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왜 이래?
지난 3월 11일 사자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전두환이 광주지방법원에 출두했다. 2년 전 <당신은 외롭지 않다>라는 제목의(얼마나 진부한가!) 자서전을 펴낸 바 있는 아내 이순자 씨와 함께였다. “발포 명령 인정하십니까?” “광주 시민에게 사과하실 생각 없으십니까”라는 취재진의 질문에,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그가 뱉은 유일한 답은 “이거, 왜 이래?”였다. 연재를 마가레테 폰 트로타 감독의 <한나 아렌트>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야겠다 싶어진 것은 그 장면을 보고 나서였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이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체포된 것은 1960년 5월 11일, 예루살렘의 유대인 법정(‘정의의 집’)에서 그에 대한 재판이 열린 것은 1961년 4월부터였다. 당시 미국에 망명해 정착해 있던 유대계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뉴요커》지에 이 재판 취재를 위한 특파원 역을 자청한다. 물론 <전체주의의 기원>으로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이미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그녀였으니, 《뉴요커》 측에서도 마다할 이유는 없었으리라. 취재는 이루어졌고, 알다시피 그 결과물로 남은 것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다. 이제 너무 자주 거론되어서 그 말 자체가 평범해져버린 ‘악의 평범성’에 대한 바로 그 책 말이다.
많은 독자들이 기억하고 있겠지만, 재판 과정(영화에서 이 장면은, 마치 달리 재현할 길이 없다는 듯 실제 기록 영상으로 처리된다)을 면밀히 관찰한 아렌트는 아이히만이라는 전대미문의 악인에 대해 이런 결론을 내린다. “아이히만은 이아고도 맥베스도 아니었고, 또한 리처드 3세처럼 ‘악인임을 입증하기로’ 결심하는 것은 그의 마음과는 전혀 동떨어져 있는 일이었다. 자신의 개인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데 각별히 근면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는 어떠한 동기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근면성 자체는 결코 범죄적인 것이 아니다. [……] 흔히 하는 말로 하면 그는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한 것이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김선욱 옮김, 한길사 , 2006)
희대의 전범 아이히만을 두고 그가 최소한 ‘의도적인’ 악인은 아니었고, 만약 그에게 잘못이 있다면 맡은 바 업무(그는 학살과 업무를 구별할 줄 몰랐다)의 성격을 따지지 않은 ‘근면함’이었을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저 문장들…… 당연히 논란과 파장은 커진다. 모든 말들은 항상 정황과 맥락 속에서 발화되기 마련인바, 영화 <한나 아렌트>가 우리를 데려다 놓는 곳이 바로 그 논란과 파장의 맥락이다.
가장 어두운 이야기
영화는 곳곳에서 이 재판에 감추어진 시온(국가)주의자들의 의도 혹은 기대와 아렌트의 비범한 분별력이 충돌하는 장면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가령 동료 한스 요나스(실제로 아렌트의 오랜 지적 동지이기도 했다)가 이 재판을 두고 유대인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재판’임을 강조할 때, 아렌트는 남편 하인리히(하인리히 블뤼허가 그녀의 실제 남편이었다)를 편들며 아이히만이 유대인 재판소가 아닌 ‘국제 재판소’에 회부되었어야 함을 강조한다. 요나스와 아렌트 사이에는 아이히만의 범죄를 ‘인류에 대한 범죄’로 볼 것인지 ‘유대인에 대한 범죄로 볼 것인지’를 두고 입장 차이가 존재했던 셈이다.
이런 입장 차이는 첫 재판 때 하우스너 검사의 모두 발언에 대한 그녀의 경계에서도 다시 확인된다. 하우스너 검사는 “존경하는 법관 여러분 제가 아돌프 아이히만을 기소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을 때 저는 혼자가 아닙니다. 다른 고소인 6백만이 저와 함께 서 있습니다”로 시작하는 선동적이고 장엄한 어조의 발언을 길게 이어간 바 있다. 그의 발언은 분명 어딘가 연극적인 데가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아렌트는 자신의 아버지나 다름없는 동료 쿠르트에게 “하우스너는 마치 연극의 주역이라도 따내려는 것 같았어요. 벤구리온(당시 이스라엘 수상), 그 사람이 배후에 있죠? 구경거리가 되지 않도록 무척 조심해야 해요”라고 말한다. 이 말은 이 재판이 오로지 정의의 이름으로 전범자 아이히만 개인에게만 행해지는 것일 뿐, 시온주의자들에 의해 1948년에 세워진(그리고 이후 줄곧 팔레스타인인들을 학살하고 억압하게 될) 국가 이스라엘을 위한 건국 기념 연극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로 들린다.
물론 결정적으로 문제가 된 것은 유대인 지도자들이 학살에 협조했다는 ‘사실’에 대한 아렌트의 발설이다. 《뉴요커》의 편집자 숀 빌이 읽는 아렌트의 기사 한 문장은 이렇다. “유대인 지도자들이 자기 동포를 죽이는 데 이런 역할을 했단 사실은 이 어두운 이야기 전체에서도 분명 가장 어두운 부분이다”(이 구절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그대로 등장한다). 유대인 학살의 책임을 묻는 전범 재판에 대한 기록에서 유대인 지도층이 학살에 동조했다는 말을 서슴지 않는 아렌트, 당연히 그녀의 기사와 책은 당시의 맥락 속에서 이미 충분한 논란과 파장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대계 지식인들, 그리고 악인이란 평범한 우리들과는 완전히 다른 어떤 속성을 가진 별종이어야만 한다는 전제하에 스스로를 악인의 범주에서 제외시키곤 하는 많은 언론인들과 학자들이 그녀를 비난한다. 동료 교수들도, 요나스도, 쿠르트도 모두 그녀를 민족의 배신자, 친나치주의자, 피도 눈물도 없는 학자라 부른다. 그녀가 감당해야 했던 비난의 크기를 헤아려 볼 수 있는 장면이 있는데, 비서 로테가 읽어주는 독자의 편지 한 장에는 이런 저주가 적혀 있다. “잡지 속 네 얼굴 사진은 북극의 얼음처럼 차갑다. 입술에 경멸이 맴돌고 눈에 잔학함이 드러난다. 네 사진이 들어가서 잡지 전체가 더러워진 느낌이다. 장갑을 낀다. 그 위에 맨손을 얹는 것조차 메스껍다. 잡지에서 사진을 찢고선 불에 태우는 영예를 허락하기도 아까워 휴지통에 던진다. 난 원한을 품지도 않고 복수한 뒤 기뻐하지도 않는다. 오직 그것만 안다. 네가 모욕한 6백만의 영혼이 늘 네 옆에서 서성이며 너를 쉬지 못하게 하리라.”
강의실에서
이른바 ‘산만한 관객’에 대한 배려라고는 없어 보이는 이 영화가 주는 감동은 저 모든 비난과 저주에도 불구하고(그리고 나치에 부역한 스승 하이데거의 가르침에 반해) ‘사유’와 ‘판단’과 ‘행위’를 일치시키려는 아렌트의 기품(바바라 수코바의 연기는 압권이다)에서 우러나온다. 영화 말미, 유일하게 그녀의 말을 들어주는 학생들 앞에서의 10분 가까운 강의 장면이야말로 그 기품의 절정이다. 그러나 여기에 그녀가 강의에서 뿜어낸 말들을 다 옮겨 적지는 않을 셈이다. 그녀의 책을 직접 읽거나 이 영화를 곱씹어보는 것은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 두는 것이 아무래도 현명하지 싶어서다. 다만 궁금해지는 것은 영화에서 저 젊은 학생들이 유독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테제에 공감하고 온갖 논란 속에서도 그녀에 대한 지지를 거두지 않는 이유다.
실제로 당시의 젊은 세대들이 아우슈비츠 세대보다 그녀의 사상에 더 매료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 테제가 과거보다는 미래 세대를 향한 경고에 가깝다는 말은 할 수 있을 듯하다. 아렌트가 가장 두려워하고 개탄했던 것이 폴리스(Polis), 즉 사유와 행위의 장소가 오이코스(Oikos), 즉 생존과 본능의 장소에 의해 잠식당하는 사태였다. 그녀의 주저 <인간의 조건>이 그러한 사태의 분석과 경고에 바쳐졌다. 사적 영역이 공공 영역을 포섭해버려 누구나 획일화되고 균질화된 노동과 생식의 삶만을 살 수밖에 없게 되는 사태…… 자본주의의 진전에 따라 모두가 동물 아니면 속물이 되는(아즈마 히로키) 그런 사태…… 바로 저 강의실의 학생들이 그런 평범하고 진부한 삶을 살아가게 될 참이다. 말하기의 무능과 생각의 무능, 그리고 판단의 무능 속에서, 거대한 기계의 잘 물린 톱니바퀴처럼 평범한, 아주 평범한 삶을 살아가게 될 위기에 처한 이들은 아무래도 전 세대보다는 바로 그 강의실의 학생들이다.
재판 이후로 60년 가까이 지난 오늘, 인류의 역사는 대체로 평범해지는 경로를 따라 이동해왔으므로, ‘악은 평범하다’라는 말은 어딘가 모르게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악이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괴물성으로 정의될 때, 우리는 악을 미워하고 예외로서 배제할 수 있다. 그러나 ‘사유 없음’, 곧 진부함이 악으로 정의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바로 악의 기원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먹고 자고 배설하는 일이 초미의 관심사라는 점에서 우리는 모두들 평범하기 그지없고, 이모티콘으로 말을 대신하고 검색으로 사유를 대신한다는 점에서 진부하기 그지없다.
사유 없이 죽을 자
그런 의미에서라면 우리 모두는 다소간 아이히만인데, 그 ‘사유 없는 자’가 형장에서 마지막으로 뱉은 말은 이랬다고 한다. ‘“잠시 후면, 여러분, 우리는 모두 다시 만날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운명입니다. 독일 만세, 아르헨티나 만세, 오스트리아 만세, 나는 이들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듯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아이히만이 떠올릴 수 있었던 말들은 그저 다소 과장되고 의례적인 장례 연설에서나 사용되곤 하는 상투어들뿐이었다.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던 그는 자신의 고유한 죽음마저 진부한 관용어들에 헌납했던 셈인데, 그의 죽음에 대해 아렌트는 이렇게 논평한다. “그의 ‘정신은 의기양양하게 되었고’. 그는 이것이 자신의 장례식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이는 마치 이 마지막 순간에 그가 인간의 연약함 속에서 이루어진 오랜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교훈을 요약하고 있는 듯했다. 두려운 교훈, 즉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죽는 순간마저도 자신의 고유한 죽음을 맞이할 수 없는 평범성, 오로지 단 한 번, 삶 전체를 의미화할 수 있는 시간을 흔한 관용어로 낭비하고야 마는 사유 없는 자의 진부함, 그것이 악이다. 그렇다면 지난 3월 11일에 내 귀에 들렸던 “이거, 왜 이래?”라는 장군용(혹은 조직의 보스용) 관용어의 발화자가 어찌 죽을지는 명약관화해 보인다.
그러나, 그날 그 발화자의 행태에 “마지막으로 사죄할 기회를 주었는데……”라고 반응한 시민들의 말 속에도 평범함은 숨어 있다. 그 말은 신화 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사죄와 용서의 진부한 서사를 되풀이한다. 그래서 실은 그날, 나는 한편으로 내가 그에게서 듣게 될 말이 ‘광주 시민들에게 사죄드립니다’(이 또한 진부한 관용어이긴 마찬가지이다)가 될까봐 두렵기도 했다. 어떤 죄는, 설사 범한 자가 범죄의 사실을 몰랐거나 그 사실로 인해 사죄하고 처벌당했다 하더라도, 용서받을 수 없는 경우가 있는 법이다.
영화 <더 리더>의 또 다른 ‘한나’가, 책 더미 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우리에게 전한 교훈이 바로 그것이었다.
저자 | 김형중
1968년 광주에서 태어나 전남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0년 문학동네신인상 평론 부문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평론집 《켄타우로스의 비평》 《변장한 유토피아》 《단 한 권의 책》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 《후르비네크의 혀》 등과 에세이 《평론가 K는 광주에서만 살았다》가 있으며, 소천비평문학상(2008), 팔봉비평문학상(2017)을 수상했다. 현재 조선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