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 노래 ‘홈 스윗 홈’(Home Sweet Home)의 가사처럼 우리는 집을 휴식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집에 가는 길은 대개 즐거운 편이지만, 명절 연휴 기간엔 집에 가는 길도 그렇게 편하지가 않다. 정체된 도로에서 반나절을 보내거나, 표를 예약 못해 기차를 입석으로 타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그렇게 명절 연휴 때마다 집 가는 길이 고됐을 분들께 바친다. 공감 120%, 집 가는 길이 험한 영화들이다.


집 가는 길 우당당탕

‘사고 연발’ 형

라이터를 켜라

장항준 감독|김승우, 차승원, 박영규|2002|105분|15세 관람가

허봉구(김승우)는 백수다. 예비군 훈련에 왔는데 집 갈 차비도 없어서 남의 택시에 얻어 타 간신히 서울역까지 왔다. 마지막 남은 300원으로 라이터를 샀는데, 하필 그게 건달 양철곤(차승원) 손에 들어갔다. 봉구는 라이터를 되찾으려 기차에 올라타고, 의도치 않게 국회의원 박용갑(박영규)과 자폭하려는 철곤에 맞서게 된다.

줄거리만 봐도 서럽다. 그 귀찮은 예비군을 끝내고 집에 가려는데 돈이 없다니. 물론 나이 서른에 날백수인 봉구 탓이지만. 그 거추장스러운 군복을 입고 기차에서 건달들에게 맞서야 하다니. 물론 이것도 라이터에 목숨 건 봉구 탓이지만. 남들은 고작 300원짜리라고 하는 그 라이터가 봉구에겐 마지막 자존심이었을 테니, 그의 심정이 이해 안 가는 건 아니다. 봉구의 뚝심은 결과적으로 대참사를 막았지만, 모든 예비군들은 조용히 집에 들어가서 쉬길 권하고 싶다. 건강이 최고의 자산이니까.


터널

김성훈 감독|하정우, 배두나, 오달수|2016|126분|12세 관람가

정수(하정우)는 그저 집에 가고 있을 뿐인데, 갑자기 터널이 무너져내 갇히고 만다. 그나마 주유소에서 받은 생수 두 병과 딸의 생일이라고 미리 사둔 케이크가 차 안에 있다. 금방 구해주겠지, 싶었는데 구조대는 오지 않는다. 터널 밖에선 정수의 아내 세현(배두나)가 구조를 촉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닌다.

<터널>은 어떤 사고/사건 이후 대한민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징후들을 거의 고스란히 재현한다. 그래서 제3자 입장에선 이 재현이 너무 현실적이라 웃긴데, 웃다가도 씁쓸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다. 다른 곳도 아니고 가족 만나러 집 가는 길에 이런 사고를 겪는다면, 다시는 쉽게 운전대로 잡을 수 없지 않을까.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이라면 분명 터널을 지날 때 환풍기를 세봤을 거라고 자신할 수 있다.


7번째 내가 죽던 날

라이 루소 영 감독|조이 도이치, 로건 밀러|2017|99분|15세 관람가

고등학생 샘(조이 도이치)은 2월 12일, 특별한 하루를 보낸다. 친한 친구들과 파티도 즐기고, 모르는 상대에게 꽃을 선물 받는다. 그렇게 하루를 즐기고 친구들과 집으로 향하던 중, 오전 12시 39분에 교통사고를 내고 만다. 샘은 다시 2월 12일에 눈을 뜬다. 하루가 다시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12시 39분에 또 사고를 당하고, 2월 12일에 눈을 뜬다. 샘은 이제 반복되는 하루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한다.

<7번째 내가 죽던 날>은 타임리프 상상력을 성장 드라마로 풀어낸 감성적인 영화다. 하지만 상상해보자. 열심히 일하고 불금답게 신나게 놀다가 이제 한숨자야지 집에 가는 길에 사고를 당했다. 심지어 눈 떠보니 또 일하러 가고, 약속에 가야 하고, 한숨도 못 잔 채 다시 아침에 눈뜬다면? 이 정도면 교훈이 아니라 고문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이런 날엔 세상 어디에 있는 누구라도 집 가는 길이 무사안녕하길 진심으로 바란다.


내 가족이 있는 곳이 집

‘가족 찾아 삼만리’ 형

에이 아이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할리 조엘 오스먼트, 주드 로, 프란시스 오코너|144분|2001|12세 관람가

감정을 가진 소년형 로봇 데이빗(할리 조엘 오스먼트)은 스윈튼 부부의 집으로 입양된다. 스윈튼 부부의 아들 마틴이 불치병에 걸려 냉동인간 상태이기 때문이다. 모니카(프란시스 오코너)는 처음엔 데이빗에게 거부감을 보이지만, 이내 그를 아들처럼 여기고 아껴준다. 하지만 병을 치료받고 집으로 돌아온 마틴이 데이빗과 불찰을 일으키고, 스윈튼 부부는 데이빗을 유기하게 된다. 데이빗은 집으로, 엄마 모니카에게로 돌아가기 위해 인간이 되려고 한다.

오랜만에 가족을 만나러 집에 갔는데, 알고 보니 연락도 없이 이사 갔고,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아서 결국 발품 팔아 이사한 집에 찾아갔는데, 잠금장치가 비밀번호 도어락으로 바뀌어있다면. 데이빗이 딱 그런 상황이다. 물론 그가 훨씬 더 어렵고 비참한 상황인 건 분명하다. 아예 가족에게 버림받았으니까. 그럼에도 그는 인간이 돼서라도 집, 가족, 엄마의 품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그의 확고한 발걸음은 ‘인간이 되는 것’이란 허무맹랑한 목표도 응원하게 한다.


도리를 찾아서

앤드류 스탠튼 감독|엘런 드제너러스, 앨버트 브룩스, 에드 오닐|2016|97분|전체 관람가

건망증에 걸린 물고기 도리(엘런 드제너러스)는 멀린(앨버트 브룩스), 니모(헤이든 롤렌스) 부자와 함께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다. 어느 날, 도리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고 세 물고기는 함께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도리의 실수로 니모가 다치게 되자, 말린은 도리에게 화를 내고 헤어진다. 홀로 남은 도리가 인간에게 납치되고, 말린과 니모는 도리를 구하기 위해 해양생물 연구소로 향한다.

<도리를 찾아서>는 작품을 위해서라면 무지막지하게 잔인해질 수 있는 시나리오 작가들의 심성이 엿보인다. 도리를 보라. 몇 년 만에 본인의 가족이 떠올랐으니 그저 만나고 싶을 뿐인데, 가장 친한 멀린과 싸우고 납치까지 당한다. 양심도 없는 작가들 같으니. 본인들은 할리-우드에서 칼같이 퇴근 시간 지켜서 매일 저녁마다 가족들을 볼 텐데! 그래도 그들의 잔인함 덕분에 도리의 귀환기가 더욱 감동적이니 가끔은 그 마음, 다시 끄집어내주길.


너무 멀어서 더 힘들어

‘우주미아’ 형

마션

리들리 스콧|맷 데이먼, 제시카 차스테인, 세바스찬 스탠|2015|144분|12세 관람가

화성 탐사팀 ‘아레스 3’는 폭풍이 온다는 소식에 화성 상승선을 타고 지구로 귀환한다. 그 와중 사고가 일어나면서 식물학자 마크 와트니(맷 데이먼)가 화성에서 실종되고 만다. 아레스 3팀의 통신을 받은 NASA는 마크 와트니의 사망을 발표하지만, 마크 와트니는 다행히(혹은 불행하게도) 화성에 살아있다. 마크 와트니는 살아서 지구로 돌아가기 위해 모든 지식을 총동원한다.

조난 전문 배우 맷 데이먼이 가장 먼 곳에서 조난 당한 영화 <마션>.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집’이란 단어의 범위가 얼마나 넓어질 수 있는지 몸소 느낄 수 있다. 내 집은 우주에서도 보이지 않을 작은 곳이지만, 실제로 우주에 간다면 지구가 곧 유일한 나의 집이 된다. 낯선 땅인 화성도 지내보니 집처럼 느껴지는 인간의 친화력도 새삼스럽다. 그래도 제일 좋은 건 가족들이 있는 본가가 아니겠는가. 화성인 마크 와트니의 지구 귀환길처럼 명절 연휴 귀성길에 오른 모든 분들을 응원한다.


그래비티

알폰소 쿠아론 감독|산드라 블록, 조지 클루니|2013|90분|12세 관람가

라이언 스톤(산드라 블록)은 맷 코왈스키(조지 클루니)를 비롯한 팀원들과 함께 허블 우주망원경을 수리하고 있다. 수리를 마치면 귀환할 수 있는데, 한 인공위성이 폭발하면서 파편이 날아들기 시작한다. 그 무엇도 익숙하지 않은 우주에서 라이언 스톤은 살기 위해 지구로 돌아가야 한다.

<마션>과 마찬가지로 살기 위해 지구라는 집으로 돌아가는 SF 영화 <그래비티>. 명절 뉴스에서 종종 귀성길 사고 소식을 듣지만, <그래비티>의 사고는 차원이 다른 스케일이다. 보험 처리는 둘째치고 집으로 돌아갈 가능성조차 점점 낮아지고 있으니 가히 최악의 귀성길. 특히 주인공 라이언 스톤은 일부러 지구의 집에서 떠나왔는데,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만 살 수 있는 역설적인 상황. 372마일(약 599km)을 가야 집에 도착할 수 있다. 집이 너무 멀어서 고민 중이라면 이 영화를 보고 마음먹을 수 있…을까?


집에 가는 길에 모든 걸 깨달았다네

‘자아 발현’ 형

다시 태어나도 우리

문창용, 전진 감독|파드마 앙뚜, 우르갼 릭젠|2016|95분|전체 관람가

9살 파드마 앙뚜는 린포체다. 티베트 불가에서 전생의 업을 잇기 위해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환생한 승려란 뜻이다. 우르갼 릭젠은 파드마 앙뚜의 스승이자 린포체를 보좌하는 노승이다. 앙뚜가 가진 린포체의 기억이 점점 흐릿해지자 앙뚜와 릭젠은 린포체가 전생에 생활했던 티베트 캄 사원으로 향한 여정을 시작한다.

자동차나 기차, 비행기를 이용하는 고향 귀성길은 그나마 낫다. <다시 태어나도 우리>의 두 승려는 맨발로 고향으로 돌아간다. 심지어 인도에서 티베트로, 국경을 넘는 귀성길에 오른다. 사제 관계, 부자 관계, 그러면서 범접할 수 없는 성인과 일반 승려. 기묘한 두 사람의 관계를 보면 웃음꽃이 핀다. 두 사람의 귀성길이 끝날 즈음엔 눈물이 난다. 이런 관계를 위해 우린 집으로 향하고 있는 게 아닐까.


트리 오프 라이프

테렌스 멜릭 감독|브래드 피트, 숀 펜, 제시카 차스테인|2011|137분|15세 관람가

잭(숀 펜)은 아버지 오브라이언(브래드 피트)과 통화를 한다. 자신의 동생이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아버지와의 통화 이후 잭은 가족들과 함께 살았던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트리 오브 라이프>는 진짜로 집에 가는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떠도는 시간을 잡아 유영하는 영화다. 영화는 한 중년의 가족과 집, 과거를 회상하는 걸 넘어 우주의 탄생과 자연을 함께 그린다. 누군가는 역대급 우주와 자연에 대한 영화라고 찬사했고, 누군가는 자의식에 빠진 영화라고 비난했다. 이런 영화를 굳이 소개하는 이유는 누군가가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건, 모두에게 다른 의미일 수 있기 때문이다. 돌아가는 이가 누구인지에 따라,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의미가 다른 것처럼, 이 영화가 그런 다양한 의견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영화를 귀성길에 함께 하면 좋을 것 같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경탄을 하든, 아니면 푹 숙면을 취하든 시간은 잘 갈 테니까.


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