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막식 다음 날인 6월 28일, 부천판타스틱국제영화제(이하 부천 영화제)의 본격 행사가 시작됐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장마와 함께 문을 연 부천 영화제. 흐린 날씨였지만 다행히 비는 거의 내리지 않았다. 28일, 영화제를 찾은 대형 스타가 있었다. 올해 특별전으로 선정된 배우 김혜수다. 이번 부천 영화제에서는 김혜수의 영화 10편을 만나볼 수 있다. 그중 가장 관심을 모은 건 <타짜> 상영 후 약 1시간가량 김혜수, 최동훈 감독의 이야기를 듣는 <타짜> 메가 토크 시간이었다.
<타짜> 상영 전 무렵 이색 풍경이 펼쳐졌다. 김혜수가 관람객들을 위해 커피차를 준비한 것. '타짜 관람 전 커피 한잔하고 가세요~. 김혜수 드림'이라는 현수막이 세워져있었고 그 앞에 사람들의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배우들은 영화관 불이 꺼지면 들어오기 마련인데 김혜수는 영화관 불이 꺼지기 전 관객들 사이로 자연스럽게 앉아 좌중을 술렁이게 만들었다. 영화가 시작되고 이미 영화를 본 관객이 대다수일 텐데도 상영 내내 캐릭터들의 찰진 대사가 나오면 어김없이 웃음이 터졌다.
메가토크: 매혹, 김혜수
영화 상영이 끝나고 배우 김혜수와 감독 최동훈은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놨다. 무려 13년 전의 영화임에도 생생하고 흥미로운 비하인드를 펼쳐놨다. <타짜>는 김혜수의 영화 인생에 한 챕터를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혜수는 12년 만에 이 영화를 스크린으로 다시 보면서 '이 영화를 뛰어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다시 한 번 가슴이 뛰면서 목소리가 떨릴 정도로 흥분됐다'고 소감을 표했다. 최동훈 감독 역시 스스로 '아직도 <타짜>를 못 벗어나고 있는 것 같다'며 '시종일관 바쁘게 돌아가는 게 30대 때 제 성격이 드러났다'는 농담 섞은 소감을 전했다. 이날 최동훈 감독이 입고 온 화투 모양 같은(자세히 보면 책꽂이 모양) 옷은 <타짜> 제작보고회 때 입었던 옷이라고 한다.
<타짜>는 내게 운명적 기점, 김혜수가 들었던 최고의 찬사는?
김혜수는 '<타짜>를 촬영하고 개봉해 만나는 것은 운명적 기점'이었다고 했다. '단조로운 캐릭터와 작품들이 동어반복되는 느낌에 지치고 자괴감 같은 감정도 있었던 중 나를 평가하고 함께 일하는 동료들, 영화 내부자들이 내게 기대할 수 있는 게 무엇인가 명백하게 느낄 수 있는 지점이었다'고 말했다.
김혜수 <타짜> 제안을 받고 원작을 읽었을 때 음. 저는 도박을 전혀 몰랐어요. 평경장으로 출연하는 백윤식 씨 빼고 배우 중 아무도 화투를 아는 사람이 없었죠. 조승우 씨는 손에 물집이 잡힐 정도로 연습했어요. 그럼에도 시나리오를 봤는데 잘 읽히고 이건 그냥 도박 얘기하는 게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능수능란하게 도박판을 쥐고 흔드는 정마담 역을 찰떡으로 소화해 수많은 찬사를 받은 그녀. 그러나 김혜수가 생각하는 최고의 찬사가 있었다.
김혜수 저랑 가까운 지인이 전화를 하려고 전화번호를 한참을 찾다가 못 찾았는데, 혜수가 아니라 정 마담으로 찾고 있었대요. 지금 30년 가까이 우정을 이어온 분인데 그 말이 제겐 가장 큰 찬사였어요. 영화배우로서 캐릭터로 얻는 성취감을 최초로 느꼈던 순간이었어요.
정마담 내레이션 장면, 원래는 없었다?
영화 시작 부분, 관객들의 시선을 확 끄는 명장면은 단연 정 마담의 내레이션 장면이다. "고니를 아냐고요? 내가 본 타짜 중에 최고예요"라는 명대사는 최근까지 각종 예능 프로그램 등에서 회자되고 있다. 이 장면으로 영화의 화자가 단번에 정 마담이 됐으며, 마치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특수한 이야기 구조를 지니게 됐다.
최동훈 제일 어려웠던 인물이 아귀(김윤석)와 정 마담이었어요. 1950,60년대 배경인 원작에서 정 마담은 시골의 다방 마담을 겸하면서 도박판을 운영하는 여자예요. 전 모던하게 보이길 원했고 1994, 1995년쯤으로 옮겨지길 바랐어요.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고 있다가 김혜수 씨를 처음 봤어요. 아름답다 생각도 들었지만 멋있었어요. 제 앞을 지나쳐 걸어가는데 '저런 모습이 정 마담인 것 같아'라는 생각이 들었죠.
원래 시나리오 상에는 36분 정도 흘러야 정 마담이 나오는데 분량이 적은 거예요. 누구한테 줘도 안 한다. 저는 그때 갓 데뷔한 신인 감독이었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많이 보이게 할까. (이때 관객 웃음. 김혜수는 오히려 적은 분량인데 임팩트 있는 역할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래. 내레이션을 넣자.
영화의 전체 구조를 정 마담이 회상하고 영화가 끝났을 때 고니를 죽음에 가까운 길로 몰아넣은 것도 결국은 정 마담이었다는. 신났어요. 내레이션을 넣으면 극을 지배하는 느낌이거든요. 김혜수 씨가 시나리오 받고 안 한다고 하면 어떡하지? 했는데 "도박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아요"라고 했을 때 기뻤죠. 드디어 나도 김혜수 씨와 작업하는 감독이 되는구나.
김혜수 원래 후시 녹음으로 보이스 오버만 하는 걸로 알고 있었어요. 감독님이 예고 없이 촬영 후반에 "우리 내레이션 넣죠." 그때 저는 감독님을 완전히 믿고, 천재 같다고 생각하던 때였어요. 네. 찍죠. 하고 찍었어요.
최동훈 내레이션 장면을 찍을 때 세트를 만들어야 되니까 제작비가 신경 쓰였어요. 결국 싸이더스 사무실에 스테인리스랑 꽃만 갖다 놓고 찍은 거예요. 목소리만 나오는 건 강하지 않아요. 이건 찍어야겠구나.
이 밖에도 <타짜>에는 즉흥적으로 탄생한 장면이 많다. 촬영 당일 쓴 유해진의 즉흥 대사도 그렇고, 영화 후반부 고니가 돈에 불을 붙이는 장면도 원래 시나리오에 없었다고 한다.
최동훈 돈만 들고나가면 정 마담이 총으로 쏴 버리는 장면이었는데 촬영을 하다 보니까 돈이 불타야 될 필요가 있었던 거예요. 어? 큰일 났다. 시나리오에 쓸걸. 그래서 빨리 특수효과 팀을 서울에서 군산으로 내려오라고 했어요. 그리고 조승우 씨한테 가서 불을 붙였으면 좋겠어. 조승우 씨가 "누가 꺼요?"이러니까 "혜수 씨가 끄지".(웃음) 혜수 씨에게 가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물으니까 "그러죠 뭐." 그렇게 찍었는데 협찬받은 정 마담 흰옷이 탔어요. 굉장히 비싼 옷이었어요. 소품 담당 친구가 "저 옷은 타면 안 되는데. 반납해야 되는데” 하니까 김혜수 씨가 "내가 산다고 해."라고 했죠.
정 마담은 정말로 이대 나온 여자였나?
"나 이대 나온 여자야." <타짜>가 탄생시킨 유행어다. <타짜>에서 정 마담의 동기와 과거 설명은 과감히 생략된다. 평경장(백윤식)이 자신을 이 길로 이끌었다는 대사와 이대 나온 여자라는 게 정보의 전부다. 최동훈 감독은 '정 마담의 백스토리가 안 써졌고, 극 후반부 갑자기 구구절절 설명할 수 없어서' 선택한 결론이라고 했다. 김혜수는 "평경장 때문에 내 인생 이렇게 조졌어. 이런 한 방 같은 느낌이 있어" 좋았다고 덧붙였다. 여기서 잠깐, 정 마담은 정말로 이대 나온 여자일까. 그 진실이 개봉 후 10년이 흐른 후 밝혀졌다고 한다.
김혜수 개봉 후 10년이 지났을 때 아까 전화번호부에서 정 마담을 찾았다던 제 지인이 저한테 전화를 걸었어요. 정 마담이 이대를 나왔느냐 아니냐로 지인들과 내기를 했는데 의견이 반반이라고요. 저는 당연히 이대를 안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반반이라니까. 감독님한테 전화해서 확인했어요. 감독님 정말 이대 나왔어요? 안 나왔죠? 그러니까 막 웃어요. 그러고선 "이대를 들어가긴 했죠."라고 얘기한 게 너무 충격이었어요. 지적으로 욕망과 자격이 있던 여자가 평경장이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다면 이 대사 톤이 달라지는 거잖아요. 그 당시에는 정 마담의 학벌에 대한 세속적 욕망을 표현하려고 했어요.
최동훈 감독과 김혜수에게 <타짜>의 대사란?
최동훈 저는 대사를 아무리 이상하게 써도 그 대사를 배우가 뱉는 순간 다 좋다고 생각해요. 배우를 상정하고 대사를 쓰거든요? 저는 내레이션으로 썼던 혜수 씨의 대사가 다 좋아요.
김혜수 아는 단어들의 조합인데 처음 느끼는 느낌의 말들? 이 단어를 이렇게 조합한단 말이야? 처음 느껴봤던 것 같아요. 감독님의 연출가로서 놀라운 능력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데요. 각본도 쓰시는 분이라 원하는 것들이 명백한데 잘 반영되지 않는 순간이 있죠. 감독도 난감하고 배우도 난감한데 그때마다 어두운 내색 없이 대안을 제시하고 아이디어를 유연성있게 제시하세요. 예를 들어 정 마담이 카페에서 고니의 새로운 여자 친구를 보고 나와서 "싸가지가 없어"하고 너구리(조상건)랑 통화하는 장면이 있는데, 욕설 같은 게 있어서 나름대로 신나게 준비해 갔어요. 그런데 감독님이 정 마담 기준으로 그 욕설이 찰지게 느껴지지 않았던 거예요. 그러니까 감독님이 이러는 거예요. (성대모사하며)"자 이 대사를 이렇게 바꿔보면 어떨까요. "너구리. 니 대가리엔 마요네즈가 들었니?" 현장에서 누구도 당황하거나 불편하지 않게 하는 감독이에요.
씨네플레이 조부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