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드라마로 출발해서 이제는 넷플릭스 드라마가 된 <블랙 미러>는 지금까지 두 편의 스페셜 에피소드까지 포함해서 모두 23편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앤솔로지 형식인 <블랙 미러>에서 23편은 모두 독립된 이야기로 각각 다른 세계관, 다른 인물, 다른 기술과 규칙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블랙 미러>의 기획자이자 대부분의 이야기를 직접 쓴 찰리 브루커는 ‘블랙 미러’(black mirror)가 무엇을 뜻하는지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때 브루커는 21세기의 사람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모니터, 텔레비전, 그리고 휴대전화를 바라보며 지내는데, 전원이 꺼지면 그것들은 모두 우리를 비추고 있는 어두운 거울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만큼 <블랙 미러>는 기술의 어두운 면과 그에 따른 인간의 고민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를 위해 주로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현실화 가능성이 높은 기술을 상상해본다. 여기 <블랙 미러>에 나온, 당장 도입하고 싶은 미래의 기술 몇 가지를 가져와봤다. 다만, 그에 따른 부작용과 윤리적 문제에 대한 고민도 함께 와버렸다.
※ 각 에피소드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1. 눈 앞에 펼쳐지는 삶의 모든 순간 / <당신의 모든 순간> (시즌 1, 3회)
낡은 사진 외에는 어렸을 때 돌아가신 아버지의 얼굴을 정확하게 떠올릴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 슬펐던 적이 있다면,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비디오처럼 끊임없이 재생해서 볼 수 있다면. 그것도 희미한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4K 비디오를 재생하는 것과 같이 또렷하게 말이다. 휴대폰으로 시시각각 촬영하고 녹화하는 시대에도 우리가 놓치는 순간과 사라지는 기억은 너무 많다. 더구나 <당신의 모든 순간>에서 증언하듯 조작도 가능하며 하물며 심어지기도 하는 ‘전통적인’ 기억은 신뢰할 수 없다.
그레인은 귀 뒤에 심기만 하면 내 눈으로 목격하는 모든 것을 블랙박스처럼 저장할 수 있는 장치다. 저장된 기억은 언제 어디서나 각막에 심어진 스크린을 통해 혼자만 볼 수도 있고, 또는 무선 세어링을 통해 큰 화면으로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공유할 수도 있다. 내 평생의 모든 순간이 그레인 안에 담기는 것이다. 그레인 덕분에 이젠 번거롭게 메모를 할 필요도 없고, 기억력이 나쁘다는 핀잔을 들을 리도 없다. 또한 어린이집에 보낸 아이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며, 법정에서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정치인들도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당신의 모든 순간>은 가장 사적인 방식으로 이 기술이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방식으로 얼마든지 이용될 가능성을 보여준다. 평범하게 끝날 수도 있었던 부부싸움은 그레인의 도움으로 일거수일투족을 따지고 평가하는 청문회로 변질되고 어느새 기억은 집착이 된다. 생각해보면 그레인은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눈을 CCTV로 만들어버리는 기술이다. 그것도 공유가 가능한 형태로. <당신의 모든 순간>에서는 공항에서 그레인으로 기억을 재생하는 방식으로 보안검색을 하는 장면도 스쳐간다. 그레인의 기술 뒤에는 부부싸움보다 더 큰 사회적 문제가 기다리고 있는 듯 보인다.
2. 죽은 사람과의 소통 / <돌아올게> (시즌 2, 1화)
부모, 자식, 배우자 등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만큼 아프고 힘든 일은 없다. 남겨진 사람들은 상실 속에서 극한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 다양한 노력을 하게 된다. <돌아올게>에서 애쉬의 어머니가 택한 방식은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는 소지품을 눈앞에서 치우는 것이었다. 따라서 처음에는 동생, 나중에는 아버지를 잃었을 때 그들의 소지품은 모두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을 다스리기 위해 어머니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정도뿐이었다.
그런데 죽은 사람들과 신 내린 무당이 아니라 첨단 기술을 통해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이 생겼다. 죽은 이와 채팅을 하거나 통화할 수 있으며, 원한다면 그 이상도 가능하다. 이 기술은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 소셜미디어 등 인터넷망에 남긴 방대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다. 여기에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던 비디오 등의 자료까지 제공하면 기술의 완성도가 더 높아진다. 이렇게 다양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그 사람의 기억, 성향, 말투, 습관을 배워서 재현하는 딥 러닝 기술이다. 말하자면 죽은 사람의 목소리로 그 사람의 역할을 하는 시리나 코타나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애쉬를 잃은 마사는 처음에는 클라우드의 데이터 상태인 ‘AI 애쉬’와 얘기를 나눈다. 그러면서 나름의 효과를 보고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에 최후의 기술을 시도해보기로 한다. 애쉬를 꼭 닮은 인공 신체에, AI 애쉬가 이식된, 안드로이드 애쉬다. 하지만, 실제 애쉬와 구분하기 힘들 정도의 모습에 감탄하는 것도 잠시, 마사는 순간순간 이질감을 주는 ‘언캐니 밸리’를 발견하기 시작한다. 어색한 지점은 곳곳에 존재했지만 가장 치명적인 것은 말을 너무 잘 듣는 기계적인 반응, 그리고 마사만이 알고 있는 애쉬와의 기억(정보)이었다. 마사는 결국 데이터와 육체만으로는─또는 이 세상 그 어떤 방법으로도─잃어버린 사람을 대체할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3. 나만의 개인 비서, 또 다른 나 / <화이트 크리스마스> (시즌 2, 4화)
아침에 나를 깨우고 식사 준비를 하는 것으로 시작해 집안의 모든 일을 다 해주고 하루의 일정까지 전담해서 관리해주는, 가사도우미 겸 매니저가 있다면 많은 시간과 노동을 절약할 수 있지 않을까? 기왕이면 나를 잘 이해하고 정확하게 파악하는 사람이면 좋겠는데, 그런 이는 정말 찾기 힘들고 사생활을 보여줘야 한다는 점에서도 망설여진다. 잠깐, 이 세상에서 나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나 자신인데, 그렇다면 또 하나의 내가 있다면 어떨까? 나 자신이라면 사생활 노출을 걱정을 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고 나의 도플갱어가 마구 돌아다니면 곤란해지니까 행동반경과 모습은 제한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탄생한 게 나의 의식을 완전하게 복제한 뒤 달걀같이 생긴 작은 기기인 ‘쿠키’ 안에 쏙 담는 기술이다. 쿠키 안에 담긴 또 다른 나는 스마트홈처럼 집안 구석구석을 관리해줄 뿐만 아니라 하루의 모든 일정을 정리하고 챙겨준다. 쉽게 생각하자면 KT ‘기가지니’나 SKT ‘누구’를 닮기도 했지만, 쿠키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똑똑한 AI 정도가 아니라 ‘나 자신’이다. 그러니 일일이 명령하고 매번 설명하지 않아도 정확히 내가 필요한 때에 정확히 내가 선호하는 정도로 토스트를 구워낼 수 있다.
작은 문제가 하나 있기 한데, 쿠키 안에 들어 있는 나의 ‘의식’은 자신이 ‘나’라고 믿고 있다. 졸지에 스마트홈 리모컨 신세가 된 쿠키 안의 ‘나’는 처음에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하지만, 다행히도 적응기간을 거치면 결국 수용하게 된다. 따지고 보면 의식을 복제할 수 있는 기술은 엄청난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의식을 복제해서 기껏 AI 스피커 정도로만 활용하는 일은 굉장한 낭비로 보인다. 같은 생각을 했던 건지,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끝으로 가면서 이러한 기술의 또 다른 활용법을 제시한다. 그런데 그렇게 다각화된 활용 방안에는 그 효용만큼이나 큰 윤리적인 문제들도 따라왔다.
4. 죽음도 고통도 없는 가상현실 / <샌주니페로> (시즌 3, 4화)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 것일까. 천국? 지옥? 만일 천국도 지옥도 믿지 않는다면, 천국도 지옥도 아닌 다른 어떤 곳이라면, 또는 그냥 영영 사라져 버리는 것일까? 이는 세상의 모든 종교가 공통적으로 중요하게 다루는 논제이기도 하고, 인류의 가장 오래되고 근원적인 두려움이기도 하다. 그런데 죽어도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에서 본 의식을 복제할 수 있는 기술의 활용법에 대해서 더 고민해보자면, 유한한 육신이 사라진 이후에도 반영구적인 기계로 의식을 옮겨 지속적으로 살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아무리 업그레이드를 한다고 해도 달걀로 살고 싶진 않다면 <샌주니페로>의 가상현실 기술을 고려해볼 수도 있다.
가상현실이라고는 하지만 이 세계, 즉 ‘샌주니페로’에서 우리의 뺨을 스치는 바람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는 실제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리얼하다. 캘리포니아의 아름다운 휴양도시를 닮은 가상현실로 들어가면, 내가 젊었을 때의 모습으로 원하는 시대로 몇 번이고 돌아가서 영원히 사는 게 가능해진다. 가상현실은 죽음을 앞둔 자들 뿐만 아니라 질병과 사고로 신체적 자유를 잃은 사람들에게 다시 평범하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인도적인 기술이기도 하다.
그런데 가상현실 샌주니페로가 너무나 실제 같고, 오히려 실제보다 더 근사한 조건을 갖춘 탓에 아예 빨리 죽어서 샌주니페로로 가고 싶은 사람들도 생겨났다. 이 때문에 안락사의 기준은 엄격해졌고, 살아 있는 사람들은 아직 샌주니페로에서 ‘거주’할 수는 없으며, 일주일에 한 번 5시간의 제한을 두고 방문만 가능하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샌주니페로를 마다하는 사람들도 있긴 하다. 그들의 선택은 의외이지만, 이유가 전혀 설득력이 없는 건 아니다. 문제는 삶의 정의와 가치를 어디에 두는 가에 있는 듯하다.
5. 멸종한 꿀벌을 대체한 꿀벌 드론 / <미움받는 사람들> (시즌 3, 6화)
<미움받는 사람들>에는 자율 주행을 하는 드론을 닮은 꿀벌이 등장한다. 드론을 꿀벌만큼 작게 만든, 그것도 자율 주행을 가능하게 한 기술에 감탄하기 이전에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꿀벌 드론이 필요해진 배경이다. <미움받는 사람들>에서 생물학적 꿀벌은 사실상 멸종했다. 그런데 꿀벌이 사라지면, 우리가 잃는 것은 단지 꿀에 그치지 않는다. 꿀벌이 식물의 꽃에 있는 암술과 수술 사이를 날아다니며 수분을 하지 못한다면, 인류 식량의 75%를 차지하는 열매와 전 세계의 100가지 주요 농작물 가운데 71종의 작물이 사라질 수 있다. 그러면 열매와 작물을 먹는 가축의 수도 급격하게 줄어들며, 결과적으로 인류의 생존도 위협받는다.
다행히, 정부는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여 기술을 가진 민간 기업과 함께 시작한 ADI(자율적 드론 곤충) 프로젝트를 통해 영국 전역에 꿀벌 드론을 퍼뜨렸다. 전국에 퍼진 수많은 꿀벌 드론을 일일이 조종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행동 방식을 설정한 뒤 자율 비행이 가능하게 하였고, 벌들이 스스로 벌집을 만들어 3D 프린터와 같은 방식으로 새로운 벌의 생산(번식)도 가능하게 했다. 말하자면, 프로젝트가 한번 안정기에 들어간 이후로는 거의 알아서 돌아가는 방식이다.
완벽해 보였던 ADI 프로젝트가 어긋나기 시작한 것은 우선 영국 전역을 덮고 있는 수많은 드론을 단 한 사람이 통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군사 등급의 보안암호를 뚫어야 하지만 해커들은 그게 일이고 또 자랑이다. 하지만 <미움받는 사람들>에서 ADI가 위협적인 가장 큰 이유는 이것이 한 사람의 기술과 악의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 있다. 수많은 벌들을 움직이는 동력은 태양에너지가 아니라 결과적으로 네티즌의 악플이었다. 인터넷망에서 무심코 던졌던 돌이 여기선 벌이 되었다.
6. 복잡한 연애와 결혼은 맡겨버리자 / <시스템의 연인> (시즌 4, 4화)
인연은 만나기도 어렵지만, 관계를 원만하게 이어가는 것도 깨끗하게 마무리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모든 과정은 종종 스트레스가 되기도 하고, 때론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그럼 결혼정보회사의 도움을 받으면 조금 수월해질까? 만일 도움 정도가 아니라 결혼정보회사의 개념을 사회 전체로 확장해서 결정장애를 치료해줄 강제력을 조금 더하고 모든 것을 맡겨 버리면 나의 수고와 고민을 덜을 수 있지 않을까?
<시스템의 연인>에서 ‘시스템’은 최종 배필을 만나기 전까지 쉬지도 않고 사람을 소개해준다. 사람만 열심히 찾아주는 것이 아니라 장소와 메뉴는 물론 그 사람과 함께 해야 하는 기간, 즉 ‘유효 기간’까지 아예 정해준다. 유효 기간이 지나면 무조건 헤어지는 게 규칙이므로 헤어질 변명을 고민할 필요도 없고 미련을 가질 여유도 없이 바로 체념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여러 만남에서 반응을 축적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새로운 사람을 금방 다시 소개해준다.
그런데 적합한 배우자를 찾기 위해서 시스템이 수집하고 있는 데이터는 신뢰할 수 있을까? 언뜻 한국의 결혼정보회사에서 소중하게 다루는 데이터인 연봉과 직업, 학력과 외모보다는 나아 보여도 기계가 수집하는 데이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성공률 99.8%라는 시스템에 이러한 의문을 품기 시작한 것은 에이미와 프랭크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시스템의 결정이 아닌 두 사람의 감정에 따르기로 한다. <시스템의 연인>은 결국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는데, 그럼에도 그 이후로 두 사람이 좋은 감정을 끝까지 유지하며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다는 생각은 쉽게 들지 않는다. 아마도 애초에 이런 회의감이 시스템이, 또는 결혼정보회사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겠지만.
7. 당신에 관한 모든 것 / <스미더린> (시즌 5, 2화)
총을 든 납치범이 인질을 잡고 있는 급박한 상황에서 인질범의 정보를 빠른 시간 내에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가족 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연락처는 어떻게 되는지. 경찰이라면 이런 정보를 모두 갖고 있을 것이다. FBI는 말할 것도 없고. 하지만 개인에 관련된 정보를 경찰이나 FBI보다 많이 가지고 있는 곳이 있다. 소셜미디어다.
스미더린의 인턴을 인질을 잡고 있는 크리스는 스미더린의 대표 빌리 바우어와의 통화를 요구한다. 스미더린은 트위터를 닮은 소셜미디어를 운영하는 회사다. 스미더린은 경찰이나 FBI보다 앞서 크리스에 관련된 정보를 더 빨리 더 많이 찾아내며, 크리스가 소셜미디어에 남긴 모든 언어를 분석해서 그의 성향 파악에도 더 앞서 있다. 여기에 스미더린은 크리스의 플레이리스트를 들려주며 크리스를 진정시켜는 시도를 하는가 하면, 크리스의 휴대전화를 통해 인질과 크리스의 현장 대화를 엿듣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기술은 딱히 미래에서 온 기술이라기보다 오히려 현실에서 한두 번쯤 들어본 듯 익숙하게 들린다. 이유는 <블랙 미러>의 모든 이야기는 현재 시점의 얼터너티브 세상이나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반면, <스미더린>은 유일하게 2018년 과거의 시점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스미더린>은 현재 우리에게 이미 있는 기술과 그 영향력을 다루고 있는 셈이다. 이는 미래에 가능할 법한 기술을 다루는 <블랙 미러>의 다른 이야기들보다 어쩌면 <스미더린>의 이야기가 더 섬뜩하게 들릴 수도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에그테일 에디터 빈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