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헤드의 프론트맨 톰 요크가 세 번째 솔로앨범 <Anima>와 함께 동명의 단편영화를 공개했다. 이 프로젝트가 영화계에서도 화제를 불러온 건 <데어 윌 비 블러드>(1997), <팬텀 스레드>(2017)의 감독 폴 토마스 앤더슨이 연출을 맡았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폴 토마스 앤더슨과 톰 요크의 협업을 기념하며, 영화감독이 연출한 뮤직비디오들을 몇 작품 선별해 소개한다. 뮤직비디오 감독으로 데뷔해 영화감독이 된 스파이크 존스, 미셸 공드리, 데이빗 핀처, 조나단 글레이저, 마크 로마넥 등은 제외했다.


구스 반 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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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 Hot Chili Peppers

Under the Bridge

리버 피닉스와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아이다호>(1991)에 밴드의 베이시스트 플리를 배우로 기용한 구스 반 산트는, 영화가 개봉될 당시 발매된 앨범 <Blood Sugar Sex Magik>의 싱글 'Under the Bridge' 비디오를 연출했다. 이전까지 밴드를 대표하던 망나니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나긋나긋한 그루브가 흐르는 연주와 앤소니 키디스의 진지한 가사가 어우러진 노래에 음울한 매력을 더하는 결과물이었다. 컬러풀 한 차림새(현장에 입고 온 옷을 반 산트가 좋아해서 그대로 입은 채 촬영했다)의 존 프루시안테가 기타를 연주하고 나면, 여느 때처럼 상의를 입지 않은 앤소니 키디스가 LA 거리를 거닐고 홀로 노래하는 모습 위로 여러 이미지가 중첩되는 신들이 교차하며 나타난다. 뮤직비디오를 비롯한 'Under the Bridge'의 성공은 레드 핫 칠리 페퍼스가 세계적인 밴드로 발돋움 하는 발판이 됐다.


소피아 코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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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hite Stripes

I Just Don’t Know

What to do with Myself

소피아 코폴라 감독은 <처녀자살소동>(1999),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2003), <마리 앙투아네트>(2006) 등 내놓는 작품마다 발군의 선곡 센스를 보여줬다. 활동 당시 재능 있는 뮤직비디오 감독들과는 죄다 작업하는 협업 체제를 구축한 화이트 스트라입스는 더스티 스프링필드의 명곡 'I Just Don't Know What to Do with Myself' 리메이크의 비디오를 코폴라에게 의뢰했다. 패션계에서도 이름난 코폴라는 모델 케이트 모스 하나로 뮤직비디오를 완성했다. 흐물흐물 시작해 점점 시끌벅적 난장판이 되는 음악과 달리, 란제리만 걸친 케이트 모스는 그저 조용히 관능적인 눈빛과 몸짓을 흘리며 폴댄스를 춘다. 모스의 카리스마가 없었다면 코폴라의 단출한 연출도 불가능했을 터.


마틴 스콜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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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ael Jackson

Bad

"역시 '킹 오브 팝'"이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런던의 늑대인간>(1981)의 존 랜디스 감독과 함께 'Thriller' 뮤직비디오를 13분 짜리 대작으로 만들어 뮤직비디오의 판도를 바꾼 바 있는 마이클 잭슨은, 거장 마틴 스콜세지를 초청해 1987년 새 앨범 <Bad>의 문을 여는 노래 'Bad'의 뮤직비디오를 내놓았다. 18분이 넘는 러닝타임의 비디오는 스콜세지의 <컬러 오브 머니>(1986)를 작업하며 영화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 리차드 프라이스가 이야기를 썼고, <택시 드라이버>(1976)와 <성난 황소>(1980)를 찍은 마이클 채프먼이 촬영을 맡는 등 초호화 스탭진을 자랑한다. 마이클 잭슨과 (당시엔 신인이었던) 웨슬리 스나입스 주연의 흑백 청춘영화가 이어지다가 두 주인공의 갈등이 깊어지고 나서야 본색을 드러내며 뮤직비디오의 역할을 수행한다. 스콜세지는 고전 뮤지컬 영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1961)에서 주요 모티브를 얻었다.


폴 토마스 앤더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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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ona Apple

Across the Universe

90년대 말 2000년대 초 연인이었던 폴 토마스 앤더슨과 피오나 애플은 모두 5개의 뮤직비디오를 남겼다. 'Across the Universe'는 그 중 가장 풍성한 볼거리를 보여준다. 비틀즈의 명곡을 피오나 애플이 리메이크 한 곡으로, 게리 로스 감독의 <플레전트빌> 사운드트랙에 수록됐다. 흑백화면에 유일하게 컬러인 유리창을 깨부수면서 컬러와 흑백이 공존하는 <플레전트빌>을 떠올리게 하는 뮤직비디오는, 여기저기 유리가 산산조각나고 온갖 물건이 날아다니는 가운데 홀로 평화의 노랫말을 읊조리는 피오나 애플을 느릿느릿 따라간다. 야만적인 폭력이 횡행하는 세상에서도 평화를 노래하는 'Across the Universe'의 가치를 증명하는 연출이다.


캐서린 비글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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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Order

Touched By the Hand of God

'Touched By the Hand of God'는 뉴 오더가 음악을 담당한 영화 <샐베이션!>(1987)을 위해 만들어진 노래다. 뮤직비디오는 <샐베이션!>의 감독 베스 B가 아닌 이제 막 두 번째 영화 <죽음의 키스>(1987)를 발표한 캐서린 비글로우가 연출했다. 사실 비디오만 보면 좀체 비글로우의 작품이라고 예상하기 어렵다. 데뷔 이래 줄곧 웃음기라곤 없는 스릴러만을 만들어온 비글로우임에도 불구하고 이 뮤직비디오는 농담으로 똘똘 뭉쳐 있다. 신스팝 밴드 뉴 오더는 1987년 당시 신스팝과 정반대의 스타일로 큰 인기를 구가하던 글램록 스타일의 옷을 입혀 누가 봐도 어설픈 연기를 선보인다.


브라이언 드 팔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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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uce Springsteen

Dancing in the Dark

'Dancing in the Dark' 뮤직비디오는 정직하다. 브루스 스프링스틴과 그의 파트너 E 스트리트 밴드가 무대에서 선보이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담은 게 전부다. 현란한 카메라워크와 편집을 자랑하는 브라이언 드 팔마의 연출작이라기엔 이미지 자체는 꽤나 얌전하다. '미국의 상남자' 브루스 스프링스틴이 드럼 리듬에 맞춰 하체를 튕기는 걸 훑어 올라가면서 시작해, 듣기만 해도 긍정적인 에너지가 샘솟는 노래를 관객과 함께 즐기는 풍경이 이어진다. 허구의 요소는 딱 한 가지. 후반부 스프링스틴이 한 관객을 무대로 올라 같이 춤을 추는 대목이다. 이제 막 연예계에 데뷔한 파릇파릇한 신인 시절의 커트니 콕스다. 스프링스틴은 특정 팬을 무대에 올리는 설정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녀가 연예인이라는 건 전혀 몰랐다고 한다.


짐 자무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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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m Waits

I Don't Wanna Grow Up

짐 자무쉬와 톰 웨이츠와의 연은 유구하다. 웨이츠는 자무쉬의 세 번째 영화 <다운 바이 로>(1986)에 주인공 삼인방 중 하나인 잭 역에 캐스팅 된 데 이어 <지상의 밤>(1991)의 영화음악을 맡았고, <커피와 담배>(2003)와 최근작 <데드 돈 다이>(2019)에 다시 그를 배우로 활약했다. 한편 자무쉬는 웨이츠에게 두 개의 뮤직비디오를 선사했다. 전설적인 펑크 밴드 라몬즈의 노래를 리메이크 한 'I Don't Wanna Grow Up' 비디오는 <지상의 밤>이 개봉된 몇 달 뒤 공개됐다. "나는 성장하고 싶지 않아"라는 메시지를 영상으로도 토해내듯, 웨이츠가 어린이용 자전거를 타고 비좁은 공간에 몸을 구겨넣은 채 조막만 한 기타를 치며 특유의 지글대는 목소리로 노래하는 모습을 담았다. 멍하니 보고 있다보면 문득 울컥하게 된다.


라이언 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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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untain Goats

Woke Up New

라이언 존슨이 첫 장편 <브릭>(2005)으로 주목 받고 차기작 <블룸형제 사기단>(2008)을 작업하던 와중에 만든 뮤직비디오. 당시 존슨이 살고 있던 뉴욕의 아파트에서 촬영됐다. 한 공간 안에서 찍었지만 여러 모니터를 활용해 TV 속의 TV에 연속되는 듯한 효과를 만들었다. 바람이 솔솔 부는 듯한 존 다르니엘의 보컬과 기타 소리와 자유로워 보이는 시점 이동이 한없이 가벼운 인상을 남기지만, 사실 촬영 첫날부터 에어컨이 고장나는 바람에 찜통 속에서 작업한 결과물이라고 한다.


가스파 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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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ck Cave & The Bad Seeds

We No Who U R

'쉬운 것'을 만든다면 가스파 노에가 아니다. <돌이킬 수 없는>(2002), <러브>(2015) 등 파격적인 이야기와 그 기괴함을 극대화 하는 이미지로 악명을 떨쳐온 노에는 뮤직비디오 작업에서도 평범한 길을 택하지 않았다. 닉 케이브 앤 배드 시즈가 2012년 발표한 'We No Who U R'의 비디오는 컴컴한 숲속을 홀로 헤매는 듯한 이를 부지런히 따라가는 게 전부다. 그런데 그 사람의 모습이 새까맣게 처리돼 있어 마치 유령을 좇는 듯한 감상을 안긴다. 처음엔 으스스하다가도 이내 편안해지고 "우리는 네가 누군지 알아. 네가 어디에 사는지 알아. 그리고 아무것도 용서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아" 하는 후렴구를 곱씹다 보면 마치 위로 받은 것 같은 기분이 되기도 한다. 닉 케이브는 뮤직비디오를 두고 "아름답고, 오싹하며, 사려깊다"고 평하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팀 버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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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Killers

Bones

해골. 팀 버튼 영화 하면 떠오르는 것 중 하나다. 아마 <크리스마스의 악몽>(1993)과 <유령 신부>(2005) 때문일 것이다. 킬러스의 'Bones' 뮤직비디오는 버튼에게서 그의 해골 애호를 다시 한번 끄집어냈다. 힘찬 락 사운드에 든든한 브라스가 곁들여진 노래와 함께 자동차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연인과 그 영화 속의 해변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연인(모두 마이클 스태거와 데본 아오키가 연기했다)을 따라가다보면 머잖아 그들이 해골이라는 걸 알게 된다. 노래하고 연주하는 킬러스도 점점 해골의 정체를 드러낸다.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로리타>(1962), <아르고 황금 대탐험>(1963), <해양괴물>(1954) 등 고전영화의 흔적도 비디오를 즐기는 재미 중 하나다.


데이빗 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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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 Japan

Longing ~跡切れたmelody~

데이빗 린치는 일본의 메탈 밴드 엑스 재팬의 뮤직비디오도 연출한 바 있다. 밴드가 해산하기 전 마지막 발표한 앨범 <Dahlia>의 싱글 'Longing ~跡切れたmelody~'다. 장엄한 현악 연주에 요시키의 나레이션만이 더해져 엑스 재팬보다는 요시키의 솔로 프로젝트에 가깝다. 마이클 잭슨의 앨범 <Dangerous> 광고에도 자신의 인장을 떡하니 새겨놓았던 데이빗 린치는 이번에도 특유의 몽상적인 이미지들을 동원해 엑스 재팬을 '린치화' 시켰다. 합이 꽤 훌륭해서, 'Longing ~跡切れたmelody~'가 마치 린치의 오랜 음악 파트너 안젤로 바달라멘티가 만든 음악처럼 들린다. 다큐멘터리 <위 아 엑스>(2017)에서 뮤직비디오 촬영 현장을 볼 수 있다.


스파이크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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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 Enemy

Fight the Power

스파이크 리의 걸작 <똑바로 살아라>(1989) 오프닝은 로지 페레스가 퍼블릭 에너미의 'Fight the Power'에 맞춰 몸을 흔드는 모습으로 채워졌다. 1980년대 후반 미국 사회를 뜨겁게 달군 흑인 아티스트의 위대한 협업이라 할 만하다. 스파이크 리는 퍼블릭 에너미의 앨범 <Fear of a Black Planet>의 첫 싱글이기도 한 'Fight the Power'의 뮤직비디오를 연출하기도 했다. 뉴욕 브루클린에서 열린 대규모 집회 현장에서 "권력에 맞서라!" 외치는 퍼블릭 에너미와 수많은 군중들의 모습은 볼 때마다 가슴을 뜨겁게 한다. 정치적으로나 미적으로나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만한 뮤직비디오다.


문동명 / 씨네플레이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