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른다. 당장 다니는 회사에서 사고를 쳐서 잘릴 수도 있고(저는 더 다니고 싶습니다 사장님). 이 배우들도 그렇다.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가, 혹은 감독의 판단으로 촬영 직전이나 촬영 중 하차하게 됐다. 덕분에 새 배우가 찰떡같은 캐릭터를 얻은 경우도 있다. 어떤 배우들이 촬영 전, 촬영 중 하차했는지 만나보자.
나탈리 포트만 ⇒ 클레어 데인즈
<로미오와 줄리엣> (1996)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호흡을 맞출 여배우는 나탈리 포트만이었다. 그러나 촬영에 들어간 이후 비상사태가 발생했는데, 나탈리 포트만이 디카프리오보다 (실제로도 어리지만) 너무 어려 보여서 제작진이 생각한 멜로 분위기가 나지 않았던 것. 당시 디카프리오는 21살이었는데, 포트만은 13살이었다고. 처음부터 로미오는 디카프리오로 고정이었기에 결국 나탈리 포트만 대신 클레어 데인즈가 투입됐다. 참고로 세 사람의 생년은 디카프리오가 1974년, 데인즈가 1979년, 포트만이 1981년이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나탈리 포트만은 이후 <스타워즈> 프리퀄에서 만날 뻔 했지만, 디카프리오가 아나킨 스카이워커 역을 거절하면서 무산됐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 조지 클루니
<그래비티> (2013)
<그래비티>의 맷 코왈스키는 누가 봐도 조지 클루니 같아서 딱 조지 클루니가 어울린다. 하지만 이 배역의 1순위는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였다. 실제로 간단한 촬영까지 거쳤는데, 알폰소 쿠아론은 영화의 기술적인 측면과 즉흥적인 감각이 뛰어난 로버트의 연기적 특징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쿠아론 왈, “이 재능 많은 배우”를 교체해야만 했다. 로버트가 했어도 좋았겠지만, 사실 토니 스타크의 이미지가 워낙 강해서 영화의 몰입을 방해했을 것 같긴 하다. 왠지 뚝딱뚝딱 구조선을 만들 것 같으니까.
니콜 키드만 ⇒ 조디 포스터
<패닉 룸> (2002)
니콜 키드만은 <패닉 룸>의 엄마 역으로 캐스팅돼 18일 정도 촬영을 진행했다. 하지만 이내 스스로 영화에서 하차했다. <패닉 룸> 전에 촬영한 <물랑루즈> 현장에서 무릎을 다쳤는데,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채 <패닉 룸>에 투입된 것. 자신의 무릎 상태가 점점 악화되면서 니콜 키드만은 하차했고, 그 자리를 조디 포스터가 대신했다. 데이비드 핀처 감독은 조디 포스터가 1순위였으나 조디 포스터는 <플로라 플럼>이란 영화를 준비 중이어서 캐스팅을 못했다. 그런데 니콜 키드만의 하차 직전, <플로라 플럼>도 러셀 크로우의 부상으로 제작이 중지된 상태였다. 그래서 핀처는 니콜 키드만의 빈자리를 원래 캐스팅하고 싶었던 조디 포스터로 자연스럽게 교체할 수 있었다. 니콜 키드만은 대신 멕의 남편의 여자친구 목소리 역으로 카메오 출연했다.
라이언 고슬링 ⇒ 마크 월버그
<러블리 본즈> (2009)
라이언 고슬링은 너무 열정적이었다. 노력의 대가로 촬영 직전 영화에서 물러나야 했다. <러블리 본즈>의 잭 샐몬 역을 맡은 라이언 고슬링은 이 배역을 위해 살을 찌웠다. 인터뷰에 따르면 라이언 고슬링은 잭 샐몬을 “210 파운드(약 95kg)로 상상했다” 하니 그와 비슷하게 살을 찌웠을 듯하다. 문제는 본인 혼자 고민하고 행동했다는 것. 피터 잭슨은 몸을 불린 라이언 고슬링이 촬영장으로 들어서자 당황했고, 두 사람은 합의하에 배우 교체를 결정했다. <러블리 본즈>의 각본가 프랜 월시는 라이언 고슬링이 “내가 캐릭터에 비해 너무 어리다”고 여러 번 말했다고 회상했다. 결국 배역은 마크 월버그에게 돌아갔다.
사만다 모튼 ⇒ 스칼렛 요한슨
<그녀> (2013)
<그녀>의 인공지능 OS 사만다. 스칼렛 요한슨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매력적인 캐릭터지만, 사실 원래 주인은 사만다 모튼이었다. 촬영을 끝내고 사만다 모튼이 더빙 작업을 하던 도중, 스파이크 존스 감독은 불현듯 ‘이 목소리는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가 사랑에 빠질 만한 목소리가 아니다’라고 느껴 스칼렛 요한슨으로 더빙 배우를 교체했다. 덕분에 사만다 모튼은 인공지능에게 이름만 물려준 채 영화 속에서 만날 수 없게 됐다.
스튜어트 타운센드 ⇒ 비고 모텐슨
<반지의 제왕> 시리즈 (2001~2003)
촬영 도중 ‘너무 젊어서’란 이유로 해고되면 기쁠까, 슬플까. 스튜어트 타운센드는 <반지의 제왕> 아라곤 역으로 캐스팅돼 촬영까지 진행했다. 그는 당시 트레이닝과 자료 조사 등 두 달 가량을 배역을 준비하며 보냈다. 촬영 4일째 되는 날, 피터 잭슨은 아라곤이 너무 젊다는 것 때문에 불안해졌다. 그래서 피터 잭슨은 스튜어트 타운센드 대신 비고 모테슨을 아라곤 역으로 데려와 촬영을 진행했다. 참고로 비고 모텐슨은 1958년생, 스튜어트 타운센드는 1972년생으로 14살 차이다. 위의 이미지는 각각 2011년, 2001년 당시 사진이다.
제임스 퓨어포이 ⇒ 휴고 위빙
<브이 포 벤데타> (2005)
억울함이라면 이쪽도 만만치 않다. 가면을 쓴 배역인데 해고된다면 기분이 어땠을까. 제임스 퓨어포이는 <브이 포 벤데타>의 브이(V)로 촬영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작에 참여한 워쇼스키 자매(당시 형제)는 그의 목소리가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아서 배우 교체를 결심했다. 그래서 제임스 퓨어포이 대신 투입된 사람은 휴고 위빙. 제임스 퓨어포이나 그의 팬들에겐 안타까운 소식이지만 대다수 영화 팬들은 <매트릭스>의 감독과 배우가 다시 만났다는 점에 더 열광했다. 중도 교체로 휴고 위빙은 제임스 퓨어포이가 촬영한 분량 중 일부를 다시 연기했으며 브이의 모든 대사를 녹음했다.
앤 해서웨이 ⇒ 캐서린 헤이글
<사고친 후에> (2007)
앤 해서웨이는 <사고친 후에> 앨리슨 역으로 캐스팅됐다. 앨리슨은 하룻밤을 보낸 벤 스톤(세스 로건)의 아이를 임신하고, 나중에 벤과 함께 아이를 낳기로 결심한다. 주드 아패토우 감독은 극중 출산 장면에서 앨리슨의 질이 나와야 출산의 고통을 정확하게 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앤 해서웨이는 이 장면이 영화에 불필요하다고 느꼈다. 당시 대역을 쓰는 걸로 돼있었음에도 앤 해서웨이는 이 장면이 필요 없다고 의견을 밝혔고, 주드 아패토우 감독과 논의한 끝에 하차하기로 결심했다. 앨리슨 역은 캐서린 헤이글로 대체됐으며, 영화는 현지에서 호평을 받았다.
케빈 스페이시 ⇒ 크리스토퍼 플러머
<올 더 머니> (2017)
대형사고였다. 케빈 스페이시는 <하우스 오브 카드> 새 시즌 촬영과 <올 더 머니> 개봉을 앞두고 성추행 행위를 폭로당했다. 사건의 진위와 별개로 <올 더 머니>는 개봉을 두 달 남짓 앞둔 상황에서 결정을 내려야 했다. 케빈 스페이시를 자를 것이냐, 아니면 그냥 이 상태로 개봉할 것이냐. 리들리 스콧 감독은 11월 9일, 케빈 스페이시 출연 분량을 모두 삭제하고 재촬영을 진행한다고 밝혔다. 케빈 스페이시가 맡은 진 폴 게티 역으로 투입된 배우는 캐스팅 후보였던 크리스토퍼 플러머. 재촬영 준비 기간은 1주일, 재촬영 기간은 2주. 크리스토퍼 플러머에 주어진 시간은 3주에 불과했지만, 영화를 본 관객들은 대배우의 진면목을 만끽할 수 있는 명연기를 목격할 수 있었다. 사실 진 폴 게티의 나이에 어울리는 것도 케빈 스페이시(촬영 당시 특수분장으로 더 나이 들어 보이게 했다)보다 크리스토퍼 플러머였으니, 그야말로 전화위복이라 할 수 있다.
크리스찬 베일 ⇒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 크리스찬 베일
<아메리칸 싸이코> (2000)
<아메리칸 싸이코>는 크리스찬 베일을 ’아역 출신 배우’라는 타이틀을 떼게 만들어줬다. 그의 귀티 나는 자태를 관객들이 지금까지 기억할 만큼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줬으니까. 하지만 이 배역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에게 돌아갈 뻔했다. 크리스찬 베일이 캐스팅된 상태에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이 영화에 관심을 보이자 제작진은 크리스찬 베일을 해고했다. 메리 해론 감독도 크리스찬 베일을 써야 한다고 버티다가 함께 해고됐다. 하지만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팬들은 <아메리칸 싸이코> 출연은 그가 가진 로맨틱한 이미지를 완전히 붕괴시킬 거라고 반발했고, 결국 디카프리오도 출연을 고사했다. 크리스찬 베일과 메리 해론은 디카프리오의 결정에 따라 복귀할 수 있었고, 지금 우리가 기억하는 <아메리칸 싸이코>를 탄생했다.
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