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옛날 얘기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로맨틱 코미디의 명가’라 불렸던 혹은 지금도 불리는 영국의 영화 제작사 워킹타이틀에 대한 이야기다. 워킹타이틀의 로맨틱 코미디를 다시 기억하는 이유는 <브리짓 존스의 베이비> 때문이다. 개봉을 앞두고 있는 이 영화에는 세월을 속일 수 없는 르네 젤위거의 얼굴이 있다. 그녀를 보며 1990~2000년 초반의 워킹타이틀 로맨틱 코미디 영화들을 떠올렸다. 그땐 정말 그 영화들에 열광했던 시절이었다. 그만큼 젊기도 했고.
찬란했던 로맨틱 코미디 영화 리스트부터 정리해보자. 시작은 1994년 제작된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이었으면 좋겠다. 에디터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워킹타이틀 로맨틱 코미디 영화다. 사실 이후 등장하는 워킹타이틀의 로맨틱 코미디는 이 영화의 변주에 가깝게 느껴진다. 두번째 영화는 <노팅 힐>이다. 1999년에 나왔다. 그 다음은 곧 만나게 될 <브리짓 존스의 베이비>의 1편 <브리짓 존스의 일기>(2001)다. 2003년 크리스마스에 현 시대의 로맨틱 코미디의 교본 같은 영화인 <러브 액츄얼리>가 등장한다. 그리고 10년이 지났다. 다시 만난 워킹타이틀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는 <어바웃 타임>이다. 이 리스트에서 빠진 영화는 1995년작 <프렌치 키스>, 2002년작 <어바웃 어 보이>, 2005년작 <윔블던> 등이 있다. 이 영화들이 리스트에서 빠진 이유는 좀 있다 밝히겠다.
휴 그랜트: #영국 #중산층 #30대 #매력남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부터 <브리짓 존스의 일기>까지 빠지지 않은 배우가 휴 그랜트다. 워킹타이틀의 로맨틱 코미디와 한몸처럼 느껴지는 이 배우가 없었다면 과연 영국의 이 제작사가 ‘명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을까. 옥스포드 영문과를 졸업하고 연극 무대에서 실력을 다진 휴 그랜트는 워킹타이틀의 로맨틱 코미디에서 바로 자기 자신, 휴 그랜트를 연기했다. 소심하고, 어딘가 불안하고, 그러면서도 예의 바른 모습이 있고, 의외로 위트 있는 말을 잘하고, 어딘가 지적인 느낌도 있고, 무엇보다 미소가 매력적이었다. 이건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 이후 변하지 않은 기본 구성이다. 뿔테 안경 역시 휴 그랜트를 연기한 게 아닐까 싶다. 물론 안경을 벗은 그의 모습도 나쁘지 않다. 휴 그랜트의 매력이 가장 크게 작용한 영화를 꼽자면 <노팅 힐>이 아닐까 싶다. 이 어리숙해보이는 30대 이혼남이 어떻게 할리우드 스타와 사랑에 빠질 수 있단 말인가. 미국을 염두에 둔 영국의 우월함이 엿보이기도 하는 이 관계가 납득이 된다면 그건 아마 휴 그랜트가 있기에 가능했다.
런던: #쿨브리타니아 #노팅힐 #독신남녀
뉴욕 대신 런던. 워킹타이틀의 로맨티 코미디가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는 사이 영국, 특히 런던이 로맨틱 코미디의 새 무대가 됐다. 말하자면 로맨틱한 여행을 꿈꿀 때 뉴욕 대신 런던을 꿈꾸는 사람들이 늘었다. 특히 런던의 중산층이 거주하는 포토 벨로는 <노팅 힐>을 본 대학생 배낭여행족들의 필수 코스였다. <러브 액츄얼리>에서는 영국 수상을 전면에 내세우기까지 한다. 이 영화 덕분에 수상 관저가 런던의 다우닝가 10번지에 있다는 사실을 안 사람도 많지 않을까. 이토록 런던이 매력적일 수 있는 이유는 <브리짓 존스의 일기>를 떠올려보면 답이 나온다. 술과 담배에 찌든 삶을 정리하고 다이어트를 결심하는 브리짓(르네 젤위거)에게는 방해꾼들이 있다. 바로 친구들이다. 단순히 주인공보다 못생겼거나 덜 매력적인 친구들이 아닌 특별한 친구들이다. 유색인종, 장애인, 때론 대책없는 멍청이들이 등장한다. 그들과 함께 하는 런던의 독신남녀. 아이러니하게도 워킹타이틀의 로맨틱 코미디를 보고 런던을 매력적인 도시라고 생각하는 건 달달한 연애 장면보다 어쩌면 찌질해보이기도 하는 그 독신남녀들의 삶이 근사해보이기 때문이다.
앞서 <프렌치 키스> <어바웃 어 보이> <윔블던> 등의 영화를 이 글에서 언급하지 않으려고 했던 이유가 이제 등장한다. 이 영화들은 워킹타이틀의 로맨틱 코미디의 아버지 같은 존재 리처드 커티스가 직접 참여하지 않은 작품이기 때문이다. <프렌치 키스> <윔블던>은 애덤 브룩스, <어바웃 어 보이>는 닉 혼비의 원작을 크리스 웨이츠, 폴 웨이츠 감독 등이 공동 각본으로 이름을 올렸다.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 <노팅 힐>, <브리짓 존스의 일기>, <러브 액츄얼리>까지 리처드 커티스가 각본을 맡았다. 유명한 워킹타이틀 로맨틱 코미디가 비슷비슷해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휴 그랜트라는 배우, 런던이라는 도시의 매력 등 모든 게 사실은 리처드 커티스의 창조물이다. 휴 그랜트는 리처드 커티스의 매력적인 대역일지도 모른다. 특별하고 매력적인 친구들은 실제 리처드 커티스의 친구들에게서 빌려온 캐릭터일 가능성이 크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 원작자인 헬린 필딩은 그의 친구다. 그러고 보면 왜 주인공들이 다 30대 독신인지 이해가 되기도 한다. 리처드 커티스는 1956년생이다. 대략 나이를 계산해보면 답이 나온다. 그는 대학 졸업 직후 TV코미디쇼의 각본팀에서 일을 시작했다. 1980년대 최고의 인기를 누린 로완 앳킨슨 주연의 시대극 시트콤 <블랙애더>로 유명해졌다. 로안 앳킨슨이 누군가. 바로 미스터 빈이다. 리처드 커티스의 유머 감각이 어디서 나왔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2003년 <러브 액츄얼리>는 그가 직접 연출까지 해냈다. 워킹타이틀 로맨틱 코미디의 한 시대를 마감하는 작품이라고 해도 될까. 리처드 커티스가 다시 각본을 쓴 <어바웃 타임>(2013)까지는 꼭 10년이 걸렸다.
이 글의 시작은 <브리짓 존스의 베이비>였다. 이 영화가 ‘로맨틱 코미디의 명가’ 워킹타이틀의 명성을 이을 수 있을까. 사실 워킹타이틀은 로맨틱 코미디만을 제작한 회사는 아니다. 잘 알려진 영화 <빌리 엘리엇>를 비롯해 코엔 형제의 <파고> <오! 형제여 어디 있는가>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부터 최근작인 <헤일! 시저>까지 제작했다. 가족영화 <내니 맥피> 시리즈도 워킹타이틀 작품이다. 그러니까 워킹타이틀은 로맨틱 코미디 말고도 예술영화, 상업영화 가리지 않고 잘 만드는 제작사다. 그래도 워킹타이틀 하면 그때 그 시절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브리짓 존스의 베이비>를 아직 보진 못했지만, 벌써부터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브리짓이 언제적 브리짓인가. 로맨틱 코미디의 명가 워킹타이틀에 걸맞는 새로운 캐릭터, 시리즈가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래도 한줌의 기대를 걸어본다. <브리짓 존스의 베이비>를 보며 그때 그 시절처럼 배꼽 잡고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씨네플레이 에디터 두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