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3일은 배우 이미연과 심은하의 생일입니다. 두 사람은 각자 1987년, 1993년 데뷔 했지만 나이는 불과 한 살 터울밖에 나지 않습니다. 둘의 공통점이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청순’의 이미지를 대표하며 어마어마한 인기를 구가했다는 사실. ‘청순가련’이라는 수식을 여배우에 향한 최상의 찬사로 칭하던 시절, 이를 대표하던 스타가 80년대의 이미연, 90년대의 심은하였죠. 그들은 활동이 뜸한 요즘에도 여전히 리즈 시절의 흔적들로 전설적인 미모를 각인시키고 있습니다. 그 어떤 활동 시기를 봐도 아름답기만 한 심은하와 이미연이지만, 작품 속에서 유독 강렬하게 빛을 발하던 순간들을 갈무리 해볼까 합니다. 심멎 주의!
심은하
...
<마지막 승부>의 다슬
1993년 MBC 공채탤런트로 데뷔해 2000년 돌연 은퇴를 발표하기까지, 그녀가 선보인 수많은 캐릭터가 있지만, 심은하와 <마지막 승부>의 다슬이(‘다슬’이 아니라 ‘다슬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사이의 부등호는 여전히 가장 강력합니다. 인기드라마 <한지붕 세가족>에 출연하며 TV 신고식을 가진 그녀는, 1994년 드라마 <마지막 승부>의 히로인 정다슬 역에 캐스팅됩니다. 잘 나가던 하이틴 스타였던 이상아가 그 물망에 있었지만 결국 신예 심은하로 교체된 것. 당시 신인 스타 만들기에 열을 올리던 MBC의 파격적인 결정이었습니다.
손지창, 장동건, 박형준, 이종원 등 당시 청춘스타들이 대거 출연한 <마지막 승부>의 첫 방송. 그 순간부터 드라마의 스포트라이트는 온전히 심은하의 몫이었습니다. 그리 길진 않았던 무명이라는 딱지가 하루아침에 사라진 셈이죠. 하긴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입니다. 저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느닷없이 주중 황금시간대에 떡 하니 나타나다니. 입 달린 한국인이라면 모두 (당시 일간지의 표현을 빌려) ‘함초롬한 눈빛, 청순가련한 분위기, 무성형 동양미인의 얼굴’의 심은하에 대해 떠들지 않을 수 있었겠어요. 다슬이는 드라마 속에서 대학농구계 스타이자 라이벌인 동민(손지창)과 철준(장동건)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여대생이었습니다. 그리고 거의 모든 회차에서 눈물을 흘리는 가련한 이미지를 어필했죠. 예쁘고 착하고 세련되고 똑똑한 다슬이는 마지막회 철준과 결혼하며 초등학교 교사가 되면서 한국인이 원했던 여성상을 완성했습니다.
<8월의 크리스마스> 다림
심은하는 딱 8년간(1993년~2000년) 활동했습니다. 훗날까지 이어지는 명성에 비하면 그리 넉넉한 기간은 아니죠. 게다가 그녀가 ‘연기 잘하는 배우’로 인정받은 기간은 마지막 3년에 불과합니다. 그 시작이 바로 <8월의 크리스마스>(1998)였습니다. 영화 <아찌 아빠>(1995)와 <본 투 킬>(1996)의 연기가 미적지근한 반응을 얻은 것과 달리, <8월의 크리스마스>는 영화 자체의 성공뿐만 아니라 배우 심은하에게도 도약의 탄탄한 발판이 됐습니다. 함께 출연한 한석규를 따라다니는 ‘부드러운 남자’라는 수식이 온전히 <8월의 크리스마스> 때문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 작품에 출연해서 얻게 된 이미지가 얼마나 막대한지 떠올려볼 수 있을 겁니다.
스무 살의 주차단속요원 다림(심은하)은 지방 마을이 지루하기만 합니다. 그러는 와중, 단속한 사진을 인화하기 위해 자주 들르는 사진관의 주인 정원(한석규)과 점차 가까워지게 되죠. "아저씨!"라고 불러야 할 정도로 나이 차이가 제법 많이 나긴 하지만, 두 사람은 천천히 서로 마음을 키워가죠. 영화가 정원의 시점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다림의 비중은 정원보다 비교적 적은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아버지와 단둘이 살며 조용하게 죽음을 기다리는 정원은 다림을 보면서 삶에 대한 의지를 품습니다. 주변 어느 사람에게도 자신의 병을 알리지 않는 묵묵한 정원이 느닷없이 분노를 표출할 수 있는 것도 다림을 사랑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아주 짤막한 변화죠. 주변인처럼 가려져 있지만 매순간 생생한 다림의 쾌활하고 발랄한 에너지는 전적으로 심은하의 연기에 기대고 있습니다. 밝디밝은 모습(영화의 명대사 중 하나인 “아저씨~ 나 들어가도 돼요~?”하는 그 씬!)이 무색하게도 이렇다 한 말로도 결국 표현하지 못하는 그 마음이 충분히 관객에게 닿을 수 있었던 건, 심은하가 지닌 배우로서의 저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8월의 크리스마스>로 청룡영화상, 영평상, 백상예술대상 여우주연상을 거머쥔 그녀는 이듬해 영화 <미술관 옆 동물원>과 드라마 <청춘의 덫>(“당신... 다 부숴버릴 거야.”)로 성공가도를 이어갑니다.
<텔 미 섬딩>의 채수연
저만 그런가요? 매번 <텔 미 섬딩>이 심은하의 마지막 영화라고 착각하곤 합니다. 아마도 그녀가 은퇴하던 해 발표한 <인터뷰>(2000)가 기대에 못 미치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일 겁니다. 막 새천년(!)을 앞둔 시기에 개봉한 <텔 미 섬딩>(1999)은 ‘하드고어 스릴러’를 표방합니다. 영화에서 심은하는 살인 용의자 채수연을 연기합니다. 심은하가 살인자라니, 하드고어 스릴러라는 장르부터 기존의 이미지를 뒤튼 캐릭터 설정까지 영 낯설게 느껴지는 게 사실입니다. 다만 흔히 덧씌워진 ‘청순’의 이미지를 접어놓는다면, 심은하가 선보여 온 캐릭터의 이미지들이 꽤 다양했음을 깨닫게 됩니다. <텔 미 섬딩>은 순백과 암흑을 동시에 품을 수 있었던 심은하의 매력이 돋보이는 영화입니다. 공포 드라마 <M>(1994) 이후 오랜만에 심은하의 창백한 얼굴을 만날 수 있어 더욱 반가운 작품이죠.
불과 1년 전 한석규와 작업했던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는 심은하가 한석규를 떠받치는 것처럼 보였다면, <텔 미 섬딩>의 두 배우의 점유율은 아주 팽팽합니다. 그리고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심은하의 채수연이 영화를 완벽하게 장악해버립니다. 너무나 명백히 수상한 알리바이를 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청초하고 투명한 수연의 눈빛과 아우라는, 사건을 뒤쫓는 조형사(와 관객)의 이성을 마비시켜놓죠. 명과 암을 동시에 품고 관객을 홀리는 심은하의 존재는 <텔 미 섬딩>의 다소 헐거운 서사가 받아들여질 만한 수준을 유지할 수 있도록 이끄는 유일한 힘이었습니다.
이미연
...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의 은주
7~80년대 한국의 하이틴 스타, 특히 ‘여성’ 하이틴 스타는 주로 예쁘고 다재다능해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캐릭터를 담당해왔습니다. 그런데 이미연은 달랐습니다. 유쾌한 에너지보다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주륵 흘려버릴 것만 같은 외모 때문일까요, 그녀에게선 청춘의 약동하는 가능성보다는 세상에 미숙한 연약함이 더 먼저 보였습니다. 은주는 그야말로 엄친딸 같은 존재입니다. 집 잘 살고, 공부도 잘하고, 예쁜 외모까지 어디 하나 부족한 구석이 없어 보이는 아이죠. 하지만 은주는 전혀 행복하지 않습니다. 바로 부모에게서 지나치게 성적에 대한 압박을 받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좋아하는 순수한 봉구(김보성)가 곁에 있어도 답답함은 쉬이 해소되지 않죠. 그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 성적이 떨어지자 은주의 부모는 그녀를 차가운 시선으로 질책할 뿐입니다.
영화는 1986년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한 마디의 유서를 남긴 채 자살한 중학생의 실화를 모티브로 삼았습니다. 당시 10대들의 민감한 문제로부터 시작한 영화의 분위기는 당연히 그리 밝지 못합니다. 은주를 짝사랑하는 마음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봉구의 귀여움이 그나마 숨통을 트이게 하지만, 영화는 끝내 성적 부담에 짓눌린 은주의 편으로 기울게 되죠. 은주는 부모의 지나친 기대에 한 마디 반항도 하지 못하고 홀로 그 고통을 감내합니다. 쏟아지는 잔소리를 뒤로 하고 방에 들어가 부모와 마주치기 싫어 그대로 옷에 오줌을 싸버릴 뿐만 아니라, 결국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 자기 몸을 던져 삶을 포기하고 맙니다.
<비 개인 오후를 좋아하세요?>의 은채
아버지의 재혼에 분노한 해일(최수종)은 킬러가 되지만, 이복동생인 해성(홍학표)와는 가깝게 지냅니다. 패싸움에 가담하다가 형사를 피해 성당으로 숨어들어간 해일은 성당에서 자란 은채(이미연)의 도움을 받고 그녀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다시 만난 은채는 해성의 연인이 되어 있죠. 하지만 해성의 마음도 편치 않습니다. 은채의 마음이 점점 형에게 기울어가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죠.
당대를 대표하던 청춘스타답게 이미연의 은채 역시 당시 큰 인기를 누리던 두 톱스타 최수종과 홍학표가 분한 두 주인공의 마음을 동시에 사로잡습니다. <비 개인 오후를 좋아하세요?>(1991)는 지금 보면 무리수를 던지는 설정과 연기가 줄을 잇지만, 배우들 각각이 지닌 매력을 느끼기엔 충분한 작품입니다. 순수와 절제를 담당하는 최수종과 홍학표의 활약도 좋지만, 어려서부터 성당에서 성장한 사람 특유의 고아한 아름다움이 물씬한 은채가 전혀 어색하지 않은 이미연의 연기가 가장 눈에 박히죠. 단순히 온화할 뿐만 아니라 중요한 순간엔 자신의 뜻을 적극적으로 드러낼 줄 아는 은채의 캐릭터는, 이미연이 하이틴스타에서 배우로 자연스럽게 이행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주었습니다.
<명성황후>의 민비
2001년은 이미연의 제2의 전성기입니다. 연초 그녀의 얼굴이 크게 박힌 가요 컴필레이션 앨범 <연가>가 엄청난 히트를 기록하고, 5월부터 방영을 시작한 대하드라마 <명성황후> 역시 대단한 인기를 누렸습니다. 7년 만에 브라운관에 복귀한 <명성황후>에서 그녀는 성인 민비를 연기하며 자신의 단정하고 우직한 이미지를 대중들에게 또 다시 확인시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 <명성황후>의 역사왜곡 문제는 심각한 수준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오류가 드라마의 뻗어나가는 인기를 가로막지는 못했죠. 굳건한 인기 요인이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역시 가장 큰 축은 이미연의 존재 아니었을까요? (사실 드라마엔 없고 주제곡 ‘나 가거든’ 뮤직비디오에만 등장하는) “내가 조선의 국모다!”라고 단언하는 대쪽같은 태도가 없었다면 아마 <명성황후>는 성립되지 못했을 겁니다. 저 장면이 거짓이라는 걸 알더라도 그 순간만큼은 이미연의 말하는 대사를 믿고 싶게 되죠. 실제로 이미연이 연장계약을 거부하는 뜻으로 80회에 드라마에서 하차하자 그 자리에 들어온 최명길이 이끄는 <명성황후>의 시청률이 곤두박칠쳤다는 사실은 이미연의 존재감을 증명하는 뚜렷한 지표입니다.
씨네플레이 에디터 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