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꽃>

2019년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경향 중 두드러지는 한 가지는 지난해의 흐름이 여전히 강력하게 이어진다는 점이다. 바로 여성 감독들의 약진이다. 뉴커런츠와 비전 부문 13편 중에서 공동감독을 포함하여 8편의 작품이 여성 감독 들의 연출작이다. 다만 영화제의 작품들을 통해 중요하게 의식되어야 할 것이 ‘경향’만은 아니다. 때로는 의도가 중요하다. 각 부문의 ‘제목’ 그대로 실행해 보자는 것이 올해 한국영화 프로그래밍의 의도 중 하나다. 그러니까 말 그대로 비전 부문에서는 영화의 비전을, 뉴 커런츠 부문에서는 새로움을, 파노라마 부문에서는 다양함을 관객에게 제시하는 것이다.

선정된 작품들을 부문별로 골고루 소개하는 방식도 있겠지만 지금은 그 반대를 택했다. 비전과 뉴커런츠 부문, 혹은 아이콘 부문의 <기생충>, 오픈시네마 부문의 <초미의 관심사>, 폐막작 <윤희에게>에 대해서는 이 자리에서 별도로 말하지 않으려 한다. 지금은 파노라마 부문에 대해서만 집중하여 말하려 한다. 그리고 파노라마 부문은 다시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기존의 주류 한국영화 개봉작 중 엄선된 6편. 이것이 첫 번째다. 개봉작을 대상으로 한 부산국제영화제의 베스트 목록에 가깝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말하 자면, <엑시트>, <극한직업>은 단순히 흥행이 잘 된 영화인 것이 아니라 대중적 기획력과 연출력이 빚어낸 창의적 사례로 꼽힐 만하다. <강변호텔>은 홍상수 감독의 영화여서 부산에 온 것이 아니라 여전히 홍상수의 영화가 가장 뛰어난 영화여서 부산에 왔다. <유열의 음악앨범>은 올해 한국영화 안에서 만난 가장 아름다운 연애사다. 감독 정지우 감독의 연출력 특히 그의 독창적인 연기 연출 력에 대해서는 더 많은 조명이 필요하다. <유열의 음악앨범>에서 흥미롭지 않은 연기를 하는 배우란, 주 조연을 모두 통틀어 아무도 없다. <미성년>에서 감독 김윤석은 좋은 감독이 지녀야 할 안목과 실력을 그가 지니고 있음을 입증해냈다. 그는 이제 기다려지는 신인 감독에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이종언 감독의 <생일>은 한국의 상업영화가 할 수 있는 어떤 최선의 모델인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는 온화하고 신중하고 섬세하며, 너무 슬프다.

두 번째는 명망 있는 기성 감독들의 신작이다. 박정범 감독의 <이 세상에 없는> 은, 그렇지 않아도 가혹하기로 유명한 박정범 영화 세계의 인물과 환경들 중에 서도 가장 가혹한 사례로 등극할지 모르겠다. 모종의 긴급함, 두려움, 간절함이 영화 내내 숨 막힐 정도로 배어 있어서 영화 자체가 하나의 ‘기도’인 것처럼 느껴진다. 이동은 감독의 <니나 내나>는 습득과 축적의 뛰어난 결과물인 것 같다. 전작들의 단점은 보완하고 장점은 고취하면서 한 가족의 감동적인 애가를 완성 해냈다. <프린세스 아야>는 한국애니메이션의 장인 이성강 연출, <부산행>의 제작진 제작, 동화와 환상으로 잘 구성된 이야기, 아이돌 스타 백아연과 갓세븐 진영의 목소리 출연, CGV 스크린 X팀이 완성한 세계 최초 풀 버전 스크린 X 애니메이션이라는 신기술의 영화라는 사실만 나열해도 벌써 기대작이 된다. 신수원 감독의 <젊은이의 양지>와 전계수 감독의 <버티고>는 어느 면에서 볼 때 신중하고도 장르적인 사회학적 호러 드라마(<젊은이의 양지>)이거나 멜로드라마 다(<버티고>). 두 영화는 각각 선택한 장르적 집중력과 밀도를 서서히 높여가면 서, 마침내 이 사회의 사회적 의미망의 핵심부를 우아하게 찔러 들어온다. 고봉수, 고민수 감독의 <우리마을>은 그렇다면 그 반대다. 여기에는 정치도, 사회도, 아무것도 없다. 많이 들어본 이야기, 우스꽝스러운 인물들, 촌스러운 대사와 카메라 앵글이 있지만, <델타 보이즈>와 <튼튼이의 모험>에서 고봉수 감독이 선보인 고집 센 날림과 날것의 미학은 한층 더 도약해 있다. <우리마을>에서 평범한 건 딱 한 가지, 제목뿐이다. 세 번째는 현재 주류 대중 영화와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을 만큼의 대중적 친화력과 만듦새를 지닌 폭넓은 차원의 대중 영화들이다. 이 영화들이 공고한 주류 영화계 바깥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이 혹은 신인들의 영화라는 것이 흠이 되진 않을 것이다. 박제범 감독의 <집 이야기>에서는 뛰어난 배우 이유영과 강신일의 담담하고 온화한 연기 조화가 마음을 사로잡는다. 고훈 감독의 <종이꽃>의 매력은 무엇보다도 안성기라는 배우의 ‘실물’에 있다. 이야기는 흔하고 평범하지만 안성기라는 배우가 망자의 관 앞에 서서 연기를 할 때, 한평생 망자들을 예의 있게 대해온 늙고 고집 센 장의 사의 염이 시작되는 그때, 그의 표정과 손짓은 우리를 깊은 감흥으로 이끈다.

<갱>

최윤태 감독의 <야구소녀>와 조바른 감독의 <갱>은 서로 다른 지점에서 대중적 흥미를 자극한다. <야구소녀>에서는 이주영이라는 재능있고 인기 있는 신인 배 우(2018년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메기>로 올해의 배우상을 수상했다)가 고등학교 야구선수 역할을 맡게 된다는 것 자체가 흥미를 자극한다. 남자들의 세계 로만 여겨지는 프로야구계에 실력을 입증받아 입단하려는 그녀의 노력은 재치와 쾌활함과 온기와 결기를 동시에 지닌 채 탄탄한 드라마로 전개된다. <갱>에는 시시껄렁한 불량아들이 득실거린다. 여기는 학교지만 실은 파이트 클럽이다.

싸움을 제일 잘하는 녀석이 학교에서 제왕이 된다. 얼핏 들으면 지겹고 진부한 스토리다. 그런데 지겹고 진부한 장면은 여기 없다. 기발한 캐릭터와 발칙한 코미디가 뒤섞여서 어디로 갈지 예측할 수 없는 가운데 점점 더 흥미로운 요지경이 되어간다. <갱>은 감독의 이름만 조바른일 뿐, 영화는 전혀 바르지 않고, 철저히 바르지 않아 더 매력적이다.

말 그대로 파노라마 부문이 파노라마가 되기를 바랐다. 주류 시스템에서 정제된 공정을 거쳐 나온 대중 영화에서부터, 기존 기성 감독들의 유능한 신작 영화까지, 그리고 거칠지만 매력 있는 대중 영화의 새로운 움직임들까지 포착하고 제시하려 했다. 이것이 올해 파노라마 부문의 의도다. 하지만 의도는 역시 의도일 뿐이다. 이 영화들을 마주할 영화제 관객들의 반응은 어떠할까, 궁금하다.

<초미의 관심사>


정한석 한국영화 프로그래머

<씨네21> 부산국제영화제 공식 데일리 매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