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석은 한국영화계의 지존이었다. 비록 지금 그를 향한 수사는 과거형이 되었지만 강우석은 건재하다. <씨네21>이 1997년부터 매년 조사했던 ‘충무로 파워 50’에서 그는 2004년까지 10년 가까이 1위에 올랐다. 대기업 투자·배급사에 1위 자리를 내주었지만 그래도 강우석은 강우석이다. 그는 여전히 ‘뚝심’ 때로는 ‘과욕’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감독·제작자다. <전설의 주먹> 이후 3년 만에 그가 연출한 <고산자, 대동여지도>의 개봉에 맞춰 ‘승부사’ 강우석의 연대기를 전한다.
강우석 감독 필모그래피
1989년 <달콤한 신부들>
1989년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1991년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
1992년 <스무살까지만 살고 싶어요>
1992년 <미스터 맘마>
1993년 <투캅스>
1994년 <마누라 죽이기>
1996년 <투캅스 2>
1998년 <생과부 위자료 청구 소송>
2002년 <공공의 적>
2003년 <실미도>
2005년 <공공의 적 2>
2006년 <한반도>
2008년 <강철중: 공공의 적 1-1>
2010년 <이끼>
2011년 <글러브>
2013년 <전설의 주먹>
2016년 <고산자, 대동여지도>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한국 영화계에서 강우석이라는 이름은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감독 강우석이 아닌 제작자 강우석까지 포함하면 그의 필모그래피는 한참 더 길어진다. 그만큼 강우석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은 많고 많다. 그 이야기를 다 하려면 책을 한 권 써도 부족할 수 있다. 이 일은 진짜 전문가에게 맡기기로 하자. 대신 에디터는 강우석 연대기 요약본을 만들었다. 강우석을 얘기할 때 꼭 언급해야 할 4편의 영화가 이 글을 이끌어갈 가이드가 되어 줄 것이다.
*아래 발췌한 강우석 감독의 발언은 모두 <씨네21> 인터뷰에서 가져왔다.
▶1993년: <투캅스>와 시네마서비스
“시네마서비스가 살아남은 것도 돈, 돈, 돈, 그랬으면 벌써 죽었을 거다. 벌면 다 투자하고 그래서 살아남은 거다.” -2003년 <실미도> 인터뷰
<투캅스>는 강우석을 강우석으로 만든 영화다. <투캅스>를 발판으로 시네마서비스의 역사가 시작됐다. 당시 서울 관객 86만명이 <투캅스>를 봤다. 너무 적은 숫자가 아닌가 싶지만 1993년 당시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가 최초로 서울 관객 100만을 넘기던 시절임을 감안하면 엄청난 성공이다. 이 성공이 있었기에 강우석 프로덕션에서 1995년 이름을 바꾼 시네마서비스를 본격 가동할 수 있었다. 충무로 영화인의 자본으로 만든 투자·제작·배급사 시네마서비스의 지난 23년은 화려하다. <투캅스>, <편지>, <초록 물고기>, <미술관 옆 동물원>, <여고괴담>,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주유소 습격 사건>, <신라의 달밤>, <공공의 적>, <실미도>, <왕의 남자>, <라디오 스타>, <밀양>, <권순분 여사 납치사건>, <김씨 표류기>, <소수의견> 등 생각나는 대로 대략 나열한 영화만 해도 이 정도다. 물론 이 역사의 중심에는 ‘충무로의 큰손’ 강우석이 있었다. 어쩌면 그는 영화지보다 경제지와 더 많은 인터뷰를 했을 것이다.
▶2002년: <공공의 적>과 캐릭터, 강철중
“덜 새롭거나 투박해도 역시 코미디는 강우석이라는 이야기가 나와야 할 거다. 강철중과 강우석, 둘 다 죽지 않았다 정도가 <공공의 적> 시리즈가 받아야 할 평가의 마지노선이다.” -2011년 <공공의 적> 시나리오 공모전 인터뷰
틀림 없다. 강철중과 강우석은 ‘같은’ 사람이다. <공공의 적>에서 등장한 강철중(설경구)은 강우석이 창조한 또 하나의 자신이다. <투캅스>부터 <고산자, 대동여지도>까지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강우석의 시선은 흔들림이 없다. 그 색깔을 가장 뚜렷하게 드러낸 캐릭터가 강철중이다. 강철중이 내뱉는 <공공의 적> 첫 장면 내레이션을 다시 보자. “나라와 겨레에 충성하고,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고, 시민에 봉사하고. 이것이, 죽거나 병신이 되지 않는 한 경찰이 매일매일 해야 할 일들이다. 나도 경찰이다. 하지만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 같지만 책상 서랍에 볼펜 한 자루만 있어도 결국 범인을 잡는 건 강철중이다. 무식하고 저돌적이고 조금은 괴팍해도 그래도 범인은 강철중이 잡는다. 강우석의 영화 스타일도 그렇다. 2011년 강우석은 “자신이 연출을 그만 둘때까지 <공공의 적>을 만들겠다”는 말을 했다. 이미 제작을 발표한 <공공의 적 2013>이라는 영화가 제목의 연도에 멈춰 있지만 반드시 연도를 바꿔서 나올 것이다. 왜냐면 강철중은 강우석이니까. 강철중은 한다면 하는 사람이다.
▶2003년: <실미도>와 천만 시대
“난 하늘이 날 버리지 않는다는 말을 가끔 한다. ‘넌 평생 영화 찍어야 돼. 많이도 찍고, 하여간 영화에 관해서만큼은 최선을 다해라. 그러면 아무리 어려워도 내가 다 도와줄게.’ 이러는 것 같다.” -2004년 <실미도> 인터뷰
한국영화 최초의 천만 관객 시대를 연 강우석 감독은 ‘천만’이라는 타이틀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다. 천만 관객을 눈앞에 둔 당시 그의 말을 들어보자. “솔직하게 얘기하면, 흥행이 적당히 되면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또 내가 신인감독이면 티내고 돌아다니겠는데, 내가 흥행 많이 해봤잖나. 흥행 잘됐을 때 겪는 고초가 있다. 그거 겪기 싫어서 거의 숨어 있었다.” 흥행을 많이 해봤다는 자신감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다. 그의 말을 좀더 들어보면 이렇다. “어떻게 보면 이건(천만 관객) 일종의 현상인데, 우리가 현상을 너무 즐기면 다른 영화를 준비하고 다르게 찍어왔던 사람들이 굉장히 곤혹스러워진다.” 한국영화계를 대표한다는 자신감, 그게 강우석이다. 사실 <실미도>가 나오기 전 시네마서비스는 사정이 좋지 않았다. <실미도>의 천만 관객은 “하늘이 그를 버리지 않는다”는 증거라고 봐도 좋겠다. <고산자, 대동여지도> 개봉에 맞춰 <씨네21>과 만난 강우석은 “<실미도>에 천만 관객이 들 때 했던 첫 인터뷰에서 내가 ‘앞으로 천만 영화가 1년에 2편씩 나올 거다’라고 했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그의 예측은 맞아떨어졌다. 그러면서 그는 “조만간 앞자리가 ‘2’가 될 수도 있다”는 새로운 예측을 내놓았다.
▶2010년: <이끼>와 새로운 시도
“왜 하필 강우석이냐, (원작의 독자들이) 감독 바꾸라고 했다. 내가 제작자인데, 내가 나를 왜 바꾸나. (웃음) 박찬욱이나 봉준호 같은 특정 감독을 거론하기도 했다. (중략) 그들(원작의 독자들)의 기대치를 충족시키려는 강박관념 때문에 촬영 중반 넘어갈 때는 우울증까지 생겼다. (중략) 그런데 현장에서 찍다보면 또 기분이 좋아진다. 뭔가 잘 찍은 기분이 있어. 말하자면 변태 비슷한 거지. (웃음) -2010년 <이끼> 인터뷰
강철중 같은 강우석이 <이끼>에서 변화를 시작했다. 사실 <공공의 적> 때도 그는 작품의 완성도, 작품성에 대해 고민했다. <씨네21>과의 2002년 인터뷰에서 “강 감독 어머니가 너도 작품성 있는 영화 만들어야 되지 않겠냐고 해서 <공공의 적> 만들게 됐다는 소문이 있다”는 질문에 그는 “표현은 다르지만 사실”이라고 인정한 바 있다. 그렇다 해도 <공공의 적>에서는 변화를 많이 느끼지 못했다. <공공의 적>은 <투캅스>의 연장선처럼 느껴졌다. <이끼>는 다르다. <이끼>의 어떤 장면에서 배꼽을 잡았던가. 웃음기를 많이 뺀 <이끼>는 감독 강우석의 새로운 도전이다. <이끼>를 강우석의 최고작이라고 꼽은 영화평론가 김영진과의 인터뷰에서 강우석은 “<이끼>에서는 좀더 내 속에 있는 진짜 이야기를 하려 했다. 내가 어떻게 영화를 찍고 싶은지, 캐릭터를 어떻게 움직이고 반전을 어떻게 줄지 여기서 한번 다 녹여보려 했다. 믿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주변 사람들의 의견을 들었을 때 헛발질은 아닌 것 같다”라고 말했다. 김영진 평론가는 <이끼>를 두고 “강우석의 직설화법에서 지금까지 가장 멀리 나아간 성취”라고 말했다. 윤태호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이끼>에서의 강우석의 변화는 성공적이었다.
‘강우석의 연대기’는 일단 여기서 끝을 내야 할 것 같다. <고산자, 대동여지도>에 대한 이야기도 해야 하니까. 최근 <씨네21> 인터뷰에서 정지혜 기자는 “28년 제작·기획·연출을 두루 거친 현재의 강우석을 자평해달라”며 과거와 현재의 차이를 물었다. 강우석은 이렇게 답했다. “(그때에 비해) 지금이 더 긴장되지.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마누라 죽이기>, <투캅스> 만들 땐 ‘난 무조건 관객과 만난다, 관객을 재밌게 해줘야지’라는 생각뿐이었다. 난 단순한 엔터테이너였다. 관객이 내게 뭘 기대하는지보다는 ‘내가 쇼를 하는데 보세요’라는 입장이었다. 지금은 관객이 보고 싶은 걸 내가 찍어서 보여야 한다. 내가 예술가라고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었는데. 근데 이제는 관객한테 ‘이런 영화 보고 싶으셨죠?’ 한다. <이끼>가 그랬다. ‘이건 관객이 기다리는 영화다!’ 그 생각이었다. <고산자, 대동여지도>도 마찬가지다.”
<고산자, 대동여지도>를 본 20대 후배 에디터들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30대 후반 ‘아재’인 에디터가 보기에도 <공공의 적> 만큼 재밌고 <이끼> 만큼 완성도가 뛰어나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한가지 확실한 느낌이 있었다. 오랜 세월 영화에 매달려서 단련된 노련한 투자·제작자이자 감독인 강우석의 야심이 보였다. 그 야심을 누군가는 촌스럽다고 할 테지만 그게 바로 강우석 아닌가. 강우석의 영화는 그렇게 보는 거다. 강우석의 촌스러움은 솔직함의 다른 말이다. 뚝심 있게 관객과 마주하고 정면 승부를 거는 그 솔직함이 좋다. 누가 뭐라든 그는 계속 영화를 제작하고 연출할 거다. 결코 머무는 일은 없다.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씨네플레이 에디터 두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