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 자무쉬의 최신작이자 첫 좀비영화 <데드 돈 다이>의 개봉을 기념하며, 그의 작품 중 선곡 센스가 가장 빛나는 <브로큰 플라워> 속 음악들을 소개한다. 영화에 주요하게 쓰인 에티오피아 뮤지션 물라투 아스탓케의 음악들은 푹푹 찌는 여름에 듣기에도 아주 그만이다.


There is an End

The Greenhornes & Holly Golightly

제작사 포커스 피처스의 로고 위로 타자기 소리가 들리고, 곧 그린혼스의 'There is an End'와 함께 분홍색 편지 봉투를 파랑 우체통에 집어넣는 게 보인다. 카메라는 편지의 발신인을 비추는 대신, 분홍색 봉투가 우편 시스템을 통해 여기저기를 떠도는 모습이 유려하게 흘러간다. 가벼운 리듬이 넘실대는 가운데 홀리 골라이틀리의 우아한 목소리가 빈티지틱한 분위기(언뜻 60년대 밴드처럼 들리지만 사실 2002년에 처음 발표된 노래다)를 더하는 'There is an End'는 무미한 흰 봉투들 틈에 끼어 제 갈 길을 가고 있는 분홍 편지의 여정을 보다 특별하게 보이도록 한다. 그 과정을 한참 보여주고 비행기를 탔다는 것까지 보여주고 난 후에야 푸른 기운이 전혀 없는 하늘 위로 오프닝 크레딧이 시작한다. 음악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끝이 있다"는 제목을 단 노래는 영화의 엔딩을 장식하기도 한다.


El Bang Bang

Jackie Mittoo

"장 으스타쉬에게 바칩니다"를 마지막으로 오프닝이 끝나면, 드디어 편지가 도착한다. 새소리가 잔뜩 들리는 동네엔 넉넉하게 햇빛이 쏟아지고, 곧 재키 미투의 'El Bang Bang'이 빵빵하게 울리는 집을 지나간다. 높게 치솟는 피아노를 따라 베이스와 브라스가 쿵짝쿵짝 뒤섞이는 레게 리듬과 함께, 아담한 집 앞에서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다. 혹시 여기가 편지의 도착지? 우체부는 거길 슥 지나친다. 그의 동선에 따라 'El Bang Bang'은 멀어지고, 꽤나 고급스러운 집 앞에 서면 새소리만 떠돈다. 몇 초 전의 풍경 때문인지, 아무 소리도 새어나오지 않는 이 집이 유독 적막해 보인다. 편지는 그 곳에 안착한다. 그리고 집보다 더 적막한 얼굴을 하고 멀뚱히 TV를 보고 있는 주인공 돈 존스톤을 보인다. 음악이 <브로큰 플라워>에 특정한 정서를 뚜렷하게 부여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는 듯한 사운드디자인이 돋보이는 신이다. 돈의 애인 셰리(줄리 델피)는 화목한 옆집 윈스턴(제프리 라이트) 좀 본받으라고 쏴붙이며 그의 집을 떠난다.


Requiem, Op. 48 (Pie Jesu)

Oxford Camerata

꿈에도 몰랐던 아들이 당신을 찾아가고 있다는 옛 애인의 편지를 윈스턴에게 읽어준 돈은, 집에 돌아와 불은 죄다 꺼놓고 가브리엘 포레의 '레퀴엠'을 듣는다. 방금까지 멀쩡한 것처럼 굴다가 (그는 처음부터 안 괜찮았는데 빌 머레이의 무표정 때문에 오해한 걸까?) 혼자 집에서 '센치'해져서 이 숭고한 음악을 듣는 모습은 측은하기보다는 헛웃음부터 픽 터진다. 더군다나 그 순간 흐르는 대목은 4악장 '자비로운 예수'다. 날벼락 같은 소식을 듣고는 방탕하게 살아온 과거를 저 하늘에 속죄라도 하고 싶은 건지. 옥스포드 카마라타가 연주하는 진혼곡을 들으며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이 남자의 의지는 머지 않아 끊긴다. 아무렇지 않게 집에 들어온 윈스턴은 대뜸 " 뭐가 이리 우울해? 하며 볼륨을 줄이곤 시덥잖은 소리를 늘어놓는다.


Yèkèrmo Sèw

Mulatu Astatke

씨알도 안 먹힐 분석을 쏟아내던 윈스턴은 "내가 구워준 뻑 가는 CD는 어쨌어?" 하면서 음악을 바꾼다. 윈스턴이 거실 한가운데 초상화까지 걸어놓는 에티오피아 아티스트 물라투 아스탓케의 음악이 처음 등장하는 순간이다. 비실비실 흐느적대는 브라스, 깊은 공명을 만드는 베이스, 잘게 쪼개져 흩뿌려지는 타악기 비트가 어우러지는 아스탓케의 명곡 'Yèkèrmo Sèw'(경험과 지혜의 사나이)은 영 불편한 심기에도 고개를 까닥대는 돈뿐만 아니라 영화 바깥의 관객들까지 사로잡는다. "에티오피아 사운드는 심장에 좋아!" 윈스턴의 감탄에 찬성할 수밖에. 이후 물라투 아스탓케의 음악들은 돈의 기분에 알맞게 번갈아가며 <브로큰 플라워> 내내 줄기차게 출몰한다. 90년대 후반 재조명되기 시작해 아프리칸 음악 마니아들에게 이름을 알리던 아스탓케는 <브로큰 플라워> 덕분에 세계적인 인기를 누렸다.


I Want You

Marvin Gaye

자기 제안대로 옛 애인들을 나열한 돈의 리스트를 받아든 윈스턴은, 그들을 차례대로 방문하는 여정을 완성해 돈에게 보여준다. 비행편은 물론 호텔, 렌트카까지 싹 다. 돈은 윈스턴의 오지랖 넓은 탐정 행세에 학을 떼고 절대 안 갈 거라고 말한다. 그리고 돈은 불 꺼진 집에서 마빈 게이의 'I Want You'를 듣고 있다. 퍼커션 소리만으로도 사타구니 쪽이 저려오는 듯한 이 '베이비 메이킹 뮤직'을 틀어놓고 마시다 만 모에 샹동을 멀뚱히 바라보는 중년의 사내라니. 그렇게 처량맞아 보일 수가 없다. 그래도 포레의 '레퀴엠'을 듣던 날보단 훨씬 나아 보이기 때문일까, 우리는 'I Want You'가 끝나면 돈이 옛 애인을 찾아떠나는 여행을 시작할 거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게 된다. 그렇게 1분 20초가 지나면, 존은 공항에 앉아 있다. 다리를 벌리고 두 손을 모은 채 'I Want You'를 듣던 자세는 그대로다.


Gubelye

Mulatu Astatke

가운데 좌석에 낑겨 비행 하고, 여자 애들이 랩처럼 수다를 떠는 버스 안에서 "캘빈 클라인 모델처럼 생긴" 남자를 쟤가 혹시 내 아들인가 싶은 얼굴로 쳐다본 뒤, 돈은 드디어 렌트카에 몸을 싣는다. 윈스턴이 새로 구워준 CD를 틀자마자 물라투 아스탓케의 'Gubelye'(나의 구벨)가 나온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나왔던 'Yèkèrmo Sèw'와 'Yègellé Tezeta'(나만의 기억)와는 사뭇 다른, 끈적한 분위기의 재즈다. 여정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음악치고는 영 기운이 빠지는 게, 기대보다는 불안이 앞서는 돈의 심정 같이 들린다. 돈의 시선에 비치는 풍경들이 확확 바뀌는데 음악은 그대로다. 이렇게 자주 듣는 것보면 돈은 물라투 아스탓케를 꽤나 좋아하게 된 것 같다.


"Not If You Were the Last Dandy on Earth!"

The Brian Jonestown Massacre

첫 행선지는 로라(샤론 스톤)의 집이다. 분홍색의 단서를 찾으려던 돈을 짙은 분홍 목욕가운을 입은 로라의 딸이 맞이한다. 이름이 하필 로리타라고. 그 얘길 듣자마자 집에서 플레이 되던 브라운 존스타운 매서커의 '"Not If You Were the Last Dandy on Earth!"'가 갑자기 크게 들리는 것 같다. 괜히 야릇한 웃음을 흘리던 로리타가 제 방으로 들어가자 돈은 집 안에서 분홍색 물건들을 찾는다. 카레이서인 로라의 남편의 흔적들만 눈에 띈다. 아니, 차라리 돈은 로라보다는 그녀의 남편이 누구인가에 더 집중하고 있는 것 같다. 어느새 음악 볼륨은 점점 커져 괜히 긴장이 더해지던 가운데, 집에서 발견한 유일한 분홍인 휴대폰이 울리면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로리타가 돈 앞에 나타난다.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문밖을 나서면 로라가 도착한다.


Dreams

The Allman Brothers Band

여정의 첫 밤. 돈은 로라, 로리타와 함께 와인을 마시고 있다. 블루스 록 밴드 올맨 브라더스 밴드의 초기작 'Dreams'가 자그맣게 울리는 공간은 꽤나 평화롭다 못해 약간 루즈하다. 그녀의 남편은 레이스 중 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로라가 옷장정리 프리랜서라는 걸 알게 된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끼리 나눌 수 있는 흔한 대화. 여자 만나는 데엔 선수였던 돈 답게 능수능란한 말빨로 두 모녀에게 웃음을 준다. 올맨 브라더스 밴드의 'Dreams'은 바로 전 시퀀스에 나온 브라운 존스타운 매서커의 트랙처럼 음량에 변화가 가해지진 않지만, 7분이 넘는 대곡답게 밴드의 전매특허인 사이키델릭한 기타 솔로가 더해지면서, 이 느슨한 술자리가 결국 잠자리로 이어질 것이라는 예감을 심는다. 다음날 아침 돈과 로라는 한 침대에서 깬다. 로라는 어제 로리타가 입고 있던 분홍색 가운을, 로리타는 분홍색 비키니를 입고 돈에게 손을 흔든다.


Dopesmoker

Sleep

로라와의 만남은 꽤 괜찮았지만, 그 이후의 만남들은 그다지 유쾌하지 못하다. 부동산으로 돈을 번 도라(프랜시스 콘로이)를 찾아갔을 땐 그녀의 남편이 나타나 은근히 신경을 긁었고, 동물 의사소통사가 된 카멘(제시카 랭)은 도인 같은 말을 잔뜩 늘어놓다가 예약 손님이 있다는 핑계로 거의 돈을 쫓아내다시피 한다. 그 사이 물라투 아스타켓의 트랙들이 재차 등장하지만, 점점 나쁘게 기울어지는 기분 탓인지 그마저도 침울하게만 들린다. 한창 길을 헤매서 도착한 페니(틸다 스윈튼)의 집. 개는 사납게 짖어대고, 우람한 오토바이가 모인 창고에서는 둠메탈 밴드 슬립이 1999년 발표한 63분(!)의 대곡 'Dopesmoker'에 새어나온다. 불길하지만, 창고에서 나온 두 사내는 순순히 페니가 있는 곳을 가르쳐준다. 'Dopesmoker'도 점점 사라져 새소리만 남는다. 허나 이게 웬걸. 페니는 돈을 보자마자 이게 무슨 개수작이냐며 그를 문전박대 한다. 될대로 돼라는 식으로 돈이 "혹시 아들이 있어?" 묻자 페니는 그를 밀쳐낸다. 창고의 사내들에게 흠씬 얻어맞은 뒤에 돈은 더 이상 차에서 음악을 듣지 않는다. 그가 마지막으로 향하는 곳은 미셸의 묘지다.


Ethanopium

Dengue Fever

돈은 분홍색 편지를 보낸 애인이 누구고, 그의 아들이 누구인지도 알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온다. 떠나기 전까지 활짝 폈던 분홍 장미가 말라 비틀어진 집에서 아무 음악도 듣지 않는다. 단골 식당에서 윈스턴을 만나 그간의 이야기를 전한 돈은 바깥에서 어젯밤 공항 앞에서 만난 청년을 발견하고 호의를 베푼다. 왜? 아들일지도 모르니까. 속내를 숨긴 채 대화를 나누다가 돈이 아버지에 대해 묻고 청년은 곤란하다는 듯 자리를 뜨려고 하자, 그를 붙잡고는 대뜸 "내가 네 아버지라고 생각하는 거 다 알아"라고 내뱉는다. 도망치는 사내를 허탈하게 바라보던 돈은 어디선가 많이 듣던 리듬을 빵빵 틀어놓고 다가오는 차를 보고, 누가 봐도 아들이라고 믿을 법한 남자(빌 머레이의 실제 아들이 연기했다)와 눈을 마주친다. 그 차에서 나오는 음악은 196-70년대 캄보디아의 팝과 사이키델릭 록을 접목한 음악을 선보이는 밴드 뎅기 피버의 'Ethanopium', 물라투 아스탓케의 'Yègellé Tezeta'를 리메이크 한 곡이다. 한껏 피치를 올린 신디사이저 때문에 원곡엔 없던 경망스러움이 먼저 들리는 'Ethanopium' 때문에 돈이 며칠간 지나온 여정의 마지막이 (좋은 의미로) 어정쩡하게 남는다.


문동명 / 씨네플레이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