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리암 니슨이 논란에 휩싸였다. 새 영화 <콜드 체이싱> 개봉을 앞두고 가진 인터뷰에서 “과거 가까운 사람이 흑인에게 성폭행 당해서 흑인을 때리기 위해 곤봉을 들고 다녔던 적이 있다”는 발언을 해 문제가 된 것이다. 사실 인종차별의 의도는 없었다. 복수와 관련된 영화에서 캐릭터가 어떻게 분노를 느끼는지 설명하기 위해 밝힌 자신의 흑역사였다. 또 그게 지금은 부끄럽고 후회된다고도 덧붙였다. 하지만 적절치 못한 고백이었단 반응이 주를 이뤘다. 그런 까닭에 <콜드 체이싱>은 계획했던 레드 카펫 시사회가 취소됐고, 여론마저 싸늘해지며 흥행 전선에 먹구름이 잔뜩 드리워졌다. 지난 10년간 리암 니슨은 누구보다도 이런 보복(?) 액션 스릴러에 특화된 색채를 보여 왔기에, 이번 논란이 더 두드러진 건지 모른다.

연극 무대에 오랫동안 서왔고, 80년대부터 여러 영화에 출연했던 리암 니슨이 주목받게 된 건 40대가 넘어서 출연한 스티븐 스필버그의 <쉰들러 리스트> 덕분이었다. 이 영화로 오스카 남우주연상 후보로도 오른 그는 <롭 로이>와 <마이클 콜린즈>, <킨제이> 등 실존 인물들의 캐릭터를 연기하며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아울러 <스타워즈> 밀레니엄 시리즈와 <갱스 오브 뉴욕>, <러브 액츄얼리>, <킹덤 오브 헤븐>, <배트맨 비긴즈> 등 할리우드 대작들에서 비중 있는 조역들을 오가며 자연스럽게 자신의 스펙트럼을 넓혀 갔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니슨은 마치 찰스 브론슨의 궤적을 떠올리게 할 만한 선택을 하게 되는데, 바로 ‘아윌 파인드 유, 앤 아윌 킬 유’를 외쳤던 <테이큰>의 출연이었다.

대기만성형의 배우, 지천명에 액션 스타가 되다

<테이큰> 포스터

남들은 이제 은퇴해 코미디나 드라마를 찍을 나이인 50대 중반에 이르러서 첫 액션 스릴러를 소화한 리암 니슨은 <테이큰>의 전 세계적인 히트로 본의(?)아니게 액션 스타로 거듭나게 되었다. 190이 넘는 훤칠한 키에, 실제 권투 선수를 했던 실력, 나지막하고 허스키한 목소리, 그리고 외롭고 고독하지만 헌신적인 가족 사랑을 무기로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도 끝까지 쫓아가 무시무시하게 되갚아주는 중년의 폭풍간지는 자신이 하지 못한, 자신의 가족에겐 없는 빈자리를 채워주며 많은 관객들의 호응을 얻었다. 삼부작으로 마무리된 <테이큰> 시리즈를 비롯해 자움 콜렛 세라 감독과 함께 한 네 편의 스릴러들(<논스톱>, <언노운>, <런 올 나이트>, <커뮤터>)은 리암 니슨에게 확실하면서도 강력한 이미지를 부여했다. 이젠 조금 식상해져 버렸지만.

<콜드 체이싱>

그런 의미에서 이번 한스 페터 몰란트 감독과 함께 한 <콜드 체이싱>은 리암 니슨 자신의 고정화된 이미지를 역으로 활용해 블랙코미디적인 쾌감을 맛볼 수 있는 색다른 복수극이다. 이미 원제부터가 액션 스릴러에서 흔하게 쓰이는 ‘Hot Pursuit(뜨거운 추격)’이란 관용어적 표현을 설원(과 블랙코미디)에 빗대 표현한 ‘Cold Pursuit’이고, 자식을 잃은 평범한(?) 중년 아버지의 분노를 더 잘 표출할 배우가 감히 있을까 싶을 정도로 도통한 리암 니슨을 대놓고 캐스팅해 시원스런 액션 대신 차가운 유머들만 구사하고 있으니, 기존의 뻔한 공식들을 예상했다면 영화를 보며 제법 당혹스러울지 모른다. 그런 기대감을 기분 좋게 배반하는 건 음악을 맡은 조지 펜튼도 마찬가지다.

거장들과 함께 해 온 영화음악가 조지 펜튼

<콜드 체이싱> 사운드트랙 표지

과거 그의 음악들을 떠올린다면 이번 <콜드 체이싱>의 스타일은 사뭇 색다르게 느껴진다. 조지 펜튼이 어떤 영화음악가인가. 영국에서 말콤 아놀드와 론 굿윈, 리처드 로드니 베네트 등의 뒤를 이어 8-90년대 가장 인상적인 활약을 펼쳐 보인 전천후 작곡가다. 최근 들어 다소 주춤한 감은 있지만 연극에서 시작해 방송과 영화까지 넘나들며 기라성 같은 거장들과 놀라운 호흡을 맞춰왔다. 리처드 아텐보로와는 <간디>를 시작으로 <자유의 절규>, <샤도우랜드> 등 다섯 작품을 함께 했고, 그중 <간디>와 <자유의 절규>는 조지 펜튼을 오스카 음악상 후보에 올리며 꿈의 무대 할리우드에 입성하게 만들었다. 니콜라스 하이트너와는 연극을 매개로 영화까지 인연이 이어졌고, 스티븐 프리어스와는 방송을 매개로 영화까지 나름의 관계가 지속됐다.

(왼쪽부터) <블루 플래닛>, <살아있는 지구> 사운드트랙 표지

그러나 조지 펜튼이 가장 오랜 호흡을 자랑한 건 바로 켄 로치와의 작업이다. 그들은 1994년 <레이디버드 레이디버드>를 시작으로 올해 공개될 <쏘리 위 미스드 유>(Sorry We Missed You)까지 25년간 16편을 함께 해왔다. 사회를 바라보는 켄 로치의 시선은 건조하고 무던하지만, 그 안의 사람들을 위로하고 보듬어 안는 조지 펜튼의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선율은 가슴을 울리고, 사회를 올곧게 바라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의 이런 음악의 매력은 BBC와 함께 한 일련의 지구 생태 다큐멘터리에서도 아주 위력적으로 발휘되었다. <블루 플래닛>과 <살아있는 지구>는 경이롭고 장엄한 삶의 터전을 심포닉 사운드로 드라마틱하게 표현했고, 시청자들과 평론가들에게 극찬을 받으며 TV의 오스카라 불리는 에미상 음악 부문을 거머쥐는 기염을 토했다.

예상을 빗나간 냉소적인 매력의 스코어

조지 펜튼에게서 휴머니즘은 가장 강력한 테마였다. 하지만 <콜드 체이싱>의 음악은 흰 눈처럼 차갑고 시리다. 그 중심에는 추운 나라에서 온 러시아 민속 악기 발랄라이카가 있다. 트레몰로가 인상적인 이 악기는 바이올린 솔로와 기타, 목관부와 조화를 이루며 통통 튀면서도 스산한 여운을 안긴다. 여기에 일렉트릭 사운드 디자인을 위해 펜튼은 프로듀서이자 리믹서인 댄 캐리의 도움을 빌리고 있으며, 이런 차가운 음색들의 결합은 시니컬하면서도 자극적인 영화의 감성에 더할 나위 없이 잘 맞아떨어진다. 카터 버웰의 <파고>나 토머스 뉴먼의 <아메리칸 뷰티>가 언뜻 떠오르는 냉소이기도 한데, 한동안 그의 음악에선 찾아보기 힘들었던 부분이라 이런 시도가 놀랍고 흥미롭다.

조지 펜튼

사실 아주 썩 조화로운 결과물은 아니다. 포크적인 서정과 명료한 댄스 비트의 교차는 시대착오적이며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런 불균질한 조성이 주는 초현실적인 분위기와 개운치 않은 뒷맛은 꽤 오랫동안 남아 영화의 감흥을 더한다. 80년대 초반의 방송용 스코어들이나 닐 조단과 함께 한 <늑대의 혈족> 등 조지 펜튼의 초창기 작품들에서 들렸던 신디 사운드 흔적을 다시 엿볼 수 있었단 점에서 반갑고, 2010년 이후 다소 주춤했던 그의 행보에 색다른 변화와 도전적인 시도가 엿보였다는 점에서 만족스럽다. <콜드 체이싱>은 쉽게 알 수 있는 재료들로 감히 예단할 수 없는 결과물을 내놓았다는 점에서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리암 니슨의 발언만 없었어도 지금보단 나은 대우를 받지 않았을까.


사운드트랙스 / 영화음악 애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