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 친구를 밀어내려고 “난 무슬림이야” 말하는 소년을 기억하는가? 혹은 퀴즈쇼 문제를 전부 맞췄다는 이유로 의심을 받는 자말은? 독학으로 무한급수에 다가가는 라마누잔이나 희미한 유년 시절의 기억과 구글 어스로 집을 찾아가는 샤루는 또 어떤가. 이처럼 수많은 캐릭터를 소화하며 이제는 믿고 보는 배우가 된 데브 파텔이 <호텔 뭄바이> 아르준 역으로 돌아왔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굴곡 많았던 이 ‘믿보배’의 필모그래피를 훑어봤다.


[ 인도계 영국인 소년, 10대의 표상이 되다 ]

데브 파텔은 데뷔한지 벌써 13년째다. 그런데 이제 막 30대가 됐다. 무척 이른 나이에 데뷔한 것이다. 그의 첫 작품은 영국 드라마 <스킨스>. 영드 좀 본다는 분들이라면 이 작품으로 입문했을 것이다. <스킨스>는 영국 브리스틀에 사는 청소년들의 연애와 성생활을 다루는, 꽤 파격적인 작품이다. 데브 파텔은 무척 특이하게도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스킨스> 오디션을 봤다. 그리고 캐스팅됐다. 제작진은 파텔을 캐스팅한 이후 그의 성장 과정과 환경을 반영한 앤워 역을 추가했다.

데브 파텔이 연기한 앤워는 나쁘게 말하면 무척 이중적인 학생이다. 이슬람교의 규율을 따르지만, 이미 마약 중독 직전이고 어떻게든 성욕을 해소하고 싶어 안달 낸다. 어느 날 자신의 절친 맥시(미치 휴어)가 게이임을 알게 되자, “남정네 둘이 뒹구는 거 보기 싫다”, ”동성애는 그냥, 잘못된 거야”라고 말해 상처를 주기도 한다. 그러다 점차 친구를 이해하게 되고, 쾌활한 성격 덕분에 드라마에서 재간둥이 역할을 톡톡히 한다. 데브 파텔은 다른 출연진들과 함께 시즌 2에서 하차했다.

맥시(미치 휴어)와 앤워(데브 파텔)


[ 자말처럼, 단번에 모두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다 ]

<스킨스> 이후 파텔에게 다가온 행운은 하나가 더 있었다. 대니 보일 감독의 신작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주인공 자말 말릭 역 제안을 받았다. 대니 보일에게 데브 파텔을 추천한 건 다름 아닌 <스킨스> 애청자인 대니 보일의 딸이었다. 그렇게 데브 파텔은 무려 5번의 오디션을 거치고서야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주연 자리를 꿰찼다.

<슬럼독 밀리어네어>

사실 데브 파텔은 인도계 영국인이라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통해 처음 인도 땅에 발을 디딘 셈이었다. 그는 촬영 장소를 물색하는 대니 보일 감독과 함께 인도의 빈민가를 돌아다니며 관찰했다. 콜센터와 호텔 접시 닦기를 병행하며 자말의 일상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기도 했다. 우연히 연기에 발을 들였지만 물 흐르듯 좋은 작품과 만난 행운도 자말과 닮았기 때문일까. 데브 파텔은 이 영화에서 퀴즈쇼를 우승하는 행운과 편견의 시선에 구속되는 자말을 처절하게 연기해 세계가 주목하는 배우로 재탄생했다.


[ 갑작스러운 행운은 불운으로? 골든 라즈베리 최악의 남우조연상 후보 ]

여기까지만 보면 데브 파텔이 운이 좋아서 승승장구 중인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 역시 크게 미끄러진 적이 있다. 바로 <라스트 에어벤더> 출연이었다. M. 나이트 샤말란 감독 경력의 종지부를 찍을 뻔한, 수많은 <아바타: 아앙의 전설> 원작 팬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준 이 영화에서 데브 파텔은 주코 역을 맡았다. 주코는 불의 제국 왕자로, 악역으로 등장해 훗날 주인공 일행에 합류하는 입체적인 캐릭터다. 하지만 데브 파텔에게 주어진 건 우스꽝스러운 분장과, 설득력 확보가 불가능한 각본뿐이었다.

원작 만화의 캐릭터. (왼쪽부터) 주코, 카타라, 아앙, 소카

특히 <라스트 에어벤더>는 캐스팅 문제가 심각했다. 원작 만화에선 유색인종에 가까웠던 소카와 카타라가 백인으로, 백인처럼 보이는 주코가 인도계 배우 데브 파텔로 캐스팅된 것이다. 이런 캐스팅은 제작자의 입김 때문이었으나, 메가폰을 잡은 인도계 미국인 샤말란 감독까지 원작 팬들의 ‘인종차별적 캐스팅’이란 비난을 받아야 했다.

영화에서 카타라(니콜라 펠츠), 소카(잭슨 리스본)

영화 내적, 외적으로 바람 잘 날 없는 <라스트 에어벤더>는 그해 골든 라즈베리 상 후보에 11개 부문 중 8개 부문에 이름을 올렸다. 데브 파텔도 ‘최악의 남우조연상’ 후보였다. <슬럼독 밀리어네어>로 크리틱스 초이스 시상식에서 신인상을 수상한지 2년 만에 최악의 남우조연상 노미네이트였다. 함께 <라스트 에어벤더>에 출연한 잭슨 라스본이 상을 가져갔을 때, 데브 파텔은 한숨 돌렸을 것이다.


[ 또 한 번의 터닝 포인트, 뉴스룸 ]

그래도 그는 나름의 무기가 있었다. 영국에서 자란 토종 영국인이란 점이었다. <라스트 에어벤더> 이후 소니 역으로 출연한 <베스트 엑조틱 메리골드 호텔>이 제작비 10배 이상을 벌어들이며 전작의 악몽은 금방 잊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듬해, 드라마 <뉴스룸>의 닐 샘팻 역으로 발탁됐다. 영국에서도 드라마로 출셋길에 올랐던 파텔은 미국에서도 드라마 <뉴스룸>으로 완벽한 전환기를 맞이한다.

닐 샘팻은 윌 매커보이(제프 대니얼스)의 블로그 담당자이자 인터넷 정보 수집원이다. 빅풋 같은 전설의 동물을 실존한다고 주장하는 괴짜지만, 뉴스의 중요성과 공정성에 대해선 이상주의자에 가까울 만큼 강박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데브 파텔은 ‘인도인=IT 전문가’라는 편견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캐릭터의 성격을 완벽하게 살려내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아역부터 시작한 그의 연기가 <뉴스룸>에 이르러 만개할 준비를 마친 것이다.


[ 마침내 아카데미! 믿고 보는 배우 되다 ]

<베스트 엑조틱 메리골드 호텔 2>

<채피>

2014년 <뉴스룸>이 종영되고, 데브 파텔은 다시 영화계의 러브콜을 받았다. <베스트 엑조틱 메리골드 호텔>의 속편 <베스트 엑조틱 메리골드 호텔 2>는 물론이고, <채피>, <무한대를 본 남자>, <라이언>까지 몇 개월마다 관객들에게 얼굴을 비췄다. 단순히 다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작품도 호평을 받았다. <라스트 에어벤더>에서 드라마 <뉴스룸> 사이에 촬영한 작품들이 대개 혹평 일색이었음을 고려하면 작품 보는 눈이 확고해진 걸 의미했고, 관객들도 데브 파텔의 작품안을 신뢰하기 시작했다.

<무한대를 본 남자>. (아래 사진 왼쪽부터) 데브 파텔, 제레미 아이언스, 토비 존스

특히 <무한대를 본 남자>와 <라이언>은 데브 파텔에게 큰 분수령이 됐다. <무한대를 본 남자>에선 수학 천재 라마누잔 역을 맡아 제레미 아이언스, 토비 존스, 스티븐 프라이 등과 연기를 펼쳤다. 스스로도 “이 세 배우와 같은 거인들에 둘러싸여 있을 때, 캐릭터와 나 사이의 케미스트리와 에너지를 찾을 수 있었다”고 언급했고, 그만큼 해당 작품에서 배우들과의 호흡이 좋았다는 호평을 받았다.

<라이언>

연기에 대한 감각이 새로 깨어나서일까, 데브 파텔은 <라이언>에서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며 진짜 가족과 집을 찾아 나선 사루 역을 맡았다. 길을 잃었다는 이유로 호주로 입양된 그는 분명 행복한 삶을 살았지만, 끝내 자신의 뿌리를 확인해야 한다는 일념에 사로잡힌 인물이다. 그는 “자신이 읽어본 것 중 최고의 시나리오”를 위해 약 8개월 동안 호주식 영어를 익히고, 인도의 고아원에 방문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사루 역을 체화했다. 그 결과 아역 배우 써니 파와르와 그가 함께 만든 ‘사루’는 관객의 눈시울을 적셨다. 그리고 데브 파텔은 그해 영국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수상, 미국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 지명에 성공하며 입지를 두텁게 했다.


-데브 파텔에 관한 사사로운 사실들-

<홈쇼퍼> 스틸컷(왼쪽), 아미 해머에게 디렉션을 주고 있는 데브 파텔

2018년, 단편 영화 <홈쇼퍼>를 공개하며 감독으로도 활동했다. 선댄스영화제, 멜버른 국제 영화제, 시카고국제영화제, 산타바바라 국제영화제, 시카고국제영화제, 시드니 영화제 등에서 상영됐다. 아쉽게도 수상에는 실패했다.

검은 띠 수료증을 받은 데브 파텔(왼쪽), <스킨스> 속 발차기 장면.

그는 태권도 유단자로 검은 띠 소유자다. 2004년 태권도 월드 챔피언십에서 동메달을 땄고, 2006년 검은 띠를 받았다. <스킨스>에서도 앤워가 발차기하는 장면이 나왔다. 앤워는 이슬람교를 믿는 파키스탄계이지만, 데브 파텔은 힌두교를 믿는 인도계다.

<라이프 오브 파이> 파이의 소년 시절을 연기한 수라즈 샤르마

이안 감독의 <라이프 오브 파이> 오디션을 봤다. 당시 제작자들은 그를 “감정 과잉”이라고 평가했고, 다른 배우를 캐스팅했다.

89회 아카데미 현장의 데브 파텔(왼쪽), 루카스 헤지스

2017년 제89회 아카데미 시상식 조연상 후보에는 데브 파텔(<라이언>)과 함께 루카스 헤지스(<맨체스터 바이 더 씨>)가 지명됐다. 두 사람은 1990년대생 영국 배우로서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최초의 인물이 됐다. 데브 파텔은 1990년생, 루카스 헤지스는 1996년생이다.

중학교 GCSE(일종의 선택과목)를 연극 과목으로 수료했다. ‘베슬란 학교 인질극’에 희생된 아이를 연기했고, 이를 본 시험관이 울어버렸다고. 당시 A+를 받았다고 한다. 참고로 첫 연극과 배역은 <십이야>의 앤드류 경이다.

<슬럼독 밀리어네어> 데브 파텔(왼쪽), 프리다 핀토

<슬럼독 밀리어네어>에서 연인으로 출연한 프리다 핀토와 실제로 사귀었다. 두 사람은 영화 촬영이 끝난 2009년부터 사귀었다가 2014년 헤어졌다.

버버리가 리즈 아메드를 데브 파텔로 소개한 그 트윗.

패션 브랜드 버버리가 리즈 아메드를 데브 파텔이라고 소개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버버리는 2017년 영국 아카데미에 버버리 턱시도를 입은 리즈 아메드 사진을 SNS에 게시했다. 그런데 리즈 아메드를 “남우조연상 수상자 데브 파텔”이라고 소개하며 수많은 질타를 받았다. 버버리는 발 빠르게 트윗을 삭제하고 사과문을 게시, 데브 파텔과 리즈 아메드의 사진을 각각 게시하며 수습에 나섰다. 물론 그럼에도 “피부색으로만 사람을 구별하냐”라는 비난에서 피할 순 없었다.

이후 빠르게 정정하긴 했으나 논란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데브 파텔의 차기작은 두 편이다. 마술사 데이비드 코퍼필드 역을 맡은 <더 퍼스널 히스토리 오브 데이비드 코퍼필드>(연출 아만도 이아누치), 그리고 아서왕 전설에 등장하는 가웨인과 녹색 기사를 재해석할 <그린 나이트>(연출 데이빗 로워리)이다.


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