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에겐 한 번쯤 자신의 세계가 무너지는 듯한 순간이 찾아온다. 윤가은 감독은 면밀한 시선으로 이 순간을 포착해 작품 안에 담아왔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보며 성인 관객들이 지난 시절 겪은 상처, 실패의 감정을 생생히 되살려낼 수 있는 건 찰나의 표정과 분위기만으로 보는 이의 마음을 뒤흔들어버리는 아역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연기 덕분. 배우들이 캐릭터와 더 밀접히 맞닿을 수 있는 촬영 환경을 조성한 윤가은 감독의 공을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전작 <우리들>을 통해 정지우 감독으로부터 "아이들의 연기에 무슨 마술을 부린 걸까"란 코멘트를 얻은 윤가은 감독. 신작 <우리들>을 통해선 봉준호 감독으로부터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과 더불어 아역배우를 스크린에 살아 숨 쉬게 만드는 '3대 마스터'"의 칭호를 받았다. <우리들>과 <우리집>을 통해 섬세한 결이 살아 숨 쉬는 아이들의 세계를 구축한 '윤가은 유니버스', 그 안에서 눈부신 연기를 펼친 아역 배우들을 소개한다.
<콩나물>
2013
<콩나물>은 어떤 영화?
<사루비아의 맛>으로 연출 데뷔 후, 두 번째 단편 연출작 <손님>으로 끌레르몽 페랑 단편 영화제 등 다수의 영화제에 초청된 윤가은 감독의 세 번째 단편 영화. 할아버지의 제삿날, 바쁜 엄마를 대신해 콩나물을 사 오려는 7살 소녀 보리(김수안)의 심부름 모험담을 담는다. 제18회 부산국제영화제, 제39회 서울독립영화제를 비롯해 다수의 영화제에 초청된 이 작품은 제64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수정공삼을 수상했다.
김수안 보리 역
시키지도 않은 심부름을 떠났다가 인생의 첫 실패를 겪는 소녀. 생애 처음 집 밖으로 홀로 나섰다가 이런저런 어려움을 마주하는 보리는 김수안이 연기했다. 설렘으로 시작해 긴장과 두려움을 거쳐, 여행의 끝자락에 다다라선 콩나물처럼 쑥 성장한 얼굴을 담아내는 김수안의 다채롭고 유연한 연기가 돋보인 작품. <콩나물>을 통해 제8회 대단한 단편영화제, 제31회 부산국제단편영화제에서 대단한 연기상, 연기상을 수상하며 주목받은 김수안은 이후 <카트> <차이나타운> <부산행> <군함도> <신과함께-죄와벌> 등 굵직한 작품으로 필모그래피를 채웠다. 그중 <콩나물>과 연이 깊은 작품이라면 <부산행>. 연상호 감독은 "김수안 배우가 <콩나물>에서 너무 좋은 연기를 보여줬다. (캐스팅을 위해 아들에서 딸로) 시나리오를 수정했을 정도로 연기가 너무 좋았다"고 밝힌 바 있다. 김수안은 곧 영화 <소공녀>(가제)로 극장을 찾을 예정이다. 부산 달동네를 주름잡는 말순 앞에 갓난 동생 진주를 업은 손녀 공주가 나타나며 벌어지는 이야기. 나문희가 말순을, 김수안이 공주를 연기한다.
<우리들>
2015
<우리들>은 어떤 영화?
제66회 베를린 국제영화제에 초청된 윤가은 감독의 장편 데뷔작.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던 소녀 선(최수인)은 전학생 지아(설혜인)와 함께 여름 방학을 보내고, 비밀을 나눈 두 사람은 둘도 없는 단짝이 된다. 선과 지아의 사이가 어색해진 건 개학 이후부터. 선을 따돌리는 보라(서연)의 편에 선 지아는 선을 외면하고, 어떻게든 지아와의 관계를 회복하려 노력하던 선은 지아의 비밀을 폭로하고 만다. 가족의 울타리를 벗어나 처음으로 타인과 관계를 형성하는 시기, 그 시행착오에서 얻은 아이들의 상처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본듯한 섬세한 연출력이 빛난 <우리들>은 윤가은 감독에게 '올해의 신인 감독' 타이틀을 안겨줬다.
최수인 선 역
좋아하던 친구를 하루아침에 잃은 선은 세상이 무너진 기분이다. 한없이 맑다가도 단번에 서운함과 배신감, 두려움으로 얼룩지는 선의 얼굴을 보고 나면, 그 복잡한 속내를 선명하게 투영해내는 최수인의 연기 내공이 궁금해질 터. 놀랍게도 <우리들>이 최수인의 데뷔작이다. 첫 작품으로 국내는 물론 베를린을 비롯한 해외 평단의 주목을 받은 최수인에게 충무로의 관심이 쏠린 건 당연한 일. 이후 최수인은 나문희 주연의 <아이 캔 스피크>에 출연해 정심(손숙/이재인)과 서로 의지하며 위안부 피해자의 고통을 견뎠던 옥분(나문희)의 어린 시절을 연기했다. 같은 해 단편영화 <가을단기방학>에 출연하기도 했다. 이 작품으론 충무로단편영화제의 아역 연기상을 수상했다.
설혜인 지아 역
<우리들>에서 가장 위태로운 얼굴을 한 아이. 하루아침에 선을 등진 지아는 타인에 대한 불신을 너무 일찍 배워버린 소녀다. 날 것의 연기로 요동치는 지아의 감정을 생생하게 표현한 설혜인 역시 <우리들>이 연기 데뷔작. <우리들> 이후 선택한 차기작도 어마어마한 작품이다. 전 세계를 돌며 25관왕을 수상한 <벌새>에서 설혜인은 주인공 은희(박지후)를 좋아한다며 쫓아다니는 후배 유리를 연기한다. 묘한 무드를 형성하다가도 대사 한마디로 분위기를 180도 반전시켜버리는 설혜인의 탄탄한 연기력이 돋보이는 캐릭터다.
이서연 보라 역
선(최수인)에게 선을 긋고, 그에게서 지아를 뺏은 채 위풍당당 교실을 누비는 보라에게도 말 못 할 고민은 있다. 약육강식의 세계를 가장 먼저 배운 아이, 서열 꼭대기에서 굴러떨어질까,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을 홀로 삭히던 보라는 이서연이 연기했다. 이서연 역시 <우리들>이 데뷔작. 이후 그녀는 주로 드라마에 출연하며 활동을 이었다. 사극 <왕은 사랑한다>에서 윤아가 연기한 은산을 연기하며 성인 배우와 싱크로율 100%를 자랑했고, 이어 드라마 <서른이지만 열일곱입니다> <봄이 오나 봄>에서 조연으로 활약했다. 동시에 아이돌 연습생이기도 하다. 연기를 포함해 다방면에서 재능을 뽐낼 그녀의 활약을 기대해봐도 좋겠다.
강민준 윤 역
<우리들>의 명언 제조기. “그럼 언제 놀아?”란 천진난만한 대사로 온 관객의 마음을 울린 선의 동생, 윤 역은 강민준이 맡아 연기했다. 시나리오를 암기하는 대신 주어진 상황 속에서 즉흥 연기, 대화를 통해 배우들이 자유롭게 연기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던 <우리들>의 촬영장. 윤가은 감독의 의도를 온몸으로 흡수해 극 중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연기를 펼친 강민준은 관객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올해의 아역배우 리스트에서 빠지지 않는 스타가 됐다. 이후 강민준은 마동석 주연작 <동네사람들>에 단역으로 출연했고,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부문에서 창작지원상을 수상한 <이장>에도 출연해 성숙해진 연기력을 뽐냈다.
<우리집>
2019
<우리집>은 어떤 영화?
매일 다투는 부모님이 고민인 12살 하나(김나연)와 자주 이사를 다니는 게 싫은 유미(김시아), 유진(주예림) 자매는 여름 방학, 동네에서 마음을 나누며 가까워진다. 가족에 대한 고민을 터놓으며 단짝이 된 세 사람은 각자의 '우리 집'을 지키기 위해 모험을 떠난다. <우리들>의 선과 보라, 지아가 특별출연으로 함께하는 데다 제목 역시 비슷해 <우리집>이 윤가은 감독의 전작과 비슷한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쉬울 것. <우리집>은 <우리들>과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결을 지닌 영화다. 상처를 안고 있는 아이들은 서로를 알아보기 마련. ‘우리 집은 왜 그럴까’란 고민으로 뭉친 이들은 서로 의지하며 어른들의 사정으로 무너져가는 자신들의 세계를 지키려 애쓴다. 그 연대에서 오는 끈끈함은 금방이라도 녹아내릴 것 같은 한여름 무더위 배경과 어우러져 더 높은 시너지를 발휘한다.
김나연 하나 역
인정할 수 없어 외면했던 걸 결국 받아들여야 하는 때가 있다. 12살 하나는 부모님의 불화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겉으론 쾌활해 보이지만 상처도 많고 속도 깊은 하나는 김나연이 연기했다. 시시각각 변하는 하나의 감정을 빈틈없이 담아내며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만든 그녀의 연기가 돋보이는 작품. 윤가은 감독이 캐스팅한 대부분의 아역 배우가 그러했듯 김나연 역시 <우리집>이 장편 영화 주연 데뷔작이다. 차기작은 정해지지 않은 상황. 앞으로 더 많은 작품에서 김나연의 연기를 만날 수 있길 기대해본다.
김시아 유미 역
9살의 나이로 이사만 6~7번 해왔던 유미는 세상의 냉정함을 누구보다 빨리 익힌 아이다. 좌절하는 하나에게 먼저 위로를 건넬 줄 아는 동생. 이미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어른의 눈빛을 품은 유미를 보고 있으면 그를 연기한 김시아의 연기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김시아는 작년부터 국내 관객과 평단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던 아역 배우다. 그의 데뷔작은 600:1의 경쟁률을 뚫고 캐스팅된 <미쓰백>. 아동학대를 당하던 가혹한 현실에서 미쓰백, 상아(한지민)의 손을 잡고 뛰쳐나온 아이 지은을 연기했다. 몇 마디 대사보다 눈빛 한 방으로 더 많은 말을 전달할 줄 아는 이 배우의 귀한 재능을 눈여겨보고 있는 이가 많을 터. 앞으로 어떤 작품에서 색다른 연기를 펼쳐낼지 궁금해진다.
씨네플레이 유은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