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쥬랜더 리턴즈> 메인 예고편

벤 스틸러의 신작 <쥬랜더 리턴즈>가 지난 8월 31일 개봉했다. 영화사상 가장 충만한 자의식을 자랑하는 캐릭터 데렉 쥬랜더를 내세운 코미디 <쥬랜더>가 15년 만에 속편으로 돌아온 것이다. 주연과 연출을 맡은 벤 스틸러의 자리는 물론 정신 사나운 유머와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카메오들까지 그대로다. 이번주 '영화人'의 주인공은 벤 스틸러다. 하지만 <박물관은 살아 있다>, <미트 페어런츠> 같은 거대 히트작은 없다. 배우가 아닌 '감독'으로서의 벤 스틸러에게 초점을 맞췄기 때문이다. 1994년 <청춘 스케치>부터 2013년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까지, 꼭 20년간 발표한 다섯 작품을 소개한다.


<청춘 스케치>
(Reality Bites, 1994)

<청춘 스케치>는 90년대에 20대를 지나던 이들의 인생영화다. '뭘 좀 안다'싶은  공간에 가면 대부분 바로 저 <청춘 스케치> 포스터가 붙어 있었을 정도다. 다만 이 작품이 벤 스틸러의 첫 영화 연출작이라는 사실은 사뭇 낯설다. 그에게 코미디 스타라는 수식이 가장 익숙하기 때문일 것이다. <청춘 스케치>는 꽤 진지하고, 얼마간 우울하다. "우린 이것만 있으면 돼. 담배 몇 개피, 커피 한 잔, 그리고 약간의 대화. 너, 나 그리고 5달러" 같은 로맨틱한 대사가 유명하지만, 주인공 레이나(위노나 라이더)와 트로이(에단 호크)가 느끼는 현실에 대한 불안과 설렘이 더 먼저 떠오른다. 원제 'Reality Bites'의 뜻 역시 '현실은 만만치 않아'다.

자신이 원하는 걸 추구하겠다는 의지와 현실적인 고민을 동시에 품은 PD 지망생 레이나는 마냥 한량처럼 사는 기타리스트 트로이와 지극히 현실적인 방송국 부사장 마이클(벤 스틸러) 사이에서 흔들린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꿈같은 이야기만 늘어놓는 트로이보단 자신이 동경하는 분야에서 활약하는 마이클에게 더 이끌린다. 다만 <청춘 스케치>는 둘 중 어느 가치가 더 중요하다고 손 들어주지 않는다. 아이같은 트로이를 때론 한심하게 비추다가도 처음 대면하는 감정과 현실에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을 따뜻하게 바라본다. 레이나가 자유롭게 연출한 비디오를 난도질해놓는 마이클의 변명이 설득력 있게 들리는 것도 사실이다. 영화를 떠도는 불안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놓이는 건, 레이나가 오랜 시간을 돌아서라도 결국 자신의 선택을 따른다는 점이다. <청춘 스케치> 바로 보기


<케이블 가이>
(The Cable Guy, 1996)

<케이블 가이>는 벤 스틸러가 지금까지 연출한 여섯 편의 작품 중 그의 모습이 가장 드물게 나타나는 작품이다. 대신 영화를 장악하는 건 짐 캐리다. 친구에게 케이블TV 설치를 추천 받은 스티븐(매튜 브로데릭)은 케이블 가이 칩(짐 캐리)에게서 후한 서비스를 받는다. 이후 두 사람은 점점 가까워지지만, 어느 날 스티븐은 농구 경기 중 칩의 기괴한 행동을 보고서 그를 멀리 하려 한다. 다음은 예상 그대로. 칩은 집착적인 태도로 스티븐의 삶을 옭아매려 든다.

벤 스틸러는 1994년 한해 <에이스 벤츄라>, <마스크>, <덤 앤 더머>를 히트 시키며 코미디 스타로 발돋움한 짐 캐리의 또 다른 면모를 이끌어냈다. 짐 캐리가 보여줄 수 있는 다채로운 표정에 광기를 더해, 우스울수록 섬뜩한 느낌을 자아낸다. 그의 오버액션을 기대했던 관객들은 칩의 광기어린 표정에 등을 돌렸고, 높았던 기대치에 비해 실망스러운 흥행 성적을 기록했다. 하지만 <케이블 가이>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트루먼 쇼>(1998), <맨 온 더 문>(1999) 같은 명연을 더 늦게 만나게 되지 않았을까? 이 작품에서 벤 스틸러는 훗날 단짝이 되는 오웬 윌슨, 잭 블랙과 처음 작업한다. <케이블 가이> 바로 보기


<쥬랜더>
(Zoolander, 2001)

감독과 배우를 병행하던 벤 스틸러의 커리어는 <메리에겐 특별한 것이 있다>(1998), <미트 페어런츠>(2000)의 대단한 성공으로 배우로 한껏 기운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곧 그는 자신이 주인공을 맡은 세 번째 연출작 <쥬랜더>를 발표한다. "잘생긴 게 유일한 흠"인 슈퍼 모델 데릭 쥬랜더(벤 스틸러)는, 킥보드와 요요를 즐기는 신인모델 헨젤(오웬 윌슨)에게 왕좌를 빼앗긴다. 노동 착취를 뿌리 뽑겠다고 천명한 말레이시아 수상을 죽이려던 디자이너 무가투(윌 퍼렐)은 실의에 빠져 고향으로 돌아간 쥬랜더를 세뇌시킨다.

벤 스틸러가 주연, 연출, 제작은 물론 처음으로 각본까지 맡은 <쥬랜더>는 그야말로 그의 자의식이 용솟음치는 영화다. 자신의 잘생김에 스스로 괴로워 하는 주인공이 끝내 세상을 구원한다는 얼토당토 않는 이야기를 시종일관 작정한 듯한 병맛코드로 풀어낸다. 특히 쥬랜더의 친구들이 기름을 뿌리며 놀다가 떼죽음을 당하는 주유소 신이나 쥬랜더와 헨젤의 런웨이 배틀 신은 명불허전이다. 나탈리 포트만, 패리스 힐튼, 데이빗 보위, 톰 포드, 칼 라거펠트, 그리고 도널드 트럼프 부부까지 곳곳에 출연하는 카메오를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호불호도 뚜렷하게 갈리는 편인데, 놀랍게도 진지한 영화를 만들기로는 둘째 가기 서러운 테렌스 맬릭 감독이 <쥬랜더>를 가장 사랑하는 영화로 선정한 바 있다.


<트로픽 썬더>
(Tropic Thunder, 2008)

주연작 <미트 페어런츠 2>(2004), <스타스키와 허치>(2004), <마다가스카>(2005), <박물관이 살아있다>(2006) 등을 성공시킨 벤 스틸러는 7년 만에 새 영화 <트로픽 썬더>를 내놓는다. 영화의 규모(제작비 9200만 달러)로 보나 <쿵푸 팬더>(2008)의 잭 블랙과 <아이언 맨>(2008)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기용한 캐스팅으로 보나, 벤 스틸러의 블록버스터라 부를 만하다. 한물간 액션스타 터그(벤 스틸러), 저질 유머를 일삼는 코미디언 제프(잭 블랙), 과도하게 역할에 몰입하는 연기파 배우 커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베트남 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를 촬영하기 위해 오지에 떨어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벤 스틸러는 이 작품을 <태양의 제국>(1987)에 출연하던 시기부터 구상해왔다고 한다. 정글에 들어가 영화를 찍다가 진짜로 고립돼 버린 배우들이 그 시작점이었다. <트로픽 썬더>는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까지 방영된 코미디쇼  <더 벤 스틸러 쇼>부터 줄곧 벤 스틸러의 연출작의 동력이었던 패러디의 힘이 유독 돋보이는 영화다. <디어헌터>(1978), <지옥의 묵시록>(1979), <람보>(1982), <플래툰>(1986), <풀 메탈 재킷>(1987) 등 고전 전쟁영화의 흔적들이 확연하다. 그는 베트남(이라고 우기는 오지)이라는 공간에 들어가 정신 없는 유머를 쏟아내면서 베트남전과 할리우드 영화 시스템을 동시에 비웃는다. 흑인 연기에 몰두한 나머지 흑인으로 수술하는 커크 역에 '아이언 맨'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캐스팅 한 것도 명징한 의도가 엿보인다. <트로픽 썬더> 바로 보기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The Secret Life of Walter Mitty, 2013)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의 주인공 월터(벤 스틸러)는 시도때도 없이 공상에 빠진다. 특별히 해본 일도, 여행한 경험도 없는 <라이프>지 필름 현상부원일 뿐이지만, 상상 속에서 그는 폭발 직전의 건물에 뛰어 들어 사랑하는 여자의 애완견을 구해내는 남자다. <라이프>의 마지막호 커버사진을 장식할 필름이 사라졌다는 사실은 안 그는 연락처는커녕 정해진 거처도 없는 작가 오코넬(숀 펜)을 찾아 떠난다. 머릿속에서만 부딪히던 모험을 '업무'를 위해 직접 감행해야 하는 것이다. 

제임스 서버가 1939년 펴낸 동명의 소설이 원작으로, 순간의 공상 속에서 수많은 인물이 된다는 설정을 토대로 <행복을 찾아서>(2006)의 작가 스티븐 콘래드가 각본을 완성했다. 줄거리에서 가늠할 수 있듯,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는 벤 스틸러의 전작과 달리 농담이나 유머가 거의 배제돼 있다. 현실을 벗어나 저 앞으로 더 걸어가면 전혀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있다는 명징한 메시지를 (감독 자신이 연기한) 월터가 세계 곳곳을 떠돌아다니는 과정을 통해 설파한다. 이토록 모범적인 이야기가 얼핏 따분하게 들릴지 모르나, 영화는 그 보편적인 가치를 강력하게 퍼트린다. 이러한 감동은 벤 스틸러가 익히 보여준, 주눅들고 망설이거나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뚫어지게 쳐다보는 두 가지 눈빛의 낙차로 인해 더욱 힘을 얻는다. 스케이트보드로 그린란드의 도로를 달리고 중앙아시아의 눈덮인 산을 오르면서, 월터는 오코넬을 찾겠다는 목적을 넘어 제 안에 갇힌 자신을 발견하고 그걸 부숴나간다. 월터의 긴 여정 끝에 <라이프>지 마지막 표지를 보는 순간, 마음이 한없이 부풀어오른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바로 보기


씨네플레이 에디터 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