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더 보이’의 전반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강력한 능력을 손에 넣은 주인공이 그 힘을 어떻게 쓸 것인지, 어떤 목표를 세울 것인지 고민하는 과정은 어느 히어로 솔로무비에나 존재한다. 슈퍼맨처럼 태생이 남다른 경우에는, 능력을 자각하면서 고민을 시작하고 그 고민의 결과는 으레 모두를 위한 대의를 향하는 것으로 변한다. 그리고 결말은 모두가 예상했듯이 권선징악의 형태로 매듭지어진다.

영화 <더 보이>는 슈퍼맨의 근원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따 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형시킨, ‘슈퍼맨 오리진’의 변주라고 할 수 있다. 가장 최근의 슈퍼맨 솔로 무비였던 DCEU의 <맨 오브 스틸>과 유사한 요소들을 다수 발견할 수 있지만, 클락 켄트와 비슷한 점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말하자면 변주라기보다는 악랄할 정도로 대척점에 서 있다.

하지만, <더 보이>의 구조는 우리가 흔히 보아 왔던 슈퍼히어로 무비들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야기해야 할 부분은 이 지점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보아 왔던 슈퍼히어로 무비와 어떤 점이 다른지, 이 영화가 슈퍼히어로가 아닌 '슈퍼 빌런' 무비로서 보여주고 있는 것, 그리고 앞으로 기대할 수 있는 요소는 무엇일지 짚어 본다.


애매할 여지조차 없는 ‘슈퍼 빌런’

일반적인 히어로 무비에서 캐릭터들의 관계는 ‘슈퍼히어로와 그에 대적하는 빌런’의 1:1구도에 조력자의 도움이 더해지는 형태다. 영웅신화의 원형이 흔히 그러하듯이, 승승장구하는 것 같았던 주인공 히어로가 빌런의 공격으로 일생일대의 위기를 맞게 되고 이 위기를 조력자의 도움 혹은 조언을 얻어 스스로 발전하거나 레벨업하는 형태로 해결하고 평화를 되찾는 방식이다.

<더 보이>는 흔히 보이는 이런 구도와는 거리가 멀다. 애초에 주인공은 선의라고는 없으며 일말의 고민하는 모습조차 보여주지 않는다. 때문에 조력자일 것으로 예측 가능한 존재인 소년의 부모도, 이 모든 비밀을 파헤칠 수 있을 것 같았던 수사관도 소년의 힘 앞에 무력하게 당하고 말뿐이다.

대적할 자가 존재하지 않는 슈퍼 빌런인 소년은 선악의 경계에서 고민하기는커녕 온전히 악의 영역에 서 있다. 소위 다크 히어로를 표방했던 영화들의 실패 요인이 ‘애매한 위치 선정’이었다고 한다면, <더 보이>는 주인공이 고민하는 여지조차 보여주지 않는다. 이 소년은 힘을 자각한 그 순간부터 혹은 그 이전부터 한결같이 악의 화신이었으니까.

그래서 영화는 애매한 느낌을 전혀 주지 않는다. 오히려 ‘방해꾼은 죽인다’는 철저한 자기중심적 논리에 의해 움직이는 이 주인공을, 누가 막아 줄 것인지 혹은 어떤 위기를 겪게 될 것인지를 궁금해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관객의 일말의 희망조차 허락하지 않고, 주인공인 ‘더 보이’, 브랜든 브라이어에게 진정한 위기란 아예 존재하지조차 않는다. 권선징악의 요소는 이 영화에 전혀 없다고 봐도 좋다.


'맨 오브 스틸', 그리고 '울트라맨'

영화는 전반적으로 <맨 오브 스틸>의 오마주 격인 영화다. 주인공인 브랜든이 지구에 오게 된 것은 정체불명의 외계행성의 것으로 추정되는 우주선의 불시착 때문이었다. 난임으로 고생하고 있었던 브라이어 부부는 우주선에 있는 이 갓난아기를 입양해 브랜든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고 사랑으로 길러내지만, 12살 생일을 전후로 참극은 시작된다.

<더 보이>의 브랜든 브라이어와 <맨 오브 스틸>의 클락 켄트는 닮은 듯 전혀 다르다. 혈연적으로 전혀 관계가 없는 지구인 양부모 밑에서 길러졌다는 점, 그리고 지구에 불시착할 때 타고 왔던 우주선이 집의 지하창고에 보관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신체능력 면에서 상당한 유사성을 보인다.

브라이어 부부와 켄트 부부는 모두 자신들이 입양한 아이가 보통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애초에 지구인이 아닌 외계 행성 출신일 것이라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었고, 강력한 신체능력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베이거나 다치지조차 않았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하는 강력한 근거였다. 이들 부모는 남들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아들을 제대로 기르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아들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사뭇 달랐다.

이들 사이의 극명한 차이는 바로 ‘두려움’이었다. 이 두려움은 소년들의 각기 다른 성정에서 비롯된다.

<맨 오브 스틸>의 바로 그 장면

클락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 될지는 네가 정하는 거야, 착한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결국 네가 세상을 바꾸게 될 테니까”라고 말한다. 결국 영화의 요지는 그 지점이다. 클락은 착한 아이였고 어린 시절 사고에서도 모두를 구할 만큼 정의로운 성향이었다. 하지만 브랜든은 다르다. 호감을 품었던 소녀 케이틀린과도 제대로 된 관계를 형성하지 못했고, 자신을 거부하자 손을 우그려 쥐어 부러트리고 만다. 그리고 이에 대해 별다른 죄책감조차 느끼지 못한다.

브랜든의 이야기는 12살 생일을 전후로 시작해 영화상으로 아주 짧은 기간만 보여준다. 하지만 영화의 결말 시점에 이 소년의 실체를 알고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아무도 없으며, 브랜든 자신의 손으로 모두 최후를 맞이한 후다.

때문에 이 소년에게 인격적 성장은 물론, 남아 있는 여지를 통한 위기 역시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브랜든을 막을 사람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결말은 더 참혹해지고, 모두가 무력하게 죽었다는 현실보다 한층 더 잔인하다. 더 많은 이들이 아무것도 모른 채 죽게 되리라는 것이 쉽게 예상되기 때문이다.


크라임 신디케이트의 가능성

다크한 버전의 슈퍼맨, 저스티스 리그의 빌런 집단 버전은 코믹스에 '크라임 신디케이트'란 이름으로 이미 존재한다. 저스티스 리그의 구성원들 및 DC 히어로들의 빌런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캐릭터들이 그 멤버들인데, 이 중 슈퍼맨의 빌런 버전인 캐릭터가 바로 울트라맨이다.

울트라맨은 말 그대로 슈퍼맨 기원의 변주다. 슈퍼맨의 친부모인 일(il) 부부는 아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모두를 참혹하게 살해했으며, 지구에서의 양부모인 켄트 부부는 둘 모두 범죄자인 데다 울트라맨 본인이 자신의 입양을 강요해 부모가 된 케이스다. 부모도 그를 원하지 않았고, 결국 7살이 되었을 때 아들을 버리려 하자 울트라맨은 부모를 모두 죽이고 크라임 신디케이트라는 범죄자 집단을 이끄는 보스가 되는 이야기다.

<더 보이>의 경우, 브라이어 부부는 브랜든을 진심으로 아들로 생각하고 아꼈다. 하지만 브랜든의 안에 있는 악함을 깨닫고 아버지가 총을 겨누자 브랜든은 아버지를 죽인다. 어머니 역시 아들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끝까지 믿어 주려 했지만, 결국 실체를 깨닫고 공격하자 마지막 희망처럼 느껴졌던 어머니마저 죽여 버린다.

원작의 울트라맨보다 훨씬 잔혹하고 악한 캐릭터가 되어 버린 <더 보이>의 브랜든 브라이어. 죄 없는 여객기까지 추락시켜 민간인 사살까지 저지른 직후, 아무도 12살 소년을 의심하지 않으며 가족과 친지를 모두 잃은 어린 소년을 불쌍하게 여긴다는 점을 당연히 받아들이며 편안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그리고 그런 브랜든의 모습 직후, 한 유튜버는 악의 세력이 오고 있다며 ‘밧줄로 목을 조르는 마녀’, ‘배를 뒤집는 반인반어’ 등 크라임 신디케이트의 일원을 연상시키게 하는 언급을 남긴다.

<더 보이>는 DCEU의 정식 작품이 아니며 DC 영화를 만드는 워너가 아니라 소니가 제작한 영화다. 슈퍼맨의 기원에서 영화가 시작되었다는 점만은 사실이지만, DC 히어로들의 빌런 버전이라 할 수 있는 ‘크라임 신디케이트’가 본격적으로 시리즈물로 이어질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하지만 영화 마지막의 이 영상으로 보아하건대 크라임 신디케이트의 가능성을 어필하려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어떤 히어로의 변주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 히어로의 오리지널 스토리가 그만큼 유명하고 인기 있어야 한다. 슈퍼맨과 배트맨, 원더우먼을 ‘슈퍼히어로의 대명사’로 떠올리던 시대는 이미 예전이다. DC의 오리지널 시리즈가 성공하지 못하면 변주도 그다지 가능성은 없다.

먼저 이쪽의 수습을 해야 하는 게 아닐까

결국 어둡고 침울한 공포영화로서 이 영화가 얼마만큼 매력이 있는가의 문제다. 강력한 액션씬이나 힘을 발휘하는 파워풀한 장면은 볼 만하다. 하지만 호러 무비로서는 그다지 수준이 높지 않으며, 지나친 고어함과 친부모가 아니라고는 하나 잔인하게 차례차례 부모와 가족들, 좋아하는 여학생의 어머니를 살해하는 과정들은 그리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마미손 아님

어떤 면에서는 새로운 매력일 수 있다. ‘걔도 다 사정이 있었어’라는 설명보다는, 그저 악에 치우친 소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게 더 잔혹하고, 참극을 그리기에는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관객이 어떤 면을 기대하느냐에 따라서 <더 보이>의 영화평은 극과 극으로 나뉠 수밖에 없다.

잔혹한 악의 화신을 그려내는 ‘슈퍼 빌런’ 무비로서 <더 보이>를 보러 간다면, 그리 나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길 바란다면, 이 영화는 그저 싸이코패스에 초능력까지 있는 한 소년의 참혹한 살해극일 뿐이다.


희재 / PNN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