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의 올리비아 콜먼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시상식인 만큼, 아카데미 시상식의 결과는 해마다 어김 없이 전 세계 영화 팬들의 이목을 끈다. 1929년 시작해 90년째 이어지는 동안 켜켜이 쌓인 사건 사고와 수상 기록도 상당하다. 오스카 트로피 수상을 둘러싼 갖가지 기록들을 정리했다.


최다 부문 수상작

<벤허>

<타이타닉>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

총 11개 부문을 휩쓴 <벤허>(1959), <타이타닉>(1997),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2003)이 최다 수상 기록을 갖고 있다. 당시 사상 최고 흥행작에 등극한 <타이타닉>은 <이브의 모든 것>(1950), <라라랜드>(2016)와 함께 총 14개 부문 후보에 올라, 최다 노미네이트작으로도 남아 있다.


11개 부문 but 무관

<터닝 포인트>

<컬러 퍼플>

터닝 포인트

무려 11개 부문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빈손으로 돌아간 영화도 있다. <터닝 포인트>(1977)와 <컬러 퍼플>(1985)이다. <터닝 포인트>는 학창시절 발레 유망주로 주목 받던 두 친구가 각자 다른 길을 걷다 재회하게 되는 과정을, <컬러 퍼플>은 앨리스 워커에게 퓰리처상을 안긴 동명의 소설을 각색해 한 흑인 여성의 고난과 역경을 그렸다. 공교롭게도 모두 여성의 삶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다.

컬러 퍼플


최다 수상자

월트 디즈니

22개

월트 디즈니는 가장 많은 오스카 트로피를 차지한 인물이기도 하다. 사망한 지 53년이 흐른 후에도 여전하다. 1930년대 들어 신설된 '단편 애니메이션'상을 받기 시작해 무려 8년 연속 해당 부문을 독식한 그는 사후에 수상한 1968년 작 <곰돌이 푸: 폭풍우 치던 날>까지, 제작자로서 52개 후보에 올라 총 22개 오스카를 거머쥐었다.


최다 주연상 수상자

캐서린 헵번

<아침의 영광>

<초대받지 않은 손님>

<겨울의 사자>

<황금 연못>

캐서린 헵번은 주연상을 4번이나 수상한 유일한 배우다. 27살에 세 번째 영화 <아침의 영광>(1933)으로 처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의 주인공이 됐고, 34년 후 <초대받지 않은 손님>(1967)과 <겨울의 사자>(1968)로 2년 연속 같은 상을 받았다. 할리우드 고전기를 대표하는 배우 헨리 폰다와 함께 호숫가 별장에서 여름을 나는 노부부를 연기한 <황금 연못>으로 폰다와 나란히 주연상을 수상했다. "상 따위는 내게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공공연히 말한 헵번은 후보에 오른 12번의 아카데미 시상식에 단 한번도 참석하지 않았다.


최다 후보 but 무관

피터 오툴

8번

아라이아의 로렌스

영국의 대배우 피터 오툴은 평생 8번이나 주연상 후보에 올랐지만 끝내 오스카를 차지하지 못했다. 연극 무대에서 먼저 연기 활동을 시작해,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로 처음 남우주연상 후보로 지명됐지만 <앵무새 죽이기>(1962)의 그레고리 펙, <진정한 용기>(1969)의 존 웨인, <대부>(1972)의 말론 브란도, <성난 황소>(1980)의 로버트 드 니로, <간디>(1982)의 벤 킹슬리, <라스트 킹>(2006)의 포레스트 휘태커 등에게 밀려 연거푸 고배를 마셔야만 했다. 80세의 나이로 은퇴한 오툴은 이듬해 2013년 81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비너스


최다 부문 후보자

존 윌리엄스

51번

<스타워즈> 시리즈, <인디아나 존스>와 <E.T.>를 비롯한 스티븐 스필버그의 수많은 걸작들... 존 윌리엄스는 우리 시대의 가장 거대한 영향력을 자랑하는 영화음악가다. 음악상과 주제가상에 걸쳐 아카데미에 노미네이트 된 횟수로도 그의 가치는 증명된다. 1968년 <인형의 계곡>부터 근작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2017)까지 총 51회다. <게이샤의 추억>과 <뮌헨>의 2005년과 <틴틴: 유니콘호의 비밀>과 <워 호스>의 2011년 사이가 가장 긴 공백이었다. 수상자로 호명된 영화는 1972년 <지붕 위의 바이올린>, 1976년 <죠스>, 1978년 <스타워즈>, 1983년 <E.T.>, 1993년 <쉰들러 리스트>였다.


최연소 수상자

테이텀 오닐

<페이퍼 문>

1974년, 10살 짜리 배우가 생애 첫 연기로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생애 처음 연기에 도전한 테이텀 오닐이다. 고아가 된 소녀와 성경 세일즈맨의 우정을 그린 영화에서 테이텀은 아버지 라이언 오닐과 호흡을 맞춘 터라 더 화제가 됐다. 정작 라이언 오닐은 바쁜 스케줄 탓에 테이텀이 상 받는 모습을 시상식에서 보지 못했다고.


최연장 수상자

크리스토머 플러머

<비기너스>

TV 시리즈를 통해 데뷔한 크리스토머 플러머는 전설적인 뮤지컬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1965)으로 제대로 인지도를 높혔다. 1960년대 중반부터 영화 작업을 꾸준히 이어 왔지만, 굵직한 상과는 도통 연이 없었다. 마이클 만 감독의 <인사이더>(1999)부터 필모그래피에 활기를 띠기 시작해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2010)으로 처음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 올랐고, 시한부를 선고 받고 커밍아웃 해 전혀 인생을 사는 노인을 연기한 <비기너스>(2011)로 82세 나이에 드디어 오스카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작년 <올 더 머니>(2017)로 또 다시 조연상 후보에 오른 걸로 보아, 플러머의 기록은 아마 플러머가 경신하게 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두 번의 연기상을 안긴 캐릭터

비토 콜레오네

<대부> 말론 브란도

<대부 2> 로버트 드 니로

영원히 기억될 배우 말론 브란도와 로버트 드 니로는 모두 <대부> 시리즈의 비토 콜레오네 역으로 오스카 트로피의 주인공으로 지명됐다. 브란도가 완벽한 장악력을 보여준 비토 콜레오네를 3년 후 <대부 2>(1975)의 로버트 드 니로가 이어 받아 무자비한 젊은 비토를 유감 없이 구현해냈다. 이후 <택시 드라이버>(1976)로 처음 오스카 남우주연상에 도전한 드 니로는 <디어 헌터>(1979)를 거쳐 1981년 <성난 황소>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워터프론트>(1954)로 이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바 있는 브란도는 할리우드가 인디언을 묘사하는 방식에 대해 비판하며 두 번째 오스카를 거부했다.


공동 주연상

1969년

캐서린 헵번

<겨울의 사자>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화니 걸>

20대 초반 일찌감치 가수로서 어마어마한 전성기를 누렸던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는, 브로드웨이에서 선보인 바 있는 <화니 걸>을 각색한 영화 데뷔작으로 곧장 오스카 여우주연상까지 차지하고 말았다. <겨울의 사자>로 세 번째 여우주연상을 받은 캐서린 헵번과의 공동 수상이었다. 여우주연상 공동 수상은 아카데미 90년 역사에서 유일무이한 케이스다. 헵번은 '역시' 시상식에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스포트라이트는 온전히 스트라이샌드의 것이 됐다.


'최초' 흑인 배우상

해티 맥대니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시드니 포이티어 <들판의 백합>

할리 베리 <몬스터 볼>

해티 맥대니얼 / 시드니 포이티어

미국을 대표하는 영화 시상식인 만큼, 인종 문제를 둘러싼 후보/수상 결과는 아카데미 시상식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한다. 흑인배우가 연기상을 받은 최초의 사례는 1940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해티 맥대니얼이 하녀 역으로 여우조연상을 받은 것이다. 수상하기까지 근 8년간 70여 작품에 출연했지만 맥대니얼은 대부분 크레딧에도 오르지 못한 배우였다. 맥대니얼의 오스카 트로피는 현재 행방을 알 수 없다고 한다.

시드니 포이티어는 처음 주연상을 받은 흑인배우였다. <흑과 백>(1958)에 이어 베를린 국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은 <들판의 백합>(1964)으로 오스카까지 거머쥐게 된 것이다. 포이티어가 주연을 맡아 인종차별 문제를 정조준한 1967년 작 <언제나 마음은 태양>, <밤의 열기 속에서>, <초대받지 않은 손님> 세 작품 모두 큰 성공을 거두었다.

흑인배우가 여우주연상을 받게 되는 건 포이티어의 수상으로부터 37년 후에나 가능했다. <몬스터 볼>(2001)의 할리 베리는 흑인이자 여성으로서 세계 정상의 배우에 올라선 기쁨을 감추지 못했고, 제작진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이 상을 받기까지 (첫 아카데미 이래) 74년이나 걸렸다고요!"라며 일침했다. 베리가 수상한 2002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트레이닝 데이>의 덴젤 워싱턴이 남우주연상을, 시드니 포이티어가 공로상을 받았다.


최초 여성 감독상

캐서린 비글로우

<허트 로커>

연기상과 달리 감독상에는 성별 구분이 없다. 아카데미 사상 최초로 감독상을 받은 여성 감독은 바로 <허트 로커>의 캐서린 비글로우였다. 시상식이 82번째 이어져 오는 동안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바타>의 제임스 카메론(비글로우의 전 남편!),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의 쿠엔틴 타란티노 같은 명장들을 제친 결과였다. <허트 로커>(2009)는 그해 작품상, 각색상 등을 비롯한 6개 부문에서 수상하는 쾌거를 이뤘다.


후보에 오른 가상인물

로데릭 제인스 <파고>

도널드 카우프만 <어댑테이션>

(왼쪽) 코엔 형제가 로데릭 제인스의 프로필로 제출한 사진 / (오른쪽) <어댑테이션>에서 쌍둥이로 나온 니콜라스 케이지

1997년 <파고>로 편집상 후보에 오른 로데릭 제인스와 2002년 <어댑테이션>으로 각색상 후보에 오른 도널드 카우프만은 사실 실존하지 않는 인물이다. 로데릭 제인스는 직접 편집을 도맡아 하는 코엔 형제가 가상의 편집자로 설정한 인물이고, 도널드 카우프만은 <어댑테이션>의 시나리오를 쓴 찰리 카우프만이 영화 속 쌍둥이 설정을 따라 자기 쌍둥이 형제라고 꾸며낸 이다. 로데릭 제인스의 초상이랍시고 사진가 마이크 디즈파머의 사진을 프로필로 제출한 코엔 형제는 만약의 수상을 대비해 오스카의 고배를 5번(1997년 당시엔 4번)이나 마셨던 영국 출신의 배우 알버트 피니를 무대에 세우기로 했다고.


주연상, 조연상 동시 후보

베리 피츠제럴드

<나의 길을 가련다>

동시에 주연상과 조연상 후보에 오른 배우도 있다. <나의 길을 가련다>(1944)의 베리 피츠제럴드다. 괴팍한 성격과 고루한 운영 방식으로 성당을 팍팍하게 만드는 중년의 신부 피츠지본을 연기했다. 1인 2역도 아닌데 주조연상 모두 후보에 오른 이유는 아카데미 회원들의 투표로 이뤄지는 선정 방식 때문이었다. 빙 크로스비가 연기하는 새로 부임한 젊은 신부 오말레이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영화에서 피츠지본의 비중도 상당했기에 아카데미 회원들은 각자 판단한 기준으로 피츠제럴드를 후보에 올린 것이다. 결국 베리 피츠제럴드가 조연상과 빙 크로스비가 주연상을 받았고, 이듬해부터 후보 규정은 바뀌었다.


사후死後 수상 배우

피터 핀치 <네트워크>

히스 레저 <다크 나이트>

네트워크

고인이 되고 후보에 오른 케이스는 꽤 많지만, 수상한 배우는 딱 두 명이다.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 여우조연상 등 연기상을 3개나 차지한 <네트워크>(1976)의 피터 핀치와 우리의 영원한 조커 <다크 나이트>(2008)의 히스 레저다. 시청률의 압박에 미쳐버린 앵커를 연기한 피터 핀치는 시상식 두 달 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다크 나이트>가 개봉되기 6개월 전에 약물중독으로 사망한 히스 레저는 이듬해 남우조연상 수상자로 호명됐다. 유가족이 대신 상을 받았다.

다크 나이트


문동명 / 씨네플레이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