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년간의 MCU 인피니티 사가(Saga)를 마무리 지을 <어벤져스: 엔드게임>(이하 <엔드게임>)이 개봉했다. 예상은 했지만 <엔드게임>은 그 이상을 뛰어넘는 괴물 같은 성적을 기록하며 전 세계 영화 흥행사를 모조리 다 바꿔버렸다. 너무나 압도적인 오프닝 기록이라 입이 다 벌어질 정도다. 마치 타노스(조슈 브롤린)가 지구를 침공해 쓸어버린 것 마냥 전 세계는 ‘가망 없음’의 한주였다. 북미에서 금요일에 개봉해 첫날 1억 5746만 달러란 신기록을 세운 이 영화는 그다음 토요일 역시 1억 92만 달러를 벌며 둘째 날 기록을 갈아치웠고, 일요일에도 9038만 달러를 기록하며 역시 신기록을 이어갔다. 첫 주말 3일간 기록한 수익은 무려 3억 5711만 달러. 기존의 1위였던 전작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이하 <인피니티 워>)와는 무려 1억 달러나 차이가 난다.

미국뿐만이 아니다. 중국에서 역시 이번 첫 주말 간 3억 3000만 달러를 벌어들었고, 영국에서도 5300만 달러의 수익을 올리며 신기록을 썼다. 적어도 54개국에서 <엔드게임>은 흥행 1위에 올랐다. 국내 영화관도 가히 초토화됐다. 8일 만에 820만 명을 넘는 관객을 기록하며 천만 돌파는 기정사실이 되었다. 사전 예매량(233만 장), 최다 스크린수(2835개), 역대 개봉일 최고 관객 수(134만 명), 단일 최다 관객 수(166만 명), 상영 점유율(57.1%)과 좌석점유율(85%)까지 기록이란 기록은 다 새로 갱신해버렸다. 이렇게 전 세계적으로 벌어들인 수익은 12억 달러(1조 3900억 원)에 이른다. 여태까지 첫 주에 가장 큰 수익을 기록한 작품이 <인피니티 워>로 6억 4000만 달러였으니, <엔드게임>이 어느 정도로 경악할 만한 성적을 올렸는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영화계의 타노스, <엔드게임>

타노스가 벌여놓은 엄청난 결과를 어벤져스가 어떻게 해결할 건지 보기 위해 유례없는 필사의 움직임들이 펼쳐졌다. 다회차 관람은 필수, 영화 보다 붙잡힌 범죄자부터 영화를 보기 위해 탈영한 군인, 영화의 결말을 얘기해 폭행당한 관객 그리고 영화 상영을 위해 다른 영화를 취소시킨 극장까지 나왔다. 마블만의 이벤트가 이렇게 하나의 세계적인 문화 현상으로까지 발전한 데엔 프로듀서이자 마블 스튜디오 수장인 케빈 파이기의 공로가 컸다. 그는 과거 스탠 리가 만화계에서 그랬듯, 영화계에서 슈퍼 히어로들로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영화사에 ‘프랜차이즈’를 넘어 ‘유니버스’라는 개념을 정립시킨 그의 원대한 야심과 큰 비전은 22전 22승이란 성적표만 봐도 할리우드에 어떠한 파급력을 미쳤는지 가히 짐작할 만하다.

다른 메이저 스튜디오들도 저마다 프랜차이즈들을 하나의 세계관으로 묶어 재편하려는 시도들을 보이지만, 아직 마블시네마틱유니버스를 쫓기엔 버거워 보인다. 아니, 사실 <엔드게임> 이 한편으로도 인피니티 건틀렛을 낀 타노스마냥 너무 강력해 보인다. 배우 중 오스카 수상자와 지명자만 무려 19명에 달하고, 제작비만 역대 최고인 4억 달러에 육박하며, 상영시간도 역대 가장 긴 3시간에 이른다. 말 그대로 마블의 지난 세월을 정리하는 대단원의 장에 걸맞게 역대급 초호화 캐스팅과 스펙터클한 규모로 할리우드산 물량공세의 끝을 보여준다. <인피니티 워>에 이어 각본과 편집, 촬영과 미술, 사운드와 특효, 의상과 분장 등 전작들의 스태프들이 고스란히 투입돼 <엔드게임>을 완성시켰다. 음악을 맡은 앨런 실베스트리도 물론 여전히 유효하다.

앨런 실베스트리

어벤져스의 작곡가 앨런 실베스트리

그간 MCU에서 여러 솔로 무비들이 만들어졌고, 많은 영화음악가들이 고용됐지만, 언제나 대규모 하이라이트를 장식하는 건 베테랑 앨런 실베스트리의 몫이었다. 그는 한 편의 <캡틴 아메리카> 영화와(부제가 ‘퍼스트 어벤져’라는 점에서 ‘어벤져스’의 원류라 볼 수 있다) 세 편의 <어벤져스> 영화 음악을 담당하며 왜 다른 작곡가들이 아닌, 자신이 이 빅 이벤트의 음악을 맡아야 하는지 그 가치를 여실히 증명해냈다. 화려한 액션과 감성적인 드라마, 코믹과 영웅서사를 능수능란하게 오가며 황금비의 균형을 찾아가는 앨런의 스코어는 최근의 트렌드와는 조금 거리가 먼 1980~90년대식 할리우드 스타일이지만, 영화의 비현실적인 스케일과 만화적인 상상력에 더 자연스럽게 녹아들며 관객들을 완전 무장해제 시킨다.

초반 분위기는 대규모 전쟁 이후 남겨진 자들의 상흔과 상실감을 표현하는 데 공을 들인다. 솔로 오보에와 유리 하모니카, 스트링, 피아노 그리고 기타가 빚어내는 섬세한 질감은 이 공백이 얼마나 아프고 공허한지 관객들에게 극명하게 전달한다. 암담하고 충격적이었던 <인피니티 워>와는 다른 애상이 <엔드게임> 내내 지배한다. 어렴풋 알고는 있지만 쉽게 꺼내기 어려운 작별 인사와도 같은. 이런 감성적인 접근법은 앨런 실베스트리의 다른 작품 <포레스트 검프>나 <콘택트>, <캐스트 어웨이> 등을 쉬 떠오르게 하는데, 이 여운은 후반부까지 길게 남아 영웅스러운 희생과 겹쳐지며 먹먹한 감동과 아쉬움의 눈물을 자아낸다. 다른 한편으론 이 슬픔이 어벤져스 멤버들 간의 유대감을 강화하고 새로운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게도 만든다.

어벤져스의, 어벤져스에 의한, 어벤져스를 위한 음악

<인피니티 워>의 음악이 철저하게 타노스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이번 <엔드게임>은 다시 어벤져스, 그것도 오리지널 멤버(그중에서도 특히 캡틴 아메리카(크리스 에반스)와 아이언 맨(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에게 중점을 둔다. 타노스의 카리스마와 파워에 눌려있던 암울하고 어두웠던 진혼곡은 반격의 징후를 찾아 새롭게 도전하는 진군가로 변모했다. 이를 위해 그간 통일성을 해칠까 봐 각 히어로별 테마를 자제했던 것과 달리 이번 <엔드게임>에선 실마리를 풀어가는 주요 캐릭터들의 테마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크리스토퍼 벡의 <앤트맨>과 마이클 지아키노의 <닥터 스트레인지>, 피나르 토프락의 <캡틴 마블> 테마뿐만 아니라 앨런은 자신의 <캡틴 아메리카> 음악들마저 가져오며 진정한 마블시네마틱유니버스를 이끌어내는 시도를 펼쳐 보인다.

이는 마치 <레디 플레이어 원>에서 여러 테마들을 뒤섞어 새로운 세계관을 재창조하던 모습과 비견되고, 또 <빽 투 더 퓨처 2>에서 1편 음악들과 시추에이션을 재구성하며 재미를 줬던 과정을 떠올리게도 만든다. 또 토르(크리스 헴스워스)를 위해 에드바르드 그리그를 연상케 하는 북유럽 사운드도 부여했으며, 반격의 작전을 실행하는 과정들에서 흘러나오는 재즈 리듬은 전통적인 하이스트 장르 스코어를 의도했다. 물론 앨런의 전매특허인 폭주기관차처럼 질주하는 액션 스코어와 히어로들의 단합을 유도하는 애국적인 팡파르도 빼놓을 수 없다. 형세가 역전되던 상황에 쓰였던 ‘포탈즈’(Portals)나 모든 멤버들이 그를 떠나보내던 장면에 흐르던 ‘더 리얼 히어로’(The Real Hero), 그리고 그간의 MCU 영웅들을 치하하는 엔딩 크레딧의 ‘메인 온 엔드’(Main on End)가 그 대표적인 곡들이다.

<어벤져스: 엔드게임> 사운드트랙 표지

적재적소에 쓰인 삽입곡들

시종일관 어두웠던 <인피니티 워>에 비해 상대적으로 <엔드게임>에선 삽입곡이 많이 쓰였다. 마블 로고가 뜨며 시작하는 곡은 우울한 현실 속에서도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되어줄 그런 존재에 대해 염원하는 트래픽(Traffic)의 ‘디어 미스터 판타지’(Dear Mr. Fantasy)이고, 토르를 만나기 위해 뉴 아스가르드를 찾아가는 여정에 흐르는 경쾌한 사운드는 현실 도피의 의미를 띤 더 킹크스(The Kinks)의 ‘슈퍼소닉 로켓 십’(Supersonic Rocket Ship)이었다. 반격 준비를 하며 포탈을 만들던 토니와 로켓(브래들리 쿠퍼) 등 어벤져스 멤버들을 훑을 땐 더 롤링 스톤즈(The Rolling Stones)의 ‘둠 앤 글룸’(Doom and Gloom)이 흘러나오며 그들의 각오를 대변한다. 물론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첫머리를 장식하던 그 노래 레드본(Redbone)의 ‘컴 앤드 겟 유어 러브’(Come and Get Your Love)도 건재하다. 똑같은 시추에이션이 변주되며 웃음을 자아낸다.

이번으로 마지막 출연이 되는 그분(!)이 반전을 강조하며 “전쟁 말고 사랑을 해라” 호통치던 차 안에서 흘러나오던 곡은 스테픈울프(Steppenwolf)의 ‘헤이 로디 마마’(Hey Lawdy Mama)다. 그들은 그 시기 베트남 전쟁 정책에 의문을 제기한 정치적 메시지를 띈 밴드였다. 대망의 엔딩을 장식하는 건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에서도 잠깐 흘러나왔던 곡 ‘잇츠 빈 어 롱, 롱 타임’(It's been a long, long time)이다.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유행하던 곡으로 전쟁이 끝났을 때의 귀향을 염원한 가족과 연인의 심정을 담아낸 가사를 갖고 있다. 오랜 기간 연인을 그리워했던 캡틴과 페기(헤일리 앳웰)의 심정을 대변하는 노래로 지난 반세기 간 긴 전쟁의 끝을 상징하고 있다고 봐도 좋을 듯하다. 그야말로 캡틴의 안식을 위해 탁월하게 선곡된 곡으로 뭉클한 감동과 미소를 자아내게 만든다.

그리고 인피니티 사가의 에필로그

물론 아직 완벽히 끝난 건 아니다. 오는 7월 인피니티 사가와 마블 페이즈 3의 에필로그를 장식할 진정한 마지막 작품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의 개봉을 앞두고 있다. 이걸 끝으로 MCU는 새로운 장으로 넘어갈 것이라고 공언한다. 하지만 관객들은 알고 있다. <엔드게임>이야말로 그간 전 세계 영화 판도를 뒤흔든 마블 영웅들을 위한 진정한 헌정 영화라는 것을. 그리고 이 유례없는 할리우드 빅 이벤트는 TV와 2차 매체 그리고 스트리밍과 같은 새로운 기술 앞에서도 여전히 극장이 굳건할 것임을 확실히 증명한다. 이 세계에 한 번이라도 빠져들어 즐기고 환호했던 관객들이라면 앨런 실베스트리가 풀 심포닉 사운드로 그 노고를 치하하는 이 경외감 넘치는 스코어를 진정 ‘3000’만큼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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