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최고의 영화광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영화광은 누구일까. (이미 제목과 사진에 정답이 있긴 하지만) 힌트를 좀 주자면… 미국 사람이고, 이름이 약간 특이하다. 영화감독이기도 하고, 배우이기도 하고, 각본가이기도 하다. 이 사람이 각본을 쓴 토니 스콧 감독의 <트루 로맨스>를 추천한다. 또 전직 LA의 비디오 가게(!) 점원이다. 혹시 비디오테이프가 뭔지 모르는 사람은 네이버 검색을 해보시길. 비디오 가게에서 일할 당시 그는 손님 취향에 맞는 추천작 리스트를 제공하는 것으로 할리우드 관계자에게 유명했다고 한다. 홍콩의 액션 영화 및 누아르 영화에 열광하고, 일본영화를 비롯한 문화를 아주 좋아하고, 코믹스를 사랑한다. 한국영화도 좋아한다. 2013년에는 ‘봉도르’ 봉준호 감독을 만나기 위해 부산국제영화제를 찾기도 했다. ‘깐느박’ 박찬욱 감독이 <올드보이>로 2004년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받을 때는 심사위원장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심사위원장이던 그의 입김이 크게 작용해 박찬욱 감독이 칸느박에 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올해 칸영화제에서는 봉도르 감독과 함께 황금종려상을 놓고 경쟁하기도 했다. (정답은 이미 다 공개해놓고) 힌트를 너무 구구절절 늘어놨다.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영화광은, 쿠엔틴 타란티노다. 어딘가 영화광 인증기관이 있다면 그는 그 기관의 대표가 돼 있을 것이다.
타란티노의 MCU ‘정주행’
이견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쿠엔틴 타란티노 말고 더 지독한 영화광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어쨌든. 그가 추천하는 영화는 뉴스가 될 때가 많다. 최근에도 비슷한 뉴스가 나왔다. 그의 아홉 번째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와 관한 ‘엠파이어’와의 인터뷰 도중에 나온 발언이 뉴스가 됐다. 내용은 이렇다. 타란티노가 <어벤져스: 엔드게임>을 보기 위해 뒤늦게 MCU 영화를 몰아보는 이른바 ‘정주행’을 하고 있는데 가장 재밌게 본 영화가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의 <토르: 라그나로크>(이하 <라그나로크>)였다는 것이다.
타란티노의 ‘원픽’ <트로: 라그나로크>
타란티노가 구체적으로 왜 <라그나로크>를 좋아하는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추측은 가능하다. <라그나로크>는 1980년대 스타일의 B급 감성을 자극하는 미술, 의상, 세트 등이 돋보이는 영화다. 기자가 2016년 호주 촬영현장을 방문했을 때 미술감독 댄 헨나도 그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라그나로크>는 복고를 내세운 영화다. 티저 포스터부터 스스로 정체성을 드러냈다. 오래전 오락실의 게임기 속에서 본 듯한 서체의 포스터는 누가 봐도 이 영화가 지향하는 지점을 보여준다. 그러니 타란티노 감독이 좋아할 수밖에. 타란티노 감독은 B급 감성의 소유자다. 그의 데뷔작 <저수지의 개들>과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펄프 픽션>, <킬 빌> 시리즈, <데쓰 프루프> 등을 떠올려 보면 납득이 될 것이다.
B급 감성의 아카이브
타란티노 감독의 B급 감성은 그냥 나온 게 아니다. 그의 머릿속에 있는 수많은 영화 레퍼런스, 아카이브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과거 영화 속 명장면을 오마주 한다. 카메라 앵글을 똑같이 가져오거나, 유명한 의상을 다시 영화에 쓰기도 한다. 이소룡의 옷을 우마 서먼에게 입히는 것처럼. 자신이 본 영화의 아름다운 삽입곡을 가져올 때도 있다. <헤이트풀 8>의 영화음악을 엔니오 모리꼬네에게 맡기기 위한 그의 노력은 단지 그에게 편지를 보낸 것만이 아니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의 클라이맥스 장면에 과거 모리꼬네가 작곡한 음악을 사용했다. 이렇듯 타란티노 감독은 자신의 영화에 과거의 빛나는 장면을 변주해서 슬쩍 집어넣는 걸 잘한다. 영화광의 영화 만들기란 이런 것이다.
타란티노의 인생영화 12편
타란티노 감독이 MCU 영화 가운데 <라그나로크>를 가장 좋아한다는 충격적인 아니 너무 당연한 소식과 함께 글을 끝내려다가 아쉬운 마음이 생겼다. ‘스크린랜트’가 보도한 타란티노 감독의 추천작 리스트를 첨부한다. 타란티노 영화의 팬들이라면 필수적으로 참고할 필요가 있겠다. 타란티노 감독이 누군지 모르더라도 한 번쯤 훑어보도록 하자.
12위 롤링 썬더(1977) - 존 플린
11위 프리티 메이드 올 인 어 로(1971) - 로제 바딤
10위 소서러(1977) - 윌리엄 프리드킨
9위 꼴찌 야구단(1976) - 마이클 리치
8위 멍하고 혼돈스러운(1993) - 리처드 링클레이터
7위 대탈주(1963) - 존 스터지스
6위 그의 연인 프라이데이(1940) - 하워드 혹스
5위 캐리(1976) - 브라이언 드 팔마
4위 지옥의 묵시록(1979) -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3위 죠스(1975) - 스티븐 스필버그
2위 택시 드라이버(1976) - 마틴 스콜세지
1위 석양에 돌아오다(석양의 무법자, 1966) - 세르지오 레오네
씨네플레이 신두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