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웃기지 않아도 괜찮다. 스티브 카렐에 대한 얘기다. 그는 코미디 배우로 인기를 얻었다. 지금은? 그냥 배우다. 스티브 카렐의 초기작들을 보지 못한 사람들, 그의 대표작인 드라마 <오피스>를 보지 않은 사람들은 어쩌면 그가 코미디 영화에 주로 출연한 배우라는 걸 모를 수도 있겠다. 스티브 카렐이 출연한 ‘진지한’ 영화 5편을 모아봤다.
<미스 리틀 선샤인>
이렇게 유쾌할 수가. <미스 리틀 선샤인>을 한 문장으로 설명하는 말이다. 단, 스티브 카렐은 이 영화에서 우울 파트를 담당하고 있다. 카렐은 자칭 미국 최고의 프루스트 학자인 동성연애자 프랭크를 연기했다. 대학원생인 제자에게 실연당한 뒤 자살을 시도하는 캐릭터다. 프랭크는 조카 올리브(아비게일 브레슬린)의 미인대회 출전을 위한 가족 여행에 동참한다. 지독하게 우울한 캐릭터를 연기한 스티브 카렐은 <미스 리틀 선샤인>부터 조금씩 연기의 폭을 넓혀갔다. 이전에 그가 출연한 영화 가운데 널리 알려진 것은 짐 캐리 주연의 <브루스 올마이티>와 <40살까지 못해본 남자>정도였다. <40살까지 못해본 남자>는 미드 <오피스>와 함께 스티브 카렐의 출세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폭스캐처>
베넷 밀러 감독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선택을 했다. 그의 선택은 탁월했다. 미국을 뒤흔든 충격적 살인 사건을 다룬 <폭스캐처>에서 스티브 카렐은 세계적 기업 듀폰의 4대손이자 미국레슬링협회 후원자였던 억만장자 존 듀폰 역을 맡았다. 베넷 밀러 감독은 스티브 카렐을 캐스팅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를 캐스팅한 이유는, 존 듀폰을 연기하는 그를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스티브는 코미디 연기로 유명해졌고, 이전에 이같은 역할을 연기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듀폰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도 듀폰이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다고 생각지 못했다. 예상 밖의 일을 저지른 인물을 연기하려면 그 역할로 상상할 수 없는 사람이 적임자라고 생각했다.” 스티브 카렐은 <폭스캐처>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빅쇼트>
<빅쇼트>의 아담 맥케이 감독과 스티브 카렐의 인연은 윌 페럴을 내세운 <앵커맨>(2004)에서 시작됐다. 당시 스티브 카렐은 조연으로 활약했다. <빅쇼트>에서는 크리스찬 베일, 라이언 고슬링, 브래드 피트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빅쇼트>는 2008년 미국 금융위기 당시 공매도(空賣渡·short selling, 주가 하락을 예상하고 시세차익을 노리는 투자)를 통해 큰 돈을 번 네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스티브 카렐은 펀드매니저 마크 바움을 연기했다. 경제 위기로 큰 돈을 벌었지만 바움은 결코 웃지 않는 캐릭터였다. 대신 금융위기를 촉발시킨 월스트리트의 거대 자본에 대한 냉소를 보여주기는 한다.
<빌리 진 킹: 세기의 대결>
<빌리 진 킹: 세기의 대결>(이하 <빌리 진 킹>)에서 스티브 카렐은 좀 웃겼다. 그는 여성을 비하하는 은퇴한 테니스 선수 바비 릭스를 연기했다. 사실 릭스는 속된 말로 ‘짠한’ 캐릭터다. 아내의 그늘에서 살다가 버림 받았으며 그랜드슬램을 석권한 선수였지만 사람들에게 잊혀지고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도박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여성 테니스 선수 빌리 진 킹(엠마 스톤)과의 경기를 추진한 릭스는 그 나름대로의 절박함이 있었다. 스티브 카렐은 대중 앞에서는 광대처럼 웃음을 팔고 뒤돌아서면 쓸쓸한 표정을 짓는 남성우월주의자 릭스를 탁월하게 연기했다.
<바이스>
<바이스>에서 스티브 카렐은 다시 한번 아담 맥케이 감독과 만난다. 그는 미국의 전 국방부장관 도널드 럼즈펠드를 연기했다. 럼즈펠드는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정치인이다. 카렐은 금테 안경을 쓴 찌푸린 인상의 럼즈펠드로 완벽하게 변신했다. 백안관 인턴 환영회 연설 장면은 스티브 카렐이 <바이스>에서 가장 빛나는 장면이다. <바이스>의 주인공 딕 체니를 연기한 크리스찬 베일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스티브 카렐이 출연한 아담 맥케이 감독의 영화, <앵커맨>, <빅쇼트>, <바이스>를 돌아보면 점점 웃음기가 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새터데이나잇 라이브>(SNL) 작가 출신인 아담 맥케이가 점점 더 진지해지는 만큼 스티브 카렐도 코미디 배우의 이미지를 벗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스티브 카렐은 늦은 나이에 성공한 배우다. 젊은 시절 코미디언이 되고 싶어 오디션을 숱하게 봤지만 번번히 실패했다. 결국 그는 TV프로그램 <더 데일리쇼>의 작가가 됐고 운 좋게 리포터로 카메라 앞에 서게 됐다. 이 경력을 통해 그는 <브루스 올마이티>에서 앵커 역할을 따냈고 ‘외계어’를 내뱉는 명장면을 만들어냈다. 사실 탁월한 코미디 배우치고 연기를 못하는 배우는 없다. 사람들을 웃기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짐 캐리, 벤 스틸러가 그렇다. 스티브 카렐도 마찬가지다. 9월 19일 개봉한 <뷰티풀 보이>에서 티모시 샬라메 못지 않게 스티브 카렐을 주목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씨네플레이 신두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