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고 모텐슨

누군가에게 비고 모텐슨을 묻는다면 '누구냐'라고 대답을 들을 확률이 높다. 하지만 그 뒤에 '반지의 제왕 아라곤'을 붙인다면 대부분 '아~'하고 대답할 것이다. 이름만 들었을 때 생소할지도 모르겠으나 여러 영화에서 인상 깊은 캐릭터들로 영화팬들에게 한 번쯤은 각인이 되었을 배우 비고 모텐슨. 최근 <그린북>으로 2019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가 되며 수상의 영예를 안게 될지 기대를 모으고 있기도 하다. 이에 그의 필모그래피 중 대표작 5개를 선정해보았다. 매 작품마다 캐릭터를 연기하려는 것이 아닌 캐릭터 그 자체가 되려 했던 그의 매력을 살펴보자.


반지의 제왕 트릴로지

The Lord Of The Rings, 2001-2003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을 꼽으라면 바로 <반지의 제왕> 트릴로지다. 악의 군주 '사우론'을 피해 절대반지를 파괴하기 위한 여정을 담은 <반지의 제왕>에서 그는 반지 원정대의 정신적 지주이자 곤도르 왕의 혈육을 잇는 자 '아라곤'을 연기했다. 떡진 단발머리에 섹시하게 주름진 이마(촬영 당시 그는 40대였다고 한다), 우수한 전투 실력으로 ‘더티 섹시’의 아이콘이 된 그는 <반지의 제왕>이후 큰 인기를 끌며 유명 할리우드 스타 반열에 올랐다.

<반지의 제왕: 두 개의 탑>

그의 인생을 바꾼 아라곤 역의 캐스팅 비화 또한 많이 알려져 있다. 시나리오를 처음 받았을 당시, <반지의 제왕> 원작을 몰랐던 그는 요정들이 나오는 판타지 영화에 출연하고 싶지 않을뿐더러 아들과의 시간을 더 보내기 위해 아라곤 역을 맡지 않으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반지의 제왕>의 팬이었던 아들이 아라곤 역을 적극 추천하며 설득했고, 그 결과 판타지 영화 팬들에게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인생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었다. 막상 촬영해보니 아라곤 역이 좋아져서 촬영 후에도 아라곤 복장을 벗지 않고 칼까지 차고 돌아다니다 길거리에서 경찰들에게 연행된 적이 있다는 후문도 있다.


이스턴 프라미스

Eastern Promises , 2007

<이스턴 프라미스>

<이스턴 프라미스>에서 그는 런던에 있는 레드 마피아 조직원 '니콜라이'역을 맡았다. 영화는 러시아 마피아 조직인 '보리 브 사코니(Vory v Zakone)’보스의 아들 '키릴(뱅상 카셀)'의 운전수였던 그가 조직의 일원이 되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를 그렸다. 보스의 속임수로 희생양이 된 니콜라이가 사우나에서 맨몸으로 괴한 둘과 싸우는 강렬한 시퀀스는 그에게 첫 번째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노미네이트라는 영광을 가져다주었다. 폭력성이 상당하지만 열연을 펼치는 냉혹하고 무표정한 그의 얼굴이 오랫동안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 영화다.

<이스턴 프라미스>

<반지의 제왕>에 이어 <이스턴 프라미스>에서도 웃픈 일화가 하나 더 있다. 어느 날 촬영이 끝난 비고 모텐슨이 촬영을 위해 그린 타투를 지우지도, 옷 또한 갈아입지도 않고 펍에 갔다고 한다. 그곳에서 몇 명의 사람들이 그를 진짜 보리 브 사코니의 조직원으로 오해하고 그를 매우 두려워했다고. 그는 캐릭터를 더 잘 이해하고 소화하고자 촬영 전에 보리 브 사코니를 다룬 책을 읽기도 하고, 러시아에 몇 주간 머무르며 통역 없이 5일간 시베리아 지역을 여행하기도 했다고 한다.


더 로드

The Road , 2009

<더 로드>

코맥 맥카시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 <더 로드>에서 그는 굶주림과 혹한으로부터 아들을 데리고 길을 떠나는 '남자' 역을 맡았다. 서로를 죽이고 잡아먹는 등 폐허가 된 세상의 몰락한 윤리의식 속에서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부자의 이야기가 묵직하게 다가오는 영화다. 비고 모텐슨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항상 경계하고, 부상으로 인해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아들을 지켜내려 하는 아버지의 씁쓸함과 처절함을 리얼하게 연기해내었다.

<더 로드>

비고 모텐슨은 <더 로드> 속 오랫동안 굶주린 남자 역을 위해 대역 없이 스스로 약 20kg 이상을 감량했다고 한다. 촬영 중에도 고의적으로 굶곤 했다고. 또한 호흡과 감정선을 유지하기 위해 아역배우와 늘 함께 지냈으며, 촬영용 의상을 입고 잠을 자기도 했다. 피츠버그에서 촬영할 당시, 마트에 들렀다가 홈리스로 오해받고 쫓겨난 적도 있다고 한다.


캡틴 판타스틱

Captain Fantastic , 2016

<캡틴 판타스틱>

판타스틱 한 삶은 무엇일까? 그에게 두 번째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노미네이트의 영광을 안겨다 준 작품 <캡틴 판타스틱>은 산속에서 살아가는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도시와 단절된 채 6남매를 산속에서 키우는 아버지 ‘벤’. 어느 날 조울증 치료차 도시에 내려갔던 아내가 자살을 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아이들과 벤은 그녀의 마지막 유언을 지키고자 장례식장이 있는 도시로 향한다. 그곳에서 벤은 자신이 만든 이상적인 작은 사회에 균열이 나기 시작하자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상실 속에서 문제를 깨닫고 아이들과 극복해 나가는 비고 모텐슨의 따뜻한 연기가 인상적인 작품이다.

사진 출처 : Dominic Monaghan 인스타그램

앞선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비고 모텐슨은 영화에 몰입하기 위해 촬영 전부터 세트장에 와 이것저것 꾸미는 일을 도왔다고 한다. 영화 속 곳곳에 놓인 소품과 책들이 그의 것이라고. 또한 캡틴 판타스틱의 6 남매를 위해 큰 선물을 주어 화제가 되었다. 첫 촬영 당시 '나이'역을 맡은 배우 '찰리 쇼트웰'이 쪽지를 주고 도망갔는데, 펼쳐보니 <반지의 제왕>의 아라곤이 그려져 있고 'I know who you are'라고 쓰여있었다고 한다. 알고 보니 6남매 모두 <반지의 제왕>의 팬이었던 것! 아이들을 위해 그는 반지 원정대에게 연락을 했고, 아이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고 한다. 이후 <반지의 제왕>에서 '메리'역을 맡은 배우 '도미닉 모나한'의 인스타그램에 사진이 올라와 팬들의 부러움을 샀다(다들 나이를 먹은 모습에 일부 팬들이 가슴 아파하기도 했다).


그린 북

Green Book , 2018

<그린 북>

골든 글로브 뮤지컬 코미디 부분 작품상, 각본상을 수상한 <그린 북>은 인종차별이 만연했던 1962년의 미국, 흑인 피아니스트 ‘돈 셜리’와 백인 운전기사 ‘토니 발레롱가’의 실제 우정을 그린 영화다. 인종 차별주의자였던 토니와 사회로부터 받은 내면의 아픔을 지닌 셜리가 투어를 위해 여정을 떠나게 되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가까워지게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토니 발레롱가 역을 맡은 비고 모텐슨은 토니가 이탈리아계 이민자 출신임을 고려해 이탈리아식 억양이 가미된 영어 발음을 구사, 실제 인물과의 높은 싱크로율을 자랑했다.

<그린 북>

뿐만 아니라 비고 모텐슨은 실제로 먹성이 좋아 몸집이 있었다는 토니 발레롱가의 외양까지도 비슷하게 하기 위해 <더 로드>때와는 반대로 몸무게를 20kg을 찌웠다. 영화 속에서 그가 핫도그를 먹는 시합을 하는 장면이 있는데, 프로덕션 스텝이 그에게 핫도그를 뱉어낼 바구니를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15개의 핫도그를 먹었다는 일화가 있다. 이러한 각고의 노력 끝에 2019년 그의 인생에서 3번째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가 되었다. 과연 그가 삼수 끝에 트로피를 거머쥐게 될지 알 수 없지만, 다양한 캐릭터로 매번 색다른 연기를 선보였던 그의 필모그래피를 보았을 때 이젠 정말 받을 만한 때가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씨네플레이 문선우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