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허> 최초 개봉 포스터(왼쪽), 2019년 재개봉 포스터

<벤허>가 3월 28일 재개봉했다. 1962년 2월 1일, 한국에 처음 발을 디딘 이후 8번째 재개봉이다. 1959년 제작돼 개봉 60주년을 맞이한 <벤허>, 이 영화가 이렇게 오래도록 회자되고 사랑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벤허> 제작부터 흥행 기록까지, 이 영화가 명작인 이유를 정리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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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벤허: 그리스도 이야기>

<벤허>는 루 월러스가 1880년에 출간한 소설이 원작이다. 이후 1907년에 단편으로, 1925년에 장편으로 영화화됐고,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버전은 1959년 제작된 세 번째 영화다. 원작 소설 <벤허: 그리스도 이야기>는 780페이지(국내 시공사 출판본 기준)에 달하는 대하소설이다. 원작의 방대함을 영화로 만들다보니 1925년 버전은 143분, 1959년 버전은 212분에 달한다.

찰톤 헤스톤(아래)과 낙타에 타고 있는 윌리엄 와일러

이 영화의 메가폰을 잡은 건 윌리엄 와일러 감독. 그는 1925년 <벤허>에서 조연출로 참여한 바 있고, <미니버 부인>과 <우리 생애 최고의 해>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명장이었다. 오드리 헵번의 대표작<로마의 휴일>을 연출한 것도 그였다. 사극 연출은 처음이었으나 <벤허>로 능력을 입증한 셈이다.

<벤허>는 유다 벤허의 일대기를 다룬다. 유다 벤허는 유태민족 벤허 가문의 일원으로 부족함 없이 살다가 옛 친구이자 이스라엘의 주둔 사령관 멧살라에게 누명을 쓰고 노예로 전락한다. 그는 로마군에 끌려다니다가 아리우스 제독에 신임을 사 그의 양자로 입양된다. 하나 유다는 신분 상승에 만족하지 못하고, 가족을 찾고 멧살라에게 복수하고자 이스라엘로 향한다.

유다 벤허 역의 찰톤 헤스톤

이 우여곡절을 겪는 유다 벤허 역은 찰톤 헤스톤이 연기했다. 이미 <십계>에서 모세 역을 소화했던 배우인지라, 예수의 행적이 섞여있는 <벤허>를 거절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람하고 건장한 찰톤 헤스톤의 덩치는 올곧은 귀족에도, 강건한 노예에도 어울렸다. 그는 212분 중 2시간 넘게 화면에 등장하는 상당한 분량을 모두 감수했다.

촬영 쉬는 시간의 찰톤 헤스톤(벤허 역)과 스티븐 보이드(멧살라 역)


1950년대 할리우드는 TV에 맞서 뮤지컬, 3D, 대작을 내세웠다. (왼쪽 위부터) <화이트 크리스마스>, <아웃 스페이스>, <십계>

<벤허>가 나오기 직전 1950년대는 TV가 보급화되면서 영화가 자리보전에 힘써야 했던 시기다. 영화는 TV와는 다른 차별점을 부각시켜야 했고, 그 과정에서 3D영화(적청 방식의 애너글리프)나 아름다운 음악을 앞세운 뮤지컬 영화, 스케일이 큰 서사극이 등장했다. <벤허>는 그런 흐름의 끝자락에서 기획됐다.

<벤허>를 촬영한 65mm 필름 카메라. 오른쪽 인물이 윌리엄 와일러 감독.

제작사 메트로 골드윈 메이어(MGM)는 처음부터 <벤허>의 방향을 대서사극으로 잡았다. 세트 제작에만 2년, 낙타 200마리와 말 2000마리, 해전 장면을 위해 제작한 물탱크 등등. 광활한 화면을 손실 없이 담을 수 있는 65mm 필름 포맷으로 촬영하고(현상은 70mm로 진행됐다), 촬영에만 1년이 걸렸다. 엑스트라도 2만 명이 동원됐다. <벤허>의 제작비는 700만 달러로 예상됐으나 작품에 공을 들이며 약 1500만 달러까지 치솟았다. 당시 영화 한 편당 평균 제작비가 300만 달러였으니 MGM은 영화 5편 대신 <벤허>를 선택한 것이다.

<벤허>에 투입된 모든 인원들은 치열했다. 특히 서기 26년를 스크린에 그리기 위해 세트만 300개가 세워졌다. 조사 기간만 5년이 들었고, 세트를 짓는 데 14개월이 걸렸다. 예루살렘은 1.3 제곱킬로미터 면적의 세트가 지어졌는데, 역사적으로 기록된 수치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다. 해전 장면을 위해 인공 호수를 만들고, 높이 15미터에 61미터 길이의 배경판을 만들어 배경을 가렸다. 항해 가능한 군선은 물론이고, 군선 미니어처도 40개 이상도 제작됐다.

해상 전투 장면(왼쪽)은 미니어처로 제작됐다. 사진 속 인물은 특수효과를 담당한 A.아놀드 질레스피.

실제 군선 크기로 제작된 세트와 찰톤 헤스톤(왼쪽에서 두번째)

전차 경주 장면. 이 세트는 너무 커서 촬영 직후 바로 철거해야 했다.

전차 경주 장면은 5주에 거쳐 촬영됐다. 장면을 위해 훈련한 말 72마리를 비롯해 엑스트라도 10,500명 이상 동원됐다. 콜로세움 세트는 당시 지어진 세트 중 가장 거대했다. 이곳에서 3개월간 촬영했다. 찰톤 헤스톤은 <십계>에서 전차를 모는 걸 배웠지만, <벤허>의 네 마리 전차는 처음이었다. 한 달간의 연습을 통해 실제 영화 속 장면을 연기할 수 있었다.

엑스트라가 대규모로 동원된 장면 중 하나

그 와중 기술 스태프들도 분주했다. 전차 장면은 MOS(mit out sound, 현장 녹음을 하지 않는 것)였다. 원래 음악을 사용할 예정이었으나 박진감을 위해 후반작업에서 모든 효과음을 삽입했다. 전차 장면의 앵글은 윌리엄 와일러가 선택했지만, 방대한 장면이어서 세컨드 유닛(일종의 촬영 B팀)의 앤드류 마르턴과 야키마 카너트가 세부적으로 장면의 방향을 잡았다. 나중에 촬영본을 본 윌리엄 와일러는 "가장 위대한 영화적 성취 중 하나"라고 감탄하며 장면 편집을 이끌었다. 훗날 윌리엄 와일러 감독은 매일 16시간 동안 일하며 9개월간 <벤허>의 현장을 이끌었다고 회상했다.

(왼쪽부터)야키마 카너트, 말 훈련사 글렌 H. 랜달 시니어, 찰톤 헤스톤


<벤허> 시사회에 참석한 주연 배우와 감독

그래서 결과는? 북미에서만 740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박스오피스모조닷컴의 물가 상승을 반영한 역대 흥행작 순위에 따르면 지금 돈으로 8억 8494만 달러를 벌어들여 14위에 올랐다. 한국에서도 당시 서울 관객만 70만 명 이상이 <벤허>를 봤다는 기록이 있다. 전 세계 박스오피스는 1억 4690만 달러에 달했으니 지금으로 치면 빌리언 클럽(10억 달러 이상 수익 올린 영화를 지칭하는 말)에 가입할 수 있다.

윌리엄 와일러의 수상 장면(왼쪽), 찰톤 헤스톤의 수상 장면

흥행뿐일까? <벤허>가 이토록 오래 기록되는 이유는 비평적 성과도 뚜렷했기 때문이다. <벤허>는 그해 아카데미 시상식 12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됐다. 그리고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남우조연상, 촬영상, 음악상을 비롯한 11개 부문을 수상했다. <벤허>의 최다 후보 지명, 최다 부문 수상은 1997년 <타이타닉>이 14개 부문에서 후보 지명되고, 11개 부문 수상할 때까지 유일했다. 37년 동안 신기록 자리를 지킨 셈이다. 10개 이상 부문에서 수상에 성공한 최초의 영화로도 기록됐다.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벤허>는 바티칸에서 공식 인증한 ‘예술 작품’ 중 하나다. 가톨릭 교황이 국가 원수로 있는 바티칸은 1995년 45편의 영화의 영화를 선정했다. ‘종교’, ‘예술’, ‘사적 가치’ 부문에서 각 15편씩 소개한 이 리스트에서 <벤허>는 ‘종교’ 부문에 이름을 올린 유일한 할리우드 영화다. 가톨릭의 중심인 바티칸에서 직접 ‘종교적 가치가 있는 영화’로 뽑았으니, 종교 영화로서도 가장 성공한 할리우드 영화라 자부할 수 있다.


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