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대들: 풍문조작단>

모름지기 사극은 진지해야 했다. MBC에서 1983년부터 1990년까지 방영한 대하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처럼 말이다. <조선왕조 오백년>을 모르는 이들이 많을 듯하니 다른 예를 들어보자. 김명민이 이순신 장군을 연기한 104부작 <불멸의 이순신>이 정통 사극의 계보에 있다. 새로 등장한 인물의 이름이 자막으로 나오는 정통 사극은 다큐멘터리 같기도 하다. 역사적 사실을 기반하고 창작자의 상상력은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한다. 정통 사극의 반대쪽에 있는 것이 팩션 사극, 퓨전 사극이다. 8월 21일 개봉한 <광대들: 풍문조작단> 개봉에 맞춰 2000년 이후 등장한 퓨전 사극의 계보를 알아보자. 퓨전 사극과 구분 되는 팩션 사극은 특별히 언급하지 않았음을 밝힌다.


<혈의 누>

<혈의 누>|추리물+사극

“아서 코난 도일이나 애거서 크리스티, 반 다인, 앨러리 퀸 등의 추리소설에 매료된 사람들은 쉽게 외면하기 힘들 영화다.” 2005년 <혈의 누> 개봉 당시 영화주간지 ‘씨네21’에 실린 리뷰의 일부 문장을 가져와봤다. 인용한 것처럼 <혈의 누>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추리물이다. 19세기말, 제지업을 기반으로 한 외딴 섬에서 일어난 사살인사건을 다룬다. <혈의 누> 이후 추리물과 사극의 결합은 빈번하게 만들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작품이 <조선명탐정> 시리즈다. 이 시리즈는 추리, 수사물과 사극의 만남에 코미디 요소까지 듬뿍 끼얹은 3중 퓨전 사극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밖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임금님의 사건 수첩> 등도 추리물과 결합한 사극이다.

사실 수사물과 결합한 사극은 2003년 MBC에서 방영한 <다모>가 <혈의 누>보다 먼저였다. <조선 과학수사대 별순검> 같은 드라마도 제작됐다.


<황산벌>

<황산벌>|코미디+사극

이준익 감독은 사극을 잘 만드는 걸로 유명하다. <왕의 남자>로 천만 관객을 동원했다. <왕의 남자> 이전에는 <황산벌>이 있었다. <황산벌>은 코미디를 사극에 접목시킨 영화다. 여기서 핵심은 사투리다. 그 전까지 사극에서 사투리를 들을 수 없었다. 신라의 김유신도, 백제의 계백도 모두 표준어를 사용했다. 어떻게 보면 사소한 건지 모를 이 아이디어는 크게 새로워 보이지 않은 코미디 장르와 사극의 만남에 큰 시너지를 만들어냈다.

사극과 코미디의 만남은 가장 쉬운 퓨전의 사례다. 2003년 개봉한 윤제균 감독의 <낭만자객>도 이 계보에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대다수의 퓨전 사극은 코미디를 기반으로 한다. 위에서 언급한 <조선명탐정> 시리즈가 모범 사례다.


<스캔들 - 조선남녀상열지사>

<스캔들 - 조선남녀상열지사>|해외 소설(영화)+사극

<스캔들 - 조선남녀상열지사>(이하 <스캔들>)가 왜 퓨전인지 의아해할 지 모르겠다. 배용준, 이미숙, 전도연이 출연한 이 영화는 프랑스 작가 피에르 쇼데를로 드 라클로의 소설 <위험한 관계>가 원작이다. 할리우드에서도 여러 차례 영화로 만들어진 적이 있는 이 소설은 당연하게도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스캔들>은 퓨전의 요소를 갖고 있다. 동서양의 만남이라는 측면으로만 본다면 라이스버거 같다고 할까.

<스캔들>의 계보를 잇는 영화로 <조선미녀삼총사>가 있다. <조선미녀삼총사>는 제목부터 <미녀삼총사>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고 밝히고 있다. <광해, 왕이 된 남자>, <나는 왕이로소이다> 등도 느슨하지만 이 계보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두 영화 모두 1인 2역 캐릭터가 등장한다. 마크 트웨인의 소설 <왕자와 거지>가 모티브가 된다.


<천군>

<천군>(2005)|시간여행+사극

<천군>은 꽤 야심찬 사극이다. 남과 북의 병사가 조선시대로 시간여행을 하게 되면서 청년 이순신(박중훈)을 만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16세기 여진족의 공격을 현대식 무기로 막아내는 액션도 독특하고 재미난 볼거리다. <천군>은 퓨전 사극의 요소를 충실히 갖고 있는 영화지만 흥행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런지 드라마에서 수없이 많이 등장한 시간여행 사극이 영화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들다. 참고로 시간여행과 접목한 퓨전 사극 드라마로는 2000년 <천년지애>가 그 시작인 듯하다. 이후 <인현왕후의 남자>, <사임당 빛의 일기>, <명불허전>, <달의 연인 - 보보경심 려>, <옥탑방 왕세자> 등이 방영됐다.


<전설의 고향>

<전설의 고향>|공포+사극

<전설의 고향>은 고전이라 불릴 만한 TV드라마다. 2007년 개봉한 동명의 영화는 과거 TV 드라마의 영광을 등에 업고 나왔다. 영화 <전설의 고향>이 공포 사극 계보의 시작은 아니지만 2000년 이후 계보를 살펴본다는 전제를 감안하면 충분히 주목해볼 만한 영화다. 다만 이 영화의 파급력은 크지 못했다. 이후 공포 사극 계보에서 <여곡성>이 나왔다. <여곡성>의 전략도 <전설의 고향>과 유사했다. 1986년의 동명 원작의 리메이크로 등장했다. <여곡성> 역시 <전설의 고향>처럼 크게 주목 받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과거 1980년대 공포 사극의 계보를 잇는 작품이 나올 때가 된 듯하다.


<창궐>

<창궐>(2018)|좀비물+사극

좀비가 본격적으로 국내 영화에 등장한 건 그렇게 오래 되지 않았다. 상업영화로서 좀비물이 성공한 건 2016년 개봉한 <부산행>이 처음이었다. <부산행>의 큰 성공은 B급 영화의 장르로 취급되던 좀비물과 사극과의 만남을 가능하게 했다. 그렇게 등장한 영화가 <창궐>이다.<창궐>과 함께 언급해야 할 드라마가 있다. 넷플릭스에서 제작한 <킹덤>이다. 2019년 엑소시즘, 구마의식 등을 소재로 한 <사바하>, <사자>, <변신> 등이 개봉했다. 이런 추세라면 마이너한 장르이던 좀비물이 이어서 조만간 엑소시즘이 결합한 사극도 나오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물괴>

<물괴>(2018)|괴수물+사극

<창궐>과 함께 <물괴>는 퓨전 사극의 새 시도라는 점에서는 칭찬할 만하다. <물괴>는 괴수물과 사극의 결합이다. 이 말을 다르게 풀어보자면 쉽게 제작하기 힘든 영화라는 뜻이 된다. 쉽게 말해 제작비가 많이 든다는 소리다. 사극 세트, 의상에 괴수 CG작업까지 추가될 테니 돈 들어갈 일 투성이다. 이런 사정을 감안한다면 <물괴>는 분명 야심찬 도전이었다. 비록 관객들에게 냉정한 평가를 받았지만 말이다. 흥행 성적과 별도로 <창궐>과 <물괴>는 새로운 계보의 첫 줄에 있다는 점에서 점수를 받을 수 있겠다.


퓨전 사극의 몇 가지 계보를 살펴봤다. 퓨전 사극은 정통 사극의 반대급부로 시작됐을 것이다. 서두에 언급한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의 경우, 아무래도 30~40대 이상 시청자가 10~20대보다 많았다. 젊은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모으려면 좀더 가볍고 경쾌한 사극을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가만 생각해보면 사극과 만날 수 있는 소재, 장르는 무한하다. 코미디는 기본이고 액션, 미스터리, 공포 등 뭐든 접목시킬 수 있다. 계보의 첫 줄에 있는 작품들은 참신함으로 이목을 끌 수 있다. 다만 일부 실패 사례는 분명 검토해 봐야 할 듯하다. 퓨전 사극의 흥행 분석은 아래 포스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씨네플레이 신두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