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순은 지난 몇 년간 부지런히 스크린에 얼굴을 비췄다. 8월에도 <봉오동 전투>와 <광대들: 풍문조작단>으로 바쁜 행보를 이어갔다. 최근 그가 어떤 모습으로 관객들 앞에 등장했는지, 그가 연기한 캐릭터를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해봤다.
내가 곧 왕이니라!
<광대들: 풍문조작단>, <물괴>, <가비>
박희순은 <광대들: 풍문조작단>에서 세조 역을 맡았다. 세조는 조카를 내쫓고 스스로 왕이 된 인물다. 왕이 되기 전 그의 이름은 수양대군이었다. 이 영화의 세조는 늙고 병든 자신의 뒤를 세자가 안전하게 이어갈 수 있도록 어떻게든 자신의 왕권에 정당성을 부여하려고 한다. 영화 속 광대 패거리에게 모종의 의뢰를 하는 것도 왕권을 찬탈한 자신의 행위를 천명(天命)으로 정당화 하기 위함이다. 세조를 연기한 박희순은 분명 <광대들: 풍문조작단>의 주연이다. 그럼에도 주인공 광대 패거리가 5명이라 메인 포스터에서 얼굴도 볼 수 없는 건 조금 아쉽다.
박희순이 연기한 왕을 볼 수 있는 또 다른 팩션 사극이 있으니, 바로 <물괴>. <물괴>의 아이디어는 조선 중종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한 “괴수가 나타났다”는 내용에서 비롯됐다. 박희순은 연산군을 몰아낸 세력이 왕으로 옹립한 중종을 연기한다. 왕이니까 직접 물괴를 잡는 역할은 당연히 아니다. 다만 재앙에 가까운 사건이 연이어 벌어지자 지도자로서 책임을 절감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박희순은 중종이 느꼈을 고뇌를 짧은 시간 내에 섬세하게 표현해냈다는 호평을 받았다. 그러고 보니 <물괴> 이전 박희순이 처음으로 왕 캐릭터를 출연한 영화가 <가비>였다. 이 영화 역시 정통 사극은 아니다. 박희순은 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대한 제국의 초대 황제 고종을 연기했다. <가비>는 고종이 커피를 즐겼 마셨다는 역사적 사실과 상상력이 결합한 영화다. 영화 제작자, 감독들이 보기에 박희순은 팩션 속 왕이 어울리는 얼굴인가 보다.
나라를 지키는 것이 내 운명!
<봉오동 전투>, <밀정>, <남한산성>
<밀정>을 본 관객이라면, <봉오동 전투>의 박희순에게 일종의 데자뷰를 느낄 것이다. <봉오동 전투>에서 그는 이장하(류준열)의 멘토 같은 인물로 등장한다. 불행히도 그는 독립군을 추격하는 일본군에게 잡혀 포로가 된다. 박희순이 연기한 독립군 캐릭터는 출연 분량이 많지 않지만 반전을 거듭하는 독특한 인물. 가상 인물인 <봉오동 전투>와 달리 <밀정>에선 의열단원 김상옥을 모티브로 한 김장옥 투사 역을 맡았다.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후 홀로 3시간 반 동안 총격전을 벌인 김상옥 열사처럼 김장옥도 일본 순사들의 추격에 끝까지 저항하는 강인한 독립투사로 그려진다. 재밌게도 박희순은 두 작품 모두 특별출연으로 일제에 맞선 독립투사를 연기했다.
<남한산성>에서 박희순이 연기한 이시백도 비슷한 맥락을 가진 캐릭터다. 청나라와 화친을 맺어야 한다는 주화파와 끝까지 저항하자는 척화파의 정치적 난전 속에서 이시백은 오로지 나라와 백성, 왕을 지키는 것에 주력하는 올곧은 장수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시백은 문관들의 기싸움이 중심인 영화에서 드물게 구체적으로 묘사되는 무관 캐릭터라 그 우직한 성격이 더욱 돋보였다. 감정적으로 치우친 상부의 명령에 과감하게 불복종하며 자신의 부하와 징집된 백성들을 보호하는 장면에서 박희순은 인간적인 카리스마를 한껏 과시하는 이시백이란 인물에게 깊이를 더한다.
진짜 나쁜데 연기 때문에 더 나빠보여
<1987>, <마녀>
박희순은 그동안 조폭, 깡패 등의 배역을 자주 맡았는데, 최근 영화에선 좀더 입체적인 악역을 자주 보여줬다. <1987>과 <마녀>가 그런 영화다. <1987>은 군사정권 시절 형사 조한경으로 출연했다. 초중반까지는 고문과 강압적인 수사를 담당하는 악랄한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상사 박처장(김윤석)의 ‘꼬리 자르기’ 이후 흔히 말하는 ‘장기말’로 전락하면서 그 또한 권력의 간접적인 피해자가 된다. 국가에 충성한다는 이유로 수많은 악행을 저지르는 조한경은 삐뚤어진 애국심이 얼마나 잘못됐는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캐릭터. 박희순은 이 영화 속 연기로 <작전> 이후 9년 만에 제 54회 백상예술대상 남자조연상을 수상했다.
<마녀>의 미스터 최는 조한경과 반대되는 캐릭터라고 볼 수 있다. 그는 개인적인 원한으로 움직인다. 조직을 관리하는 닥터 백(조민수)의 명령을 받지만 그의 의견에 순순히 따르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미스터 최는 어딘가 의뭉스러운 꿍꿍이를 숨기고 있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경험이 있는 베테랑 킬러 미스터 최를 연기한 박희순은 조민수와 함께 <마녀>에 출연한 김다미, 최우식 등 젊은 배우들의 활기찬 에너지에 호응하는 묵직함으로 균형을 맞추기도 했다. 미스터 최는 <마녀>에서 다른 독특한 캐릭터들에 다소 묻히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박희순은 열등감에 똘똘 뭉친 캐릭터 미스터 최를 연기하며 자아도취적인 다른 캐릭터들 사이에서 빛을 발한다.
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