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다양성영화의 대세는 다큐멘터리다. 다양한 주제와 톤의 예술/역사 관련 다큐멘터리들이 매주 한두 편씩 개봉해 <변신>, <분노의 질주: 홉스 앤 쇼>, <엑시트> 등이 장악한 극장가에서 꽤 많은 관객들을 만나고 있다. 지금 상영 중인 다큐멘터리들이 다루는 대상에 관한 간단한 설명을 '예습 차원에서' 덧붙였다.


<김복동>

김복동

“군인들에게 끌려다닐 때 나는 나를 찾지 않았어. 해방되고 다들 나를 찾을 때도 나만 나를 찾지 않았어. 나 없이 살았어, 나 없이. (...) 그래도 나를 찾고 싶었어. 예순 두 살에 나를 찾으려고 신고했어.” (증언집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 中) 1991년 8월 14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 선생이 피해 사실을 최초 공개 증언한 지 7개월, 1926년생의 김복동 선생 역시 피해를 밝히면서 활동을 시작해 그해 여름 제1회 정신대문제 아시아 연대회의에서 피해 사실을 알렸다. (당시 증언 육성 파일은 영화 <김복동>에서 최초 공개됐다) 이후 세계 곳곳에서 많은 여성의 피해 사실이 터져 나왔고, '위안부' 문제는 전 세계적 인권 문제로 주목받았다. 1993년 6년 비엔나에서 열린 UN 세계 인권대회를 시작으로 미국, 유럽, 일본 등에서 증언을 이어나갔다.

1993년 비엔나 UN세계인권대회

한동안 고향 부산으로 내려가 칩거하던 김복동 선생은 여든 다섯이 되던 2010년 다시 돌아와 수요시위, 국내외 평화의 소녀상 건립행사를 비롯, 세계를 다니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진상을 알렸다. 오랜 세월을 '평화'를 외치는 데에 바쳤던 선생은 동일본 대지진 피해자 돕기 모금을 제안해 1호로 기부하고 전쟁 지역의 성폭력 피해자와 아이들, 포항 지진 피해자 돕기에도 후원했다. 작년엔 대장암을 투병하면서도 고교 무상화 교육 대상에서 제외된 교토의 재일 조선학교를 방문해 5천만 원을 기부하기도 했다. 평생 그토록 바라던 일본의 사과를 듣지 못한 채 지난 1월 28일 세상을 떠난 김복동 선생은 위안부 피해자 54명이 안장된 천안 망향의 동산에 잠들었다. 현재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240명 중 생존자는 20명뿐이다.


<호크니>

데이비드 호크니

영국 아티스트 데이비드 호크니는 <예술가의 초상>이 작년 11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1020억원에 낙찰되면서 "세계에서 가장 비싼 화가"라는 수식을 얻었다. 런던 왕립예술대학을 공부한 그는 26세에 첫 전시를 열었고, 테이트미술관이 그의 작품을 매입하면서 성공 가도를 달렸다. 일찌감치 게이로서 정체성을 밝힌 호크니는 보수적인 영국을 떠나 자유분방한 로스엔젤레스를 만끽하면서 선명한 색채와 기하학적인 구도가 돋보이는 <더 큰 첨벙>을 비롯한 평온과 관능이 동시에 배어 있는 수영장 연작들로 '더 큰 명성'을 얻었다.

더 큰 첨벙

클라크 부부와 퍼시

70년대 들어선 구조적 이미지보단 인물 초상 작업에 열을 올렸다. 인물의 인상을 그대로 화폭에 옮길 뿐만 아니라 그들이 자리한 공간과의 관계에서 피어나는 긴장까지 담아내는 경지를 보여줬다. 이 시기에 그린 <클라크 부부와 퍼시>와 <나의 부모님> 역시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특정한 피사체를 여러 구도로 찍은 폴라로이드를 활용한 포토 콜라주 작업을 이어가는 등 이미지에 대한 탐구와 도전을 늦추지 않았던 그는 새로운 스타일들을 시도하면서 여든을 넘긴 현재까지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피어블라섬 고속도로 #1

4개의 파랑 스툴


<이타미 준의 바다>

이타미 준

유동룡이라는 본명의 재일 한국인 건축가 이타미 준의 이름은, 그가 처음 이용한 공항인 오사카의 '이타미'와 절친한 작곡가 길옥윤의 예명 요시야 준에서 '준'을 따와 만든 것이다. 평생 귀화를 거부하고, "자유로운 국제인으로서의 건축가가 되자"는 의지가 이름에서부터 전해진다. 첨단 기술과 신소재를 내세운 또래의 건축가들과 달리, 틈틈이 한국을 찾아 건축, 민화, 공예에 심취(훗날 그는 조선의 고미술을 수집해 방대한 콜렉션을 구축했다)했던 이타미 준은 이우환, 곽인식 등의 예술가와 교류하면서 사물과 공간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했다. 돌과 바람, 나무, 흙, 물 등 자연적 소재에 관심을 둔 그의 초기작은 야성미와 따스함을 동시에 끌어안았다.

제주도의 수.풍.석 박물관

80년대와 90년대엔 "토착 재료를 사용해서 그 땅이 지닌 오래된 가치를 오늘날 부활시켜야 한다"는 뜻으로 돌을 적극 사용해 홋카이도의 <석채의 교회>, 도쿄의 <엠 빌딩>, 서울의 <각인의 탑> 등을 작업했다. 그리고 유년시절을 보낸 시즈오카처럼 바다를 면하고 있는 제주도에서 <포도호텔>, <수.풍.석 박물관>(<이타미 준의 바다>를 연출한 정다운 감독은 <수.풍.석 박물관>에서 받은 인상으로부터 이타미 준에게 천착하게 됐다), <방주교회> 등 말년의 걸작들을 쏟아냈다. 이 작업들은 평단의 주목을 받으면서 이타미 준에게 무라노 도고 건축상, 김수근 건축상 등 수상의 영예를 안겨주었고, 프랑스 국립 기메 박물관에서 생존 건축가 최초로 개인전을 열어 프랑스 정부로부터 문화예술 공로훈장을 받았다.

제주도의 포도호텔

홋카이도의 석채의 교회 / 도쿄의 먹의 공간

온양민속박물관


<블루노트 레코드>

블루노트

(왼쪽부터) 알프레드 라이온, 덱스터 고든, 프란시스 울프

미국에서 탄생한 음악인 재즈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게 손꼽히는 레이블 블루노트는 나치의 유태인 탄압을 피해 뉴욕에 정착한 독일인 알프레드 라이온이 1939년 설립했다. 라이온은 그 이듬해 어릴 적 친구인 사진가 프란시스 울프와 함께 회사를 이끌면서, 뮤지션에게 재정/창작적으로 넉넉한 프로듀서로 재즈계의 실력자들에게 이름을 알렸다. 리 모건, 행크 모블리, 소니 클락, 케니 버렐, 폴 챔버스, 도날드 버드, 허비 행콕 등 훗날 거장이 되는 이 블루노트를 통해 데뷔했고 아트 블레이키, 호레이스 실버 등이 기록한 히트에 힘입어 50년대 말 60년대 초 하드밥의 전성기를 수놓았다.

레이드 마일스가 디자인 한 블루노트 앨범 커버

블루노트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디자이너 레이드 마일스, 레코딩 엔지니어 루디 반 겔더다. 프란시스 울프가 녹음 당시 틈틈이 촬영한 사진 위에 호탕하고 도전적인 타이포그래피와 컬러를 얹은 마일스 특유의 앨범 디자인은 커버 아트의 신기원을 열었다. 색소포니스트 길 멜의 소개로 1953년 블루노트에 합류한 루디 반 겔더는 가정집 거실을 스튜디오로 사용해 공간의 공명을 적극 활용한 입체적인 사운드로 뮤지션들의 명연을 더욱 빛냈다. 이따금씩 흥행을 기록하긴 했지만 '독립' 레이블의 한계(블루노트가 재즈의 금자탑 마일스 데이비스와 존 콜트레인의 앨범을 각각 3개, 1개의 앨범밖에 발매하지 못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를 극복하지 못하고 1965년 리버티 레코드에 매각되면서 전성기를 마친다. 컬럼비아, 엘렉트라 등 대형 레이블에서 경력을 쌓은 브루스 룬드발이 1985년 블루노트를 이어 받아 노라 존스, US3의 데뷔 앨범이 큰 성공을 거두었다.


<디터 람스>

디터 람스

디터 람스는 애플의 조너선 아이브스, 무인양품의 후카사와 나오토, 그리고 재스퍼 모리슨까지 미니멀 디자인의 대가들이 입을 모아 경외를 바치는 디자이너다. 대학에서 건축과 인테리어 디자인을 공부한 람스는 졸업 후 2년간 건축가 오토 아펠의 사무실에서 근무하다가 1955년 생활가전 기업 브라운으로 적을 옮겼다. 건축/인테리어 부서에 입사한 그는 울름조형대학의 한스 구겔로트의 지도 아래 제품 디자인을 시작해, 첫 제품 디자인인 라디오/오디오 SK4부터 폭발적인 반응을 얻게 됐다.1961년 수석 디자이너가 되어 1995년까지 자리를 지키면서 팀별로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시스템을 구축해 브라운의 혁신을 이끌었다. 임원 자리에 올라 기업 경영 일선에도 참여한 바 있다.

람스는 건축가 패터 베렌스의 "더 적은 것이 더 많은 것"이라는 말을 따라, 단순한 디자인이야말로 진정한 미의 실천이라고 여겼다. 또한 디자인은 유행에 따라 제품을 장식하는 '스타일링'이 아닌, 제품의 모든 기능을 완벽하게 충족시키는 '엔지니어링'이라고 생각했다. 브라운에서 만든 오디오, 라디오, 커피 메이커, 스피커, 면도기, 계산기, 시계 등은 물론 비초에와 함께 만든 가구까지, 람스가 디자인 한 제품은 언제나 '삶'이라는 환경을 바탕으로 했다. "좋은 디자인은 제품을 유용하게 한다", "좋은 디자인은 정직하다", "좋은 디자인은 불필요한 관심을 끌지 않는다", "좋은 디자인은 가능한 한 최소한으로 디자인되어야 한다" 등 디터 람스가 남긴 '좋은 디자인을 위한 10계명'은 여전히 많은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자랑한다.

비초에와 함께 만든 606 범용 선반 시스템


<바우하우스>

바우하우스

데사우 시의 바우하우스

애플이 디터 람스에게 영향 받았다면, 디터 람스는 독일의 예술학교 바우하우스의 행보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지금으로부터 딱 100년 전,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독일의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는 바이마르에 예술학교 바우하우스를 설립했다. Bau=짓다, Haus=집 즉 '건축의 집'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 바우하우스는 건축을 주축으로 예술과 기술을 아우르는 걸 이념으로 삼았다. 그로피우스는 예비과정에서 형태교사에게 조형 훈련을 받은 후엔 토목, 금속, 직물, 인쇄 등 각 공방으로 진급해 실재적인 기술을 익히는 교육 프로그램을 선정했다. 학생과의 위계나 차별을 불식시키겠다는 뜻으로 '교수' 대신 '마이스터'라는 호칭을 썼다. 파울 클레, 바실리 칸딘스키, 요하네스 이텐 등 추상화가들이 조형을 가르쳤다.

발터 그로피우스의 문 손잡이 / 빌헬름 바겐펠트와 칼 자콥 주커의 전등

1923년 사임한 이텐과 달리 새 마이스터로 부임한 라슬로 모호이너지는 기계를 당대의 정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로피우스는 모호이너지의 지원에 힘입어 바우하우스의 교육 방향을 산업디자인 중심으로 틀었다. 정부/대중의 지원을 통해 자립의 발판을 마련하고자 했던 바우하우스는 나치의 바이마르 장악 이후 해산 위기에 놓이지만 북부의 산업도시 데사우로 공간을 옮겼다. 산업과의 교류에 실패한 것을 책임으로 그로피우스는 학장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스위스 건축가 하네스 마이어가 새롭게 임명됐지만, 생산력 향상에 집중한 마이어와 미학의 가치를 중시하는 파울 클레와 바실리 칸딘스키 등 마이스터 사이엔 갈등이 일었다. 미스 반 데어 로에가 학장을 맡아 바우하우스를 건축예술 중심으로 운영했지만, 나치 정권의 탄압과 게슈타포의 감시에 못 이겨 폐교를 단행했다. 설립된 지 14년 만의 일. 비록 바우하우스의 인재들은 흩어질 수밖에 없었지만,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써 바우하우스의 가치를 계승해나가 긴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미스 반 데어 로에의 의자

페터 켈러의 아기 요람

조셉 알버스의 테이블


문동명 씨네플레이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