱정하는 그런 사람이다. 그는 초원사진관을 운영하는 30대의 순박한 청년으로, 주차 단속차량 증빙용 사진을 인화하기 위해 사진관에 드나들던 다림(심은하)의 매력에 점점 빠진다. 시한부 판정을 받은 그였기에 그녀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지는 못한다. 다림과의 관계를 빼면 그는 초연하게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 같다. 심지어 따스하고 인정 넘쳐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 역시 사람이기에 술을 먹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죽음을 앞둔 신세를 한탄하기도 하고, 이부자리에 누워 서럽게 눈물을 쏟기도 한다. 혼자 남을 아버지를 위해 비디오 플레이어 사용법이 적힌 쪽지를 남기는 정원. 아무렇지 않은 척 쪽지를 쓰던 그의 모습이 더욱 마음을 아프게 한다. 죽음을 앞둔 사람의 심정과 다림에 대한 마음을 섬세하게 표현하여, 묘한 울림을 줬던 한석규다.

<프리즌>

<프리즌>(2017)의 정익호

감옥이란 ‘동물의 왕국’에서 호랑이로 군림하는 자, 정익호다. 장기수로 수감 중인 그는 교도소 내 먹이사슬에서 교도관보다 위에 자리하고 있다. 그의 힘의 원천은 물론 돈과 폭력이다. 죄수들의 특기를 살려 각종 범죄에 투입해 부당한 이득을 취하고 있는 그. 평소에는 폭력이 아니라 카리스마로 상대를 제압한다. 카리스마가 통하기 않는 상대를 만났다면? 잔혹한 폭력이 시작된다.

그의 ‘잇 아이템’은 숟가락이다. 숟가락이 이렇게 무서운 무기였던가. 익호는 한 재소자의 눈알을 숟가락으로 파 버린다. “내가 만든 세상이니 아무도 못 건드린다”라는 대사에서, 그가 휘두른 절대 권력을 실감할 수 있다.


조진웅

석호 VS. 코우즈키

<완벽한 타인>

<완벽한 타인>(2018)의 석호

집에 하나(?)쯤은 있었으면 하는 그런 남자, 석호. 그는 아내에게는 다정한 남편, 딸에게는 이상적인 아빠를 자처한다. 능숙하게 프라이팬을 다루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돈 잘 버는 유방전문의이며, 고급스러운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다. 정말 남부러울 것 없이 누가 봐도 완벽한 가정을 꾸려가고 있다. 심지어 아내와 딸에게 사랑을 듬뿍 주는 로맨티시스트이기까지 하다. 그도 다른 친구들처럼 비밀을 숨기고 있기는 하지만 친구들에 비하면 그의 비밀은 정말 양반이다.

<아가씨>

<아가씨>(2016)의 코우즈키

혀로 펜촉을 핥는 버릇이 있어 혀에 묻은 거뭇거뭇 한 잉크, 숱이 많고 긴 눈썹. 가까이 다가가기 꺼려지는 조금은 기괴한 외양의 코우즈키. 그는 엄청난 재산을 상속받는 조카 히데코(김민희)의 후견인이자 이모부이다. 혀에 묻은 잉크처럼 검게 탐욕에 젖은 그는, 히데코의 재산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녀와 결혼까지 생각하는 파렴치한이다. 외설스러운 책들로 가득 찬 그의 서재를 보면 엄청난 변태 성욕 또한 확인할 수 있다. <아가씨>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긴 코우즈키이다.


설경구

김영호 VS. 김영호

<박하사탕>

<박하사탕>(1999)의 김영호

꽃을 들고 있던 남자가 총을 쥐게 되면 무슨 일이 생길까? <박하사탕>의 영호를 살펴보면 그 답을 알 수 있다. 수줍게 웃으며 순임(문소리)에게 꽃을 건네던 20살의 영호. 그는 사진사를 꿈꾸는 청년이었다. 하지만 1980년 5월 광주, 군인 신분이던 그는 도저히 제정신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사건을 겪게 된다. 그 충격으로 그는 자신을 잃어간다.

이후, 그는 구타를 일삼는 폭력적인 경찰이 되기도 하고 바람피우는 사업가가 되기도 한다. 어떤 변명을 하더라도 용서받지 못할 짓을 끊임없이 저지르고 다닌다. 세월이 흐를수록 그는 변해갔고 파괴되어 갔다. 순임이 마음을 담아 선물한 카메라까지 팔아버리니 정말 말 다 했다. <박하사탕은 >영호를 통해 군부독재 시절 만들어진 트라우마가 한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망가뜨렸는지 보여준다.


고 김주혁

유광식 VS. 진하림

<광식이 동생 광태>

<광식이 동생 광태>(2005)의 유광식

뭘 몰라도 너무 모른다. 광식은 그런 남자이다. 정말 답답할 지경으로 연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문제는 7년 전 짝사랑했던 윤경(이요원)이 다시 눈앞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녀를 잡기 위해 광식은 동생 광태(봉태규)에게 연애 코칭을 받는다. 광태는 광식과는 다르게 연애 경험이 많은 ‘선수’다. 광태의 코칭은 효과가 별로였다. 윤경이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것 같자, 광식은 포기하고 만다. 사실 윤경이 좋아한 사람은 광식이었다. 눈치 없고 착해 빠진 광식이 쉽게 바뀔 리 없다. 이 남자를 어쩌면 좋을까.

<독전>

<독전>(2018)의 진하림

폭탄 맞은 듯한 머리와 약에 취해 초점을 잃은 눈빛. 그는 정말 미친 사람처럼 보인다. 독종들이 잔뜩 모인 소굴에서도 뒤지지 않는 카리스마를 풍기는 진하림. 마약상인 그는 첫 등장부터 심상치 않았다. 부하의 머리를 강타하고, 피가 묻은 손으로 악수를 청하는 그의 모습에 누가 떨지 않으리. 등장할 때마다 관객들을 숨죽이게 하며, 긴장감을 안겨줬던 그다.


임채은 대학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