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는 참 어려운 직업이다. 연기라는 본분을 빼더라도, 관객들이 원하는 모습과 스스로가 원하는 연기의 중심점을 잘 찾아야 오래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해외매체 ‘테이스트 오브 시네마’(Taste of cinema)에서 가장 파격적인 캐스팅 10가지(원문)를 소개했다. 어떤 배우들이 무슨 영화의 배역으로 기존의 이미지를 깼을까?
10
멕 라이언, <인더컷>(2003)
멕 라이언이 누구인가. 1990년대 ‘로맨틱 코미디’라는 단어를 대체했던 배우다. 그만큼 인기가 많았지만, 반대로 90년대 말부터는 이미지 남용이란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영원할 것 같은 성공 가도에서 내리막길이 조금씩 보이자, 멕 라이언은 조금씩 다양한 작품에서 얼굴을 비췄다. 그중 가장 획기적으로 이미지 변신에 도전한 영화는 2003년 <인 더 컷>이었다.
<인 더 컷>의 프래니 솔스틴은 작문선생님이자 속어를 수집하고 있는 언어학자다. 그는 이웃집 여자가 살해당하는 사건 때문에 조사차 찾아온 말로스 형사에게 빠져든다. 위험한 살인 사건과 남성에 대한 성적 이끌림을 위태롭게 오가는 프래니 역으로 멕 라이언은 필모그래피를 확장시키고 싶어 했다. 결과적으로 흥행이나 비평 모두 썩 좋지 않은 결과를 거뒀지만.
9
로빈 윌리엄스, <스토커>(2002)
로빈 윌리엄스가 미소를 지을 때면, 관객들은 위로받고 있다고 느낄 것이다. 삶을 보는 방식을 가르치는 키티 선생님(<죽은 시인의 사회>), 소원을 들어줄 때마다 시답잖은 농담을 던지는 정령(<알라딘>), 환자들의 건강을 위해 광대이길 자처한 의사(<패치 아담스>) 등 로빈 윌리엄스는 순수한 마음을 간직한 어른의 표상이었다.
때문에 2000년대 그가 선택한 출연작들은 모두 관객들의 어안을 벙벙하게 했다. <인썸니아>의 살인 용의자, <스무치 죽이기>의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른 쇼 진행자, 그중 단연 돋보인 건 <스토커>의 싸이 패리쉬 역이었다. 사진 현상소에서 일하면서 남의 일상을 염탐하는 캐릭터로 변신하기 위해 그는 이마를 훤히 드러낸 짧은 금발과 커다란 금테 안경으로 섬뜩함을 더했다. 이 영화를 볼 때면 로빈 윌리엄스의 미소가 이처럼 소름 끼치는 것이었나 놀랄 정도다.
8
피터 셀러스, <찬스>(1979)
피터 셀러스가 누구인가. <핑크 팬더>의 클루조,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의 맨드레이크 중령이자 머플리 대통령이자 스트레인지러브 박사가 아닌가. 1인 다역쯤은 쉽게 소화하는 그는 다양한 캐릭터 연기에 특출난 배우다. 그는 언어의 억양이나 다소 과한 표정 등으로 캐릭터의 특징을 잘 살리는, 그래서 코미디에 무척 적합한 배우로 유명했다.
그래서 그가 1979년 <찬스>에 출연한다고 했을 때, 모두들 놀라워했다. 그가 맡은 찬스 더 가드너는 노년이 될 때까지 집 밖을 벗어나 본 적 없는, 오직 TV로만 세상을 배운 순수의 결정체 같은 인물이다. 피터 셀레스는 그동안 자신의 얼굴을 가려온 콧수염, 커다란 안경 등을 거둬내고 맨얼굴로 관객 앞에 섰다. 찬스의 순수함은 때때로 관객들을 웃기게 했지만, 피터 셀러스식 웃음은 아녔다. <찬스>에는 피터 셀러스라는 대배우가 아닌, ‘찬스 더 가드너’만이 있었다.
7
브루노 강쯔, <다운폴>(2004)
브루노 강쯔는 재밌게도 이 파격적인 캐스팅 덕에 한국에서 자주 회자되고 있다. 그가 <다운폴>에서 보여준 아돌프 히틀러의 분노 연기가 여러 방면에서 패러디 되고 있기 때문. SS 친위대의 대장이 자신의 명령에 불복했다는 것에 분노하는 이 장면은 우리나라 누리꾼이라면 한 번쯤 봤을 것이다. 손을 파들파들 떨면서 윽박을 지르는 브루노 강쯔의 연기가 워낙 찰져 인기를 얻었다.
브루노 강쯔의 히틀러 연기가 파격적인 이유는 그의 전작들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미국 친구>, <백색 도시>, <베를린 천사의 시>, <영원과 하루> 등등… 대중들이 기억하는 그는 쫓을 수 없는 고독에 휩싸인, 혹은 죽음의 그림자를 서성이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실존 인물, 그것도 논쟁의 여지가 다분한 아돌프 히틀러를 맡는다니 말이 많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브루노 강쯔는 자신의 연기력을 끝까지 끄집어내 평단과 대중들 모두 호평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들었다.
6
앨버트 브룩스, <드라이브>(2011)
앨버트 브룩스는 시나리오도 쓰고 연출도 하고 성우도 하고 연기도 하는 다재다능한 배우다. 그중에서 코미디 감각이 일품이라 <로스트 인 아메리카>, <브로드캐스트 뉴스>, <영혼의 사랑>, <스카우트> 등으로 유명하다. <표적> 같은 스릴러 영화에도 출연했지만, 진지한 톤의 작품이 아녔고 그의 캐릭터도 무게감 있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래서 니콜라스 윈딩 레픈 감독의 <드라이브>가 각광받을 무렵, 미국 관객들은 라이언 고슬링의 연기 이상으로 앨버트 브룩스의 버니 로즈에 주목했다. “손이 더러워서요”라는 주인공의 대사에 “마찬가지야”라고 받아치는 버니는 갱스터라는 특유의 클리셰에서 벗어난 일상에서 볼 법한, 그래서 더 폭력에 절어있는 듯한 캐릭터였다. 앨버트 브룩스는 악역이랍시고 힘을 주는 연기 대신 자신이 지금까지 해왔던 연기를 변주해 버니 로즈로 변신했고, 그해 관객들에게 가장 인상적인 조연 배우라는 호평을 받았다.
5
아담 샌들러, <펀치 드렁크 러브>(2002)
솔직히 말해보자. 누가 아담 샌들러 영화를 보러 가면서 ‘연기’를 기대할까? 짧은 스포츠머리에 허우대는 멀쩡하지만 어딘가 어리바리한 남자. 그게 아담 샌들러의 이이미지이자 아이덴티티 아닌가. 그가 유능한 코미디언, 코미디 배우인 건 맞지만 진짜 배우다운 연기를 보여줬다고 생각한 관객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펀치 드렁크 러브> 전까지는.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은 <매그놀리아>로 그해 베를린 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받은, 명실상부 ‘천재 감독’이었다. 그런 그가 아담 샌들러를 캐스팅했다고 했을 때 영화 마니아들이 얼마나 경악했을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명감독의 힘인 걸까, 아담 샌들러는 극중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배리 이건을 완벽하게 연기했다. 그가 아닌 배리 이건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언제든지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은 연약한 중년 남성을 그려냈다. 아담 샌들러는 이 영화의 연기로 생애 첫 골든 글로브 뮤지컬코미디 부분 남우주연상 노미네이트에 성공했다.
4
샤를리즈 테론, <몬스터>(2003)
배우에게 ‘미모’는 무기이자 아킬레스건이다. 외모가 출중한 배우는 주목 받기 쉬우나 관심조차 연기가 아닌 외모 때문으로 폄하 받기도 하고, 배역 제의가 많은 대신 이미지 낭비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미남 미녀 배우는 자신을 향한 편견을 깨고 ‘배우’ 타이틀의 진정성을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곤 한다. 샤를리즈 테론이 연쇄살인마 에일린을 연기한다고 했을 때도, “지나치게 파격적인 도전” 같은 우려가 들려온 것도 이런 이유였다.
샤를리즈 테론은 에일린을 연기하는 것을 넘어 그 자체가 되려고 노력했다. 눈썹을 밀거나 기본 메이크업도 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기본적인 생활 패턴까지 바꾸며 에일린의 불우한 삶을 이해하려 했다. “<데블스 애드버킷>을 보고 에일린을 가장 완벽하게 연기할 배우라고 확신했다”는 패티 젠킨스 감독의 예언은 <몬스터>에서 실현됐다. 샤를리즈 테론은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 등을 수상하며 배우로서의 활로를 넓히는 데 성공했다. 샤를리즈 테론이 이런 도전을 겁냈다면 퓨리오사(<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같은 인생캐릭터도 못 만났을 것이다.
3
그레고리 펙, <브라질에서 온 소년>(1978)
1950년대 할리우드 대표 미남 배우 그레고리 펙. <로마의 휴일>의 로맨틱한 조 브래들리나 <나바론 요새>의 용감한 군인 키스 맬로리 등으로 기억되고 있는 그는 사생활에서도 구설수가 별로 없기로 유명했다. 연기면 연기, 외모면 외모, 인성이면 인성. 모자란 부분 하나 없이 시대를 대표하는 배우라 해도 과언이 아닌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가 <오멘>, <맥아더> 이후 선택한 차기작은 대중들에게 충격을 안겨줬다. 아우슈비츠에서 인체 실험을 자행한 나치 일당의 이야기를 그린 <브라질에서 온 소년>에서 그레고리 펙은 인체 실험의 주동자 멘게레 박사 역을 맡았다. 배역의 설정도 과격한데다 극중 수틀리면 무조건 보복하고 마는 멘게레 박사를 그레고리 펙이 워낙 찰지게 연기해서 관객들은 아마 미묘한 심경을 느꼈을 것이다. 사실 당시 관객이었다면, 로렌스 올리비에와 그레고리 펙이 함께 출연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했을지 모르겠다.
2
토니 커티스, <보스톤 교살자>(1968)
토니 커티스. 이름은 조금 낯설 수 있는데, 얼굴 보면 알 것이다. <뜨거운 것이 좋아>에서 마릴린 먼로와 호흡을 맞췄고, <스파타커스> 안토니우스 역으로 유명하다. 대체로 로맨스, 혹은 코미디, 혹은 둘 다 접목시킨 로맨틱코미디 영화에서 주로 얼굴을 비췄다. 그런 그가 1968년 <보스턴 교살자>의 연쇄살인마 알버트 드살보 역을 맡았다. 그를 추적하는 형사 역은 대선배 헨리 폰다가 맡았다.
분할 화면 등을 사용해 사건을 쫓아가는 영화는 용의자 알버트 드살보가 조현병을 앓는 환자임이 드러나면서 급격히 방향을 바꾼다. 동시에 알버트를 연기한 토니 커티스는 한껏 자신의 연기력을 발휘한다. 사건의 진상을 직시하게 되면서 서서히 무너지는 알버트의 심리를 토니 커티스는 격렬하면서도 세심하게 스크린에 그려낸다.
1
헨리 폰다, <옛날 옛적 서부에서>(1968)
헨리 폰다는 미국 관객들에게 합리적이고 정의로움을 상징하는 얼굴이었다. 의문의 살인 사건을 맡은 풋내기 변호사 시절 링컨 대통령(<링컨>),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은데 농장주들의 횡포에 봉기하는 농작인(<분노의 포도>), 모두가 유죄라고 판단할 때 아주 작은 부분부터 의심해나가는 시민 배심원(<12인의 성난 사람들>). 이게 헨리 폰다가 거쳐온 배역이자 그의 이미지였다.
그런데 1968년, <옛날 옛적 서부에서>의 헨리 폰다는 달랐다. 그는 한 가족을 몰살하고 태연하게 남에게 누명을 씌우는 냉혈한 총잡이 프랭크를 맡았다. 세르지오 레오네는 그의 얼굴에서 침착하다 못해 가치 구분이 전혀 없는 모호함을 읽었고, 헨리 폰다 역시 이에 화답하는 최고의 연기로 호평을 받았다. 생각해보라, 미국의 정의로움을 상징하던 배우가 웬 이탈리아 감독(세르지오 레오네)의 괴상하기 짝이 없는 ‘스파게티 웨스턴’에서 악한을 연기한다니. 당시 헨리 폰다에게 비난이 쏟아졌다지만, <옛날 옛적 서부에서>가 영화사에 한 획을 그리며 세르지오 레오네와 헨리 폰다의 판단이 옳았음을 증명됐다.
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