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oom’은 <Actor's room> 즉, <배우의 방>을 뜻합니다. (캐릭터에 빠져 사는) 배우가 나로 돌아가는 시간을 묻고자 하는 게 이 인터뷰 기획의 핵심입니다. 배우의 얼굴보다 공간이 더 깊이 담깁니다. 작품이야기보다는 배우의 생각을 들어보려고 합니다.

“내 원체 아름답고 무용한 것들을 좋아하오. 달, 별, 꽃, 바람, 뭐 그런 것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낭만’을 이야기하는 김희성을 보면서 변요한이라는 배우가 지니고 있는 매력을 새삼 실감했다. 그것은 웃음 뒤에 은닉해 둔 미묘한 떨림. 변요한에게서 또래 배우들에게 좀체 찾기 힘든 특유의 ‘우수’가 있다. 특히 물기를 습자지처럼 빨아들인 듯한 눈빛엔 이상한 저력이 있는데 돌이켜 보면 그건 그가 첫 단편영화 <토요근무>에서부터 보여 온 자질이기도 했다. 그의 우수는 모성애를 자극하는 유약함과는 다르고, 운명에 쉽게 순응하는 연약함과도 거리가 있다. 유약하지도 연약하지도 않기에, 그가 가끔 드러내는 미묘한 떨림은 도드라지곤 한다. 웃고 있지만, 눈은 슬픈 사내의 모습으로. 어디에도 구속될 것 같지 않은 자유인의 모습으로.

산책하며 인터뷰 중인 기자와 변요한(변요한 매니저가 담아 준 사진)

PM 04:00. 주말을 앞둔 금요일 오후, 잠실에 위치한 석촌호수공원에서 접선하기로 했을 때 정작 걱정을 한 건 변요한이 아니라, 기자였다. ‘보는 눈이 많을 텐데, 불편하지 않을까…’ 그런 기자의 우려가 무색할 만큼 변요한은 시선의 감옥에서 자유로웠다. 그는 대중이 ‘배우 변요한’에게 바라는 욕망에 꿰맞추느라 ‘인간 변요한’의 활동반경을 통제하거나 제한하며 살지 않는다. 연기라는 긴 여정에서 ‘라스트 스탠더’가 되길 희망하는 변요한이 귀하게 여기는 건, 순간의 반짝임이 아니라 세파의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을 명분과 꾸준함인 듯했다. 서두르지 않고 묵묵하게 과정을 거칠 줄 아는 자의 발걸음을 이곳에 옮긴다.

-수염이 사라졌군요.

=(쑥스러운 듯 웃으며) 어제 면도했습니다.

-옷이나 머리 스타일이 사람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경향이 있잖아요? 수염의 경우엔 더 하겠죠?

=그럼요. 심리적인 건데 수염이 있으면 뭔가 초자연적인 힘이 나옵니다. 비유하자면, 수염이 없으면 운전을 해야 할 것 같고 수염이 있으면 오토바이를 타야 할 것 같은 감성이죠. (웃음)

-오늘은 운전자 모드의 인터뷰가 되겠군요. (웃음) 천천히 걸어볼까요.

=여긴 추억이 정말 많은 곳입니다. 외롭게 걷기도 하고, 기뻐서 뛰기도 하고, 생각에 잠겨 머물기도 했던 공간이죠. 작품마다의 고민도 곳곳에 스며있고요. 오랜만에 왔어요. 근처에서 4년을 살다가 1년 전에 이사 갔거든요. 계속 오고 싶었어요. 이곳을 다시 걷고 싶어서.

-집에서 독립해서 사시나요.

=네. 중국 유학 떠날 때부터니, 오래됐네요. 혼자 살기도 하고 친구들과 살기도 했죠. 최고 많았을 땐 4명이 함께 살았습니다.

-남자 4명이 사는 삶은 어땠을지 궁금하군요.

=재밌어요. 엉망진창인 면도 있지만, 매력 있습니다. 각자의 포지션들이 또 있었거든요. 빨래 담당, 설거지 담당 이런 식으로요. 저요? 저는 운전과 픽업 담당이었습니다.

-이사 간 곳에서도 이런 공간을 찾았나요?

=아직은 없어요. 사실 강아지 때문에 이사했어요. 강아지 이름이 복자예요. (웃음) 입양한 지 9개월 됐는데, 복자가 아직 산책 교육이 안 돼서 적응이 필요해요. 조금씩 영역을 넓혀가려고 합니다.

-이사를 고려할 정도로 반려견에 대한 사랑이 애틋하군요.

=사연이 조금 있어요. 나를 사랑하는 법을 조금씩 알기 시작할 때였어요. 그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나를 너무 사랑해버리면 재미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자기애가 너무 생기면 안 될 것 같더라고요. (웃음) 다른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고 싶은 마음이 들더군요.

-하하. 그 대상이 복자가 된 거군요.

=네. 강아지를 데려오기까지 1년 반을 꼼꼼하게 공부했어요. 모든 견주들은 자기 강아지를 천재라고 한다지만…

-한다지만?

=제 강아지는 정말 천재입니다. 하하하. 견주인 저를 안 닮았어요.

-견주의 성격은 어떻고 강아지는 어떻길래요.

=저는 자유를 꿈꾸는 스타일이에요. 프리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편이죠. 복자는 반대로 차분해요. 어지르는 성격도 아니고 조용합니다. 그러니까 제가 오히려 더 개판이랄까요. (일동 웃음) 어느 순간 보니까 복자가 저를 지켜주고 있더라고요. 복자는 정말이지, 동물적으로 저를 알아요.

-이것이야말로 순수 동물적 감각!

=하하. 아! 제 산책 코스의 시작은 저기 보이는 OOO 카페예요. 저 카페 찹쌀떡이 또 맛있어요. 산책 후에 먹으면 맛이 기막히죠. 취미 중 하나가 커스텀 피규어 모으는 건데, 피규어 입문할 때 부품도 저기에서 샀어요. 원하는 모양의 부품들을 주문해서 조립하는 거죠.

변요한이 조립한 배우 제이슨 스타뎀. 귀여워서 주머니에 넣어 다니고 싶은 피규어란다.

-주로 배우를 만드신다고요.

-영화를 보다가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나면 ‘어? 이 배우 피규어가 있나?’ 서치를 하게 돼요. 표정들이 굉장히 다양해요. 가령 <스카페이스> 알 파치노 표정이라도 눈썹 하나 입 모양 하나 다양한 느낌의 부품들이 있거든요. 결국 선택에 따라 다른 모습의 피규어가 탄생하는 셈인데, 완성도를 보면 만든 이의 의도나 디테일이 보입니다. 끈기 있게 부품을 검색해서 주문을 넣고 배송을 기다렸다가 받아서 만들고 나면 뭐라고 해야 할까.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아요~ (일동 웃음) 정말 그런 게 있어요.

-갑자기 라이언 고슬링 주연의 <내겐 너무 사랑스러운 그녀>가 떠오릅니다.

=아, 인형과 사랑에 빠지는? 저는 그건 아니고요~ 하하하. 얼굴을 완성한 다음에 이 의상도 입혀보고 저 의상도 입혀 보는데, 아무리 표정을 잘 만들어도 옷을 잘못 입히면 원하는 느낌이 채워지지 않아요. 그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다 보면 저를 또 돌아보게 됩니다. 나도 안 맞는 옷을 억지로 입으려 한 적은 없었나, 하고 말이죠.

-국내 배우 피규어도 만드십니까.

=두 분, 만들었어요. 회사 식구인 (조)진웅 형. <끝까지 간다> 의상으로 만들어서 선물로 드렸어요. 그리고 (이)병헌 선배. 받고선 “디테일이 좀 다르다~?” 하시더라고요. (일동 웃음) 그러면서도 너무 좋아해 주셨어요.

-피규어만큼이나 복싱도 즐기시죠? 복싱이라는 스포츠의 아름다움을 설명해주세요.

=복싱은 잠시 쉬고 있어요. 지금은 PT에 집중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복싱처럼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걸 더 좋아합니다. 복싱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말을 잘해야 할 것 같아요. (생각) 대부분의 운동은 자기 한계를 극복하고 싶어 하는 습성이 있잖아요? 내가 이길 거야, 근육을 만들 거야 하면서 비장해지는 면이 있죠. 그런데 복싱은 반대예요. 비우지 않으면 안 돼요. “난 맞지 않을 거야”가 아니라, “난 맞아도 돼”라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마음을 단련하는 운동이군요.

=항상 강하다고 생각하며 살다가 한 번에 무너진 적이 있습니다. 그걸 어떻게든 극복하려고 하니까 오히려 더 힘들더라고요. 머리도 혼란스럽고. 그때 복싱을 시작했어요. 복싱을 등록한 날 바로 “스파링하겠습니다!” 했어요. 물론 말리죠. 그런데 제 의지를 읽으셨는지 링으로 들어오라고 하더라고요. 그날 신나게 맞았죠. 그날뿐인가요. 갈 때마다 얻어터졌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깨달았어요. ‘아, 이건 안 맞을 수 없는 스포츠구나. 패배할 때도 맞지만, 설령 이긴다 해도 결국 맞으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거구나.’ 연기도 비슷하다고 느꼈어요. 늘 잘할 수 없는 게 연기인데 늘 잘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절 괴롭혔더라고요.

-저런, 자신을 너무 몰아세웠던 거군요.

=맞지 않으려 하면서 탈이 난 거죠. 이젠 알아요.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걸. 그런 시간을 통과하며 마음이 많이 편해졌어요.

그러고 보니 영화 <록키 발보아>에서 록키(실베스터 스탤론)는 이런 말을 한다. “얼마나 강한 펀치를 때리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야. 얼마나 강한 펀치를 맞고도 일어서느냐가 중요한 거지.” <주먹이 운다>의 강태식은 배우 최민식을 몸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펀치 센 놈은 지쳐도 맷집 센 놈은 버틴다” 그러니까, 변요한이 터득한 건 두둑한 맷집. 쓰러지지 않는 법이 아니라, 쓰러졌을 때 제대로 일어나는 법인 듯했다.

-안 그래도 표정이 참 밝아요. 공간의 힘 같기도 하고요.

=너무 좋아요. 날씨마저도.

이것은, 물아일체

이날 변요한은 나무 색에 맞춰 의상을 입고 나오는 센스를 선보였다.

-당신 의상도 오늘 날씨와 참 어울려요.

=사실 오늘 의상에 신경을 썼어요. 이 시기면, 나무색이 유독 초록이겠다 싶어서 옷도 일부러 사파리 색으로 입었습니다. (일동 웃음)

-평소 옷 센스가 좋아요. 소품 활용도 잘하고요.

=좋아합니다. 이전에는 패션잡지를 엄청 봤는데 이젠 안 봐요. 보면 괜히 카피하게 될까 봐. 이전에는 멋있어 보이면 국내외 가리지 않고 카피를 했거든요. 이젠 뭔가를 따라 하기보다, 제 스타일을 찾는 시기인 것 같아요. 친구들도 이젠 제가 뭘 입든 그냥 존중한대요. (웃음)

산책 출발-도착 지점, 어둠이 내려 앉기 시작했다.

-어! 공원을 한 바퀴 돌아 출발지로 돌아왔네요? (시간을 확인하니, 정확히 44분을 걸었다.)

=괜찮으시면… (해맑게 웃으며) 한 바퀴 더 도실래요?

-좋습니다! 위로든 아래로든 남자들과 잘 지내는 비결이 뭔가요.

=머리를 안 쓰는 겁니다. 그게 저를 힘들게 했던 부분이기도 한데, 이젠 큰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참 복 받았어요. 위로 가서 의지할 수 있고, 거기에서 배운 것들을 동생들에게 줄 수 있으니까요.

-애교가 많으시더군요. 형들에게 하는 걸 보니.

=이전엔 못했어요. 형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 항상 강한 모습만 보이려고 했었죠. 이젠 형들에게도 그렇고 주변에 표현을 많이 합니다. 좋아한다는 표현도 많이 하고, 애교도 많이 부리고, 이모티콘 하트도 마구마구 날리죠. 강아지에게도 간식 하나 줄 때마다 눈 보고 이야기해요. “사랑해”라고.

-머리를 안 쓰는 게 힘들기도 했다는 건 어떤 의미입니까.

=어릴 땐 잔머리를 잘 썼어요. 부모님에게 혼나기 싫어서, 친구들과 오래 놀고 싶어서 잔머리를 잘 굴렸죠. 그런데 연기를 시작하고부터는 머리를 쓰고 싶지 않았어요. 실제로 사회생활 하면서 계산적이지 못하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그런데 그건 사실…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예요. 인위적인 건 싫거든요. 머리를 쓰면 너무 잘 쓸 것 같아서 무섭기도 하고요.

-그런데 이 업계에선 그런 이야기도 하잖아요? 적당히 머리를 써야 한다고.

=그러고 싶지 않아요. 머리를 쓰면 뭔가 안정적인 걸 추구하게 될 것 같은데, 그건 제가 추구하는 삶과 반하는 거거든요.

-그래서일까요. 주변에 사람이 많은 건.

=음…많지만, 모두 제 사람은 아니고, 그냥 많은 거죠. 제가 사랑하는 제 사람은 정해져 있는 것 같아요.

-진짜 내 편인지 아닌지 어떻게 구분합니까. 시간이 필요한 걸까요.

=이전에는 시간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이젠 아닙니다. 물론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고 곁에 있어 주는 고마운 벗들이 있죠. 어떤 선택을 해도 존중할 수 있는 친구들이요. 하지만 시간을 오래 공유한 모두와 그렇게 되지는 않잖아요. 제게 중요한 건, 아까 이야기한 것과 맞닿는 지점인데, 계산하지 않는 겁니다. 자연스러운 사람을 오래 보고 싶어요. 또 그런 분들과 연이 되고 있고요.

-상처는 어떨 때 받나요. 내가 준 사랑만큼 받지 못할 때?

=예전엔 그랬죠. 그때 누군가가 “사람에게 기대하지 마”라고 이야기해 줬어요. 그게 위로가 될 줄 알았는데 위로가 안 되더라고요. 저는요, 사람에게 기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기대를 안 하면 나 역시 상대에게 기대를 못 주지 않을까 싶거든요. 연기할 때도 그래요. 100% 기대감은 못 줘도, 이 배우가 노력했구나 정도까지는 전달 드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소년 변요한은 말을 조금 더듬은 아이였다. 그런 아들이 걱정이었던 부모는 소년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고자 연기를 배우게 했다. 이상도 하지. 무대에서는 말이 막힘없이 술술. 연기라는 세계가 그렇게 소년에게 스며들었다. 그러나 변요한은 꿈이 배우라고 말하는 게 부끄러웠다. 집안의 반대도 있었다. 국제적일 일을 하길 원하셨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중국 유학길에 올랐다. 하지만 세상을 살다 보면 불가항력적인 일을 만나기 마련이다. 변요한에겐 연기가 그랬다. 유학의 길에서 변요한이 확인한 건 연기에 대한 갈망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입학하고, 수 십편의 독립 장·단편영화에 출연하며 자신을 다그치고 단련하며 달렸다. 그리고 2014년에 만난 tvN 드라마 <미생>은 변요한의 길고 긴 연기 인생에 작지 않은 파동을 안겼다.

-배우가 되고 나서 자유가 박탈당한 부분도 있다고 느끼십니까.

=얻은 것도 많고 잃은 것도 많다고 느끼죠. 그건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고요. 잃은 것들은… 제가 잃었다기보다, 주변에서 저를 신경 써 주면서 오는 혼란이 있었습니다. 그게 좋은 의미의 배려지만 처음 겪었을 땐 어찌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죠.

-<미생> 즈음인가요?

=네. ‘누군가가 나를 알아봐 줬으면 좋겠다’ 하며 열심히 달렸던 내가 누군가가 알아봐 주기 시작했을 때, 너무 좋았지만, 그 기쁨을 내색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조차 몰라서 혼란스러워했어요. 그런데 얼마 못 갔습니다. 23주 갔나. 그러다가 다 내려놓았죠. ‘원래 살던 대로 살자!’ 그 이후부터는 어떤 혼란스러운 순간이 와도, 항상 그래요. “나를 절대 잊어버리면 안 돼” 그게 사실 제 여동생이 해 준 말이에요.

-여동생에 대한 애정을 여러 번 밝혀 온 걸로 알아요.

=군대 갔을 때였어요. 밝았던 제가 그 분위기에 눌려 변해서 나올까 봐 여동생이 자기가 바라보는 변요한, 주변 사람들이 바라보는 변요한을 정리해서 편지에 쭉 써줬어요. “오빠 잊어버리지 마, 오빤 이런 사람이야”라고. 덕분에 현명하게 군 복무를 할 수 있었죠. 제가 유학할 때, 군대에 있을 때, <미생>을 할 때, 그럴 때마다 제 친구들을 챙긴 것도 여동생이에요. 한 살 차이인데, 동생이라기보다 누나 같아요. 어제도 통화하다가 혼났어요. (웃음) 엄청 친해요. 현실 남매라기보다 이상적인 관계에 가깝습니다.

-동생이 연출 공부를 한 것으로 아는데, 연출자로서 보는 변요한은 다르다고 하던가요?

=작품이 담긴 USB가 왔을 때, 가장 먼저 보여줬던 게 동생이에요. 단편영화부터 제 모든 작품을 모니터했죠. 동생이 <들개>를 좋아했어요. 그때 처음 제가 배우 같다고 하더군요. 너무 좋아서 밤새도록 “어떤 게 좋았어?” “이 장면은 어땠어?” “나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해?” 막 물어봤죠. 지금도 제 최고의 팬이자, 최고의 안티예요.

변요한의 드럼과 피아노, 그리고 '복자'

-(길거리 공연을 바라보며) 얼마 전, 당신 공식 SNS에 드럼 치는 영상이 올라왔더군요. 실력이 상당해서 깜짝 놀랐어요. 지금 당장 길거리 공연을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요.

=(쑥스럽게) 취미 수준이에요. 생일날 팬들에게 축하 인사를 많이 받았어요.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 즉흥적으로 드럼을 쳤죠. 그러고 나선 밴드 하는 형들에게 물어봤어요. “(연주) 어떤 것 같아, 형? 이상하면 안 올릴게요.” “올려! 이 정도는 괜찮아.” 바로 업로드했죠.

-영상을 올리는 과정에서 (귀여운) 고민이 있었네요. 드럼 말고 피아노도 연주하죠?

=다 조금씩 쳐요. 음악은 늘 가까이에 있었어요. 엄마 꿈이 가수셨고, 외숙모가 또 피아니스트셨거든요. 명절날 모이면 사촌 동생들이 기타, 드럼, 피아노 치며 노는 모습을 볼 수 있었죠. 그때 저는 그냥 지켜만 봤어요. 동생들이 악기를 너무 잘 다뤄서 불쑥 나서기가…(웃음) 그러다가 독학을 시작했죠. 유학 시절, 외로움을 견디는 법이 피아노 치면서 노래 부르기였어요. 군대 갔을 때도 몰래 교회 들어가서 피아노를 치곤 했죠. 그래서인지 음악 영화는 웬만하면 다 좋아해요. <라라랜드> <위플래쉬> 같은 영화들. 요즘은 <스타 이즈 본>에 푹 빠져 있습니다.

-<스타 이즈 본>은 최정상에서 하강하는 남자와 밑바닥에서 상승하는 여자의 엇갈림을 그린 러브스토리죠. 일과 사랑을 동시에 성취하는 건 힘들다고 생각하십니까.

-음. 같이 갈 수 있다고 믿는 쪽입니다. 물론 사랑에는 무수히 많은 변수가 있기에 쉽지는 않겠지만요.

-어떤 사람에게 끌리십니까.

=기운이 좋은 사람? 상대적인 개념인데, 일단 말이 잘 통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거기에서 좋은 기운이 나오고, 반짝반짝거리는 것들이 나오죠.

-이전에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더군요. “한 여자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의 역할도 소화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라고. 이 말은 유효한가요?

=그럼요.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관입니다.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로맨티스트군요. <라라랜드>는 결말이 아련하고도 충만한 영화입니다. 헤어진 남녀가 우연히 조우하는 마지막 장면에선 ‘만약에 우리가 이랬다면’이라는 물음이 딸려오죠. 당신에게도 “만약에”를 떠올리게 하는 인연이 있겠지요.

=연애사뿐 아니라, 많은 것들이 그렇죠. 만약에 욕심을 안 냈더라면, 만약에 그때 자존심을 조금 더 부렸더라면, 만약에 그때 그 길로 갔더라면…너무 많습니다. 앞으로도 수많은 ‘만약에’들이 생길 테고요. 그런데 저는 웬만하면 후회를 안 하려고 해요. 더 정확하게 말하면 후회를 만들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 순간을 살려고 하죠. 순간순간 많이 힘들어하고, 순간순간 많이 좋아하고, 순간순간 내 감정을 힘껏! 그러면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그 모든 게 추억이 되거든요.

산책 후 그의 단골 카페에서 대화를 이어나갔다.

공원을 걸으며 변요한은 추억을 줄줄 쏟아낸다. 저 가게는 걷다가 갈증이 나면 물 한 컵 얻어 마셨던 곳, 저 벤치는 사색을 즐겼던 곳, 저 공간은 <육룡이 나르샤> 당시 칼 싸움 연습을 했던 곳...출발지점으로 다시 돌아 온 우리는 그의 피규어 수집에 큰 영향을 끼친 커피숍으로 들어가, 그가 즐겨 앉았던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대화를 이어나갔다.

-독립영화에서 출발해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당신 또래 배우들이 참 많아요.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해요. 조금 과장해서 표현하면 하나의 경향이지 않을까 하는. 과거 연극무대에서 자양분을 섭취해 온 충무로의 기초 토양이 당신 세대부터 독립영화로도 많이 옮겨 갔어요. 기존 선배들과 성향도 확연하게 다름을 보여주고 있고요. 어떤 변화가 감지된달까.

-변화에 대한 생각은 사실…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변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문화적인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말이죠. 대단해서가 아닙니다. 창작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경향을 무조건 따르기보다, 제시할 필요도 있다고 보거든요. 노력이 필요한 거죠. 저희에게 어떤 특권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아직 도전할 기회가 많다는 것일 텐데, 그렇기에 더 유연하게 쓰고 싶어요. 책임감을 겸손 떨지 말고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책임감을 겸손 떨지 말고 가져야 한다…훅 들어오는 말이네요. 또래 배우들과 이런 이야기, 종종 나누나요?

=옛날에는 했었는데 지금은 아끼는 편이에요.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후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기자님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이유는…지금 이 대화들이 기사로 나가잖아요? 선배님들이 보실 수도 있고, 젊은 배우들이 볼 수도 있죠. 선배님들은 “얘, 이런 생각 하고 있구나. 나도 이전에 저랬었는데” 생각하실 수 있어요. 실력이 있는데 아직 필드에 나오지 못한 친구들은 “그래 저 형도 하는데, 우리도 가능하지. 곧 우리 시대가 올 거야”라고 생각할 수 있고요. 조심스럽긴 하지만, 그런 마음이 조금이라도 전달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어요.

큰 사랑을 받으며 방영된 400억 대작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출연 후 그의 발길은 단편 영화 <별리섬>으로 향했다. <미생> 후에도 그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독립영화를 선택했었다. 그러니까, 변요한의 독립영화에 대한 애정은 말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행동으로 옮긴다. “초심을 잃고 싶지 않다”는 말이 다소 상투적으로 쓰이는 요즘이지만, 변요한 앞에서만큼은 그 상투성이 끼어들 틈이 없어 보였다.

-아까 낭만 이야기를 잠시 했는데 당신에게 낭만은 뭔지요.

=돌발적인 것들. 가령 친구가 갑자기 와서 “나와!” “어디 가려고. 나가려면 씻어야 하는데.” “그냥 나와.” 그래서 모자 하나 푹 눌러쓰고 나가서 시원한 아메리카노 먹으며 아이쇼핑하다가 맘에 드는 아이템이 있으면 남자끼리이긴 하지만 커플로 사서 나누는 게 저에겐 낭만입니다. 오늘 이렇게 기자님과 공원을 산책한 것도 저에겐 낭만이에요. 4년 동안 친한 지인들 혹은 홀로 걸었던 공간을 이렇게 낯선 사람과 1대 1로 산책한 것도 참 낭만적이라고 생각해요. 좋은 순간이에요. 이런 게 또 기억에 남거든요.

-낭만적인 말, 감사합니다. (웃음) 듣다 보니 낭만은 당신 가까이에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런 것 같아요. 불평불만도 많고 감사한 것도 많아요. 그런데 불평불만은 최근 몇 년 사이 많이 없어졌어요. 그래서 조금 불안하긴 합니다. ‘반감이 조금 있어야 하는데, 너무 유해지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불안함은 저의 원동력이었거든요.

-변요한은 뭔가를 하나 시작하면 끝장 보는 사람 같다는 인상이 있어요.

=아… 지금의 저는 딱 기자님이 보시는 모습인 것 같아요. 열심히 하는! 끝장 보는! 지금은 그러고 싶고요. 끝을 모르기 때문에 지금 이 시기를 후회하고 싶지 않은 거죠. 물론 이렇게 하면서 행복해하는 지점들을 찾는 게 저에겐 숙제죠.

-당신이 배우가 된 건 운명이었다고 생각합니까, 의지였다고 생각합니까.

=운명이고, 조금 오버하면 숙명 같다는 생각도 합니다. 우연히 시작했고, 연기에 뜻을 품는 게 쉽지 않은 환경이었고, 포기하도록 이끄는 어려운 순간도 많았는데, 돌고 돌아 연기로 왔어요. 제가 다가간 것도 있지만 연기가 다가온 것도 있다고 생각해요.

-왜 당신에게 숙명과도 같은 일이 왔을까 생각해 본 적 있나요.

=해봤죠. 그런데 이건 말씀드리기가 조금 창피해서… 이 정도는 이야기 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얼마 전 소속사 대표님과 밥을 먹었어요. 그때 대표님이 ‘선한 영향력, 좋은 영향력’에 대해 이야기하시더라고요. “연기로 누군가를 위로해야지, 더 그래야지”라고요. 대답은 안 했지만 제 마음과 같았습니다. 배우는 연기를 하고, 화가는 그림을 그리고, 음악가는 음악을 하고, 기자님은 글을 쓰는데, 이 모든 게 힘이 있다고 믿거든요.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해요.

-처음 연기를 시작했을 때와 비교해서 삶의 목표가 달라졌습니까.

=달라지지는 않았어요. 말하지 않고 있을 뿐. 말로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나오는 부분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연기는 짝사랑 같나요, 아니면 서로 사랑하고 있는 것 같나요.

=이전에는 짝사랑이라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같이 사랑한다고 느껴요. 어느 순간 그렇게 생각하게 됐어요.

-사랑하는 대상인만큼 연기에 상처를 받기도 할 텐데요.

=그렇죠. 가장 즐겁게 하는 것도, 가장 슬프게 하는 것도 연기죠.

-애증의 관계?

=아니, 애증은 아니고. 사랑입니다. (웃음)

-아프게 하지만 사랑이다!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더 빠지는 거죠. 저는, 아직도 너무 뜨거워요. 아직 세상을 다 알지 못하지만,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느낀 것들을 담아내고 싶은 열정이 부글부글 끓어요. 일희일비하지 않고 가고 싶어요. 조금 아프다고 해서 엄살 부리고 싶지 않고, 기쁘다고 해서 들뜨고 싶지 않아요.

달, 별, 꽃을 좋아했던 '미스터 션샤인' 김희성처럼, 변요한도 낭만을 좋아했다.

그가 “아직도 너무 뜨겁다”고 말하는 순간, 나는 주변 공기가 살짝 데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건 착각이었을까. 적어도 그의 말끝에서 감지되는 묵직한 떨림과 그 떨림에 반응하는 내 안의 기분 좋은 감흥은 착각이 아니었다. 나는 그에게 “당신의 오늘을 떠올리면 ‘킵 고잉(keep going)’이 생각날 것 같다”고 말했다. 그가 빠르게 응답했다. “킵 고잉, 제가 즐겨 쓰는 단어에요!”

-지금의 연기 패턴은 과거의 경험에서 얻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실패를 통해 연기에 대한 스타일을 수립한 건가요, 아니면 성공을 통해 그 스타일을 더 견고하게 해나간 편인가요?

=과거 작품들에 정말 미안하지만 모든 게 실패였다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앞으로 계속 나아가야 하는데, 성공이라고 해 버리면 너무 재미없잖아요. 그럼 괜히 나에게 도취될 것 같고요. 그런 면에서 실패라 하고 싶어요. 좋은 의미의 실패.

-가치관에 영향을 준 뼈아픈 기억, 혹은 좋았던 기억이 있습니까.

=너무 많죠. 그런 만남도 많았고요. (생각) 연기할 때는 저는 완벽주의자 기질이 조금 있습니다. 그런데 연기 외의 것들은 전혀! 평소엔 허점투성이에다가 허당이고 잘하는 것도 많이 없고 그래요. 바보 같다는 소리도 듣고요. 그런데 그게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프로페셔널한 모습은 일할 때 꺼내서 쓰고, 인간 변요한 일 때는 머리 안 쓰고 잘 놀고 잘 감동하고 잘 울고 싶어요.

-최근 언제 울었나요?

=오늘 아침에도 울 뻔했어요. <왕좌의 게임> 마지막 시즌 보다가… (웃음)

-사람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면 연기도 좋아진다고 생각합니까.

=(단호하게) 사람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절대.

-이해를 안 하면요?

=그냥 안아주는 것. 온기인 것 같아요. 이전에는 연기할 때 ‘관찰’이라는 단어를 많이 썼습니다. 이젠 이게 안 좋은 말이라고 느껴요. 관찰보다는 그냥 에너지를 서로 느끼는 게 좋다고 보거든요. 그게 제가 느끼는 가장 좋은 감성이에요. 사람은 절대 알 수 없기에.

-알 수는 없지만, 반대로 이해받고 싶은 마음이 있지 않나요.

=그렇죠. 하지만 그 이해가 100% 일 수는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이해는 내가 안다고 착각하는 쪽에 가깝지 않을까 싶고요. 그래서 이해보다는 안아 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고요.

-이해 대신 안아준다…

=컨디션이 굉장히 안 좋은 날이었어요. 내색은 하지 않고 친구와 소파에 앉아있는데, 제 발이 친구에게 갔나 봐요. 친구가 대뜸 “컨디션 안 좋아? 왜 이렇게 발이 차?” 하고선 “약 먹을래? 밥 먹었어?” 이러는데…그 말이 되게 위로가 되더라고요. ‘얘가 나를 아는구나’ 싶고. 그런 순간들인 것 같아요. 이해가 아닌 안아준다는 건.

-그게 말씀하신 온기이고요. 감정적으로 터치가 되는.

=맞아요. 온기예요. 이해할 수 없는 무언의, 온기. 텔레파시. 백 마디 말보다 강력한.

추억놀이 중인 변요한

-캐릭터를 받아들이는 과정은 어떻습니까. 많이들 캐릭터를 이해하려고 한다고 하잖아요.

=배우마다 다르겠지만, 제 경우엔 이해하려고 하면 너무 답이 나오더라고요. 반대로 이해하려고 해서 답이 너무 안 나오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젠 캐릭터를 받으면 일단 떨어져서 봐요. 대사 한 줄이라도 내 마음을 치는 게 있으면 거기에서 감정을 파생시켜 나가려 하고요. 하지만 이 경우 역시 상상력을 키우는 것일 뿐, 절대 그 인물을 다 알 수 없다고 생각해요.

-살면서 계속 성장하고 있다고 느끼십니까.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오늘 기자님에게 건넨 모든 말들이 성장이 돼서 나오는 것들이었으면 좋겠어요. 거품이 아닌. (생각) 사실, 오늘의 이 말들은 지금의 내가 내 나이에 생각할 수 있는 최고치예요. 이게, 지금의 나예요. 네, 그래요. 나중에 만났을 땐 지금의 생각들이 달려져 있을 수 있지만요.

-단서를 달죠. 2019년 5월까지의 변요한의 진심이라고. 마지막 질문입니다. 훗날 변요한 인생을 뮤지컬로 만든다면, 오프닝과 엔딩을 어떤 곡으로 하고 싶으십니까.

=어려운 질문인데요. 음…제가 얼마 전에 생애 첫 팬 미팅을 했어요. 그때 불렀던 곡. 오프닝 곡은 윤도현의 <나는 나비>, 엔딩 곡은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이면 어떨까 싶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날개를 활짝 펴고 세상을 자유롭게” 날기 위한 여정. 그 여정에서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모두 의미 있는 ‘습작’일 것이고 ‘추억’이 될 것이다. 쉽지 않은 여정이겠지만, 그의 뜨거운 열정에 응원을 보낸다.


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