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프레이저

<지옥의 묵시록>의 한 장면에서 커츠(말론 브란도)의 어두운 처소에 놓여 있던 프레이저의 책, <황금가지>는 사연이 많은 책이다. 이 책은 한 때 열 두 권짜리 판본까지 출판되었다고 하는데, 오로지 ‘숲의 왕’과 관련된 신화와 전설들을 모아 이른바 비교 인류학(그는 스스로를 ‘현장 인류학자’가 아니라 ‘비교 인류학자’라고 말하곤 했다)적 작업을 수행하다 보니, 엄청나게 많은 사례들을 모아 제시했던 때문이다. 그러나 흥미로운 점은 책의 방대함이 아니다. 그가 (최소한 <황금가지>를 집필하는 동안에는) 단 한 번도 외국에 나가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더 흥미롭다. 자신의 서재와 도서관 의자, 거기에 앉아서 그는 그렇게 많은 이야기들을 어떻게 다 모았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좀 정치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페미니즘적이어야 한다. 그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지적인 활동의 절정을 맞은 ‘영국인 백인 남성 귀족’이 아니었다면, 그 방대한 책을 쓸 수는 없었으리라. 영국은 한 때 지구의 절반이 자기 영토라고 자부할 만큼 제국주의적인 나라였고, 부와 땅만 아니라 온갖 인종들과 동물들(최초의 근대적 동물원이 들어선 것도 영국이었다)과 보석과 향신료와 식재료들이 영국으로 흘러들었다. 그리고 (이른바 ‘인류학’이라는 근대적 학문의 이름 아래) 수많은 ‘이야기’들과 유물들도 런던으로 흘러들어갔다. 말하자면 제국주의가 <황금가지>를 쓰게 한 셈이다(그렇게 쓰인 <황금가지>가 서구중심주의와 기독교를 정면에서 공박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금서조치 된 적도 있다는 건 좀 아이러니하다).

마찬가지로 남성 중심적 가부장제가 <황금가지>를 쓰게 했다는 말도 가능하다. (제국주의) 전쟁이 항상 남성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점 때문만 아니라, 실은 <황금가지>의 그 방대한 사례들을 거칠게 요약하자면 ‘아버지들의 잔혹사’, 혹은 ‘부왕 살해의 역사’ 쯤 될 것이기 때문이다. 숲의 왕이자 주술사인 아버지의 노쇠, 젊은 왕의 부왕살해, 다시 노쇠, 다시 살해의 반복이 <황금가지>에서 프레이저가 찾아낸 고대 역사의 패턴이다. 어찌 되었건 공동체는 남성 가부장인 숲의 왕을 중심으로 영고성쇠를 거듭한다. 터너의 그림 속에서 아르테미스가 원형 대열 가운데 불을 들고 서 있다고는 하나, 여신의 남편 자격으로 인간들의 숲을 지배한 것은 남성 가부장들이었다. 거기에는 여성들의 역할도 역사도 없다.


아버지 프로이트

<토템과 타부>에서 프로이트가 언급한 예의 그 유명한 고사(古事)도 마찬가지다. 모든 부와 여자들을 독차지한 원초적 아버지(법 이전의 아버지이므로 그에게는 금기가 없다)에 반해 형제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그 아버지의 살을 먹음으로써 죄의식을 나눠 가진다. 거기서 법과 문명과 질서가 최초로 탄생한다. 그러니까 그것은 아들과 아버지 사이의 오래된 싸움(프로이트는 세계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걸작을 셋 꼽는데 그것들 모두 이 싸움을 극화하고 있다. <오이디푸스 왕>, <햄릿>,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다.

아마도 프로이트가 얼마간의 가정법을 동원해서라도 저 이야기를 복원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으리라. 프로이트는 “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을 반복한다”라는 근대 생물학의 명제를 믿었으니까…. 그가 한 주체의 발생과정에서 이른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단계’를 발견했다면, 그와 유사한 단계가 마찬가지로 종의 수준, 즉 인류 전체의 발생과정에서도 발견되어야 했다. 말하자면 ‘부왕살해’와 ‘인신공희’ 그리고 잇따른 죄의식과 문명의 설립은 우리가 유년에 겪은 오이디푸스 단계의 계통발생적 기원이다. (거대한 남근으로) 엄마를 차지한 아버지(겨우살이 가지, 칼 같은 무기들은 다 남근 상징이다), 그로부터 기원하는 부친살해 욕망, 그에 대한 죄의식과 거세 콤플렉스, 그리고는 아버지-법에 대한 동일시와 사회화, 이것이 프로이트가 말하는 주체의 형성 과정이다.

그러나 그것은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남근’을 가진 ‘남성’ 주체의 형성과정이다. 여기에도 역시 여성은 없거나 모호하게만 있고(스스로를 프로이트의 적자라고 생각하는 라캉은 ‘여성은 없다’라고 말한다), 혹은 복잡하게 있다(남근 기표를 매개로 하지 않는 여성적 주이상스 운운). 라캉이 그나마 남근을 ‘(주인)기표’ 혹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생물학적 영향권에서 언어학적 영향권으로 선회시키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 또한 <세미나> 어딘가에서 주인 기표로서의 ‘남근’의 약화가 현대 사회에 어떤 상황을 불러 올지 우려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마치 그것이 없으면 아버지의 이름에서 폐제된 이들의 분열증이 세계를 덮칠 수도 있다는 듯이….


에벌린의 불알론

영화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의 동명 원작 소설(패니 플래그 作)에서 늙은 ‘니니’의 이야기를 오래 듣고 난 ‘에벌린’(니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녀는 점점 당당한 여성으로 변화한다)이 풍자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와 같은 사태다. 말하자면 이것은 에벌린의 ‘불알론’(점잖게 ‘고환론’이라고 할까 하다가, 원작에 충실하기로 했다)인데, ‘에드’는 그녀의 남편(전형적인 백인 중산층 비만 남성)이다.

에드는 어째서 누가 자기 불알을 잡는 것을 그토록 무서워했을까? 어쨌거나 그런데 그게 뭐지? 정자를 담은 작은 주머니일 뿐이지 않는가 말이다. 하지만 불알을 두고 호들갑을 떠는 남자들을 보노라면 마치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무엇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였다. 맙소사, 에드는 아들의 그것이 적당한 모양으로 발육하지 않자 걱정이 되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의사 말로는 모양이 그렇더라도 아이를 갖는 데는 문제가 없다고 했지만 에드는 마치 무슨 비극이라도 생긴 것처럼 행동했고 아들을 정신과 의사에게 데려가고 싶어 했다. 그래서 아들이 스스로 남자도 아니라는 느낌을 갖지 않게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에벌린은 당시에 했던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어처구니가 없군……. 성장기 때 내 가슴은 절벽이었지만 누구도 나를 어디론가 보내서 어떤 도움을 받게 해야 한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어.’

패니 플래그,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에서

읽으면서 (남자인 나로서도) 부끄럽고 통쾌했거니와 불알과 남근은 다른 것이 아니냐는 논쟁은 미리 사양한다. 애초에 그것들은 삼위일체인 데다, 지금 작가는 단순히 남성의 생식기에 관한 생물학적 논쟁을 벌이자는 것이 아니라, 가부장적인 사회 질서가 실은 얼마나 연약한 물질(혹은 물건) 위에 기반하고 있는지를 폭로하는 고도의 수사를 구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우리는 왜 ‘남근 없는 공동체’(남자 없는 공동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를 상상하면 안 된단 말인가!


휘슬스톱 카페

1991년 존 에브넷 감독이 만든 영화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가 상상한 공동체가 그런 공동체다(나는 그런 공동체 몇을 앞으로 소개해 볼 생각이다). 그 공동체의 정확한 위치는 미국, 앨라배마 주, 버밍햄 인근, 기차가 서는 조그만 마을, 거기서 1929년에 개업을 시작한 카페 ‘휘슬스톱’…. 거기 ‘잇지’와 ‘루스’가 살았다. 가장 맛있는 음식은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였고, 가장 독특한 음식은 ‘빅 조지’가 만든 바비큐였다(그 재료는 아직 공개할 수 없다).

결혼하지 않은 채, 기찻길에서 팔 하나를 잃었지만 꿋꿋하게 자라는 아이(스텀프)를 기르는 두 연인 잇지와 루스(둘 다 생물학적 여성이다)가 공동체의 중심에 있다. 그들은 같이 사랑했던 한 남자(버디, 잇지의 오빠)를 잃은 후 둘이 사랑에 빠지게 되고(소설과는 다르다, 소설에서는 루스가 버디 사후에 온다), 루스는 잠시 결혼했지만 남편(프랭크 베넷)의 폭력을 견디지 못해 잇지에게 돌아와 암으로 죽을 때까지 평생을 같이 한다. 잇지는 루스가 죽은 후에도 영원히 그녀를 사랑한다. 가족은 그들만이 아니다. 1929년이었고, 미국 남부였으므로 그들에게는 흑인 시중들이 있다. 현명하게 늙은 ‘십시’(그녀는 이 영화에서 한 순간 지대한 역할을 한다), 그녀의 아들 ‘빅 조지’(소설 속에서 빅 조지는 업둥이다. 십시에게 친혈육은 없다)는 어마어마한 거구이고 그의 바비큐 요리는 일품이다. 인종이 다르지만 그들은 결코 가족애를 버리지 않고, 인근 빈민들이나 흑인들 그리고 ‘스모키’ 같은 방랑 노숙인에게도 먹을거리와 잠자리를 제공한다. 떠돌다 마을에 정착한(그러나 떠나고 싶을 때 미련 없이 떠나는) 스모키는 평생 루스를 사랑하지만 내색도 하지 않는다. 그것이 그의 사랑의 방식이고, 게다가 그는 애초에 그 어느 것도 소유하고자 하지 않는 종류의 사람이다. 술 외에는……. 잇지에게는 오빠와 누이들이 많은데, 죽은 버디 외에도 ‘줄리언’, ‘클로에’(니니의 남편), ‘니니’(업둥이) 등등이 있고(영화에서 이들은 그다지 중요한 사연을 부여받지 못한다. 그러나 소설은 이들이 얼마나 사려 깊고 엉뚱했으며 지혜로웠는지를 소상히 알려준다), 잇지의 절친으로는 ‘그래디’와 ‘에바’가 있다(실은 다 절친이다). 그래디는 마을의 보안관이고 덩치지만 가부장적이라기보다 힘이 필요할 때 마을을 지키는 울타리 같다. 에바는 강가에서 아버지와 함께 낚시 클럽과 술집을 운영하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여자지만, 너무도 현명해서 이 마을에선 누구도 그녀를 무시하지 않는다.(소설 속에서는 많은 마을의 난제들을 에바가 해결한다). 그리고 또 …(숨차다). … 이 모든 이야기들은 늙은 니니가 병원에서 에벌린에게 들려주는 것이고, 이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에벌린은 점차 변화한다.


버밍햄

한없이 더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영화이지만 줄거리와 인물들을 더 나열하는 것이 그리 현명한 짓은 아니지 싶다. 그 카페의 말할 수 없이 따뜻한 온기를 느끼는 일은 아무래도 직접 이 오래된 영화를 보기로 결심한 독자들에게 주는 선물로 남기고, 다만 당시 버밍햄이 어떤 곳이었는지, 그리고 프랭크 베넷(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악역인 루스의 남편)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만 말할 참이다. 당시 버밍햄은 소설에 따르면 이런 곳이었다. ‘아티스’는 빅 조지의 아들이다.

버밍햄, 대공황기에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미국에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도시’라고 이름 붙인 곳…. 그곳 사람들은 너무 가난했다. 아티스는, 돈을 위해 자신을 쏘아 달라고 했던 남자와, 오래 춤추기 대회에서 우승하려고 사흘 동안 소금물과 식초에 발을 담갔던 소녀를 알았다…. 미국 전체 도시 중 1인당 소득이 가장 낮은 곳이면서도 남부에서 가장 우수한 서커스 도시로 알려졌던 곳…. 버밍햄, 한때 문맹률이 가장 높고 미국 어느 도시보다 성병이 창궐했던 곳. 그러면서도 미국 도시들 가운데서 주일학교 학생 수가 가장 많았던 기록을 자랑스럽게 보유한 곳… “백인 전용”이라는 문구를 써 붙인 임페리얼 세탁소 트럭이 시내를 돌아다니던 곳. 피부색이 검은 시민은 전차에서 “흑인”이라고 쓰인 판자 뒤에 앉아야 하고 백화점에 화물용 엘리베이터를 타야했던 곳. 버밍햄, 1931년에만도 131명이 살해된, 살인자들의 남부 중심지….

패니 플래그,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에서

좀 길다 싶게 당시 버밍햄의 상태에 대해 인용한 것은 잇지와 루스의 ‘남근 없는 다인종 무계급 레즈비언 공동체’가 (이 영화는 개봉당시 최고의 레즈비언 영화상을 수상했고, 실제로 작가 페니 플래그는 커밍아웃한 레즈비언이다) 어떤 위협과 고난을 감수해야 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다. 영화 속에서 위협은 프랭크 베넷에게서 온다.

그는 이 마을을 두 번 방문하는데 조지아의 KKK단들과 한 번(빅 조지는 채찍질 당하고, 루스의 아이는 납치될 뻔 한다), 그리고 혼자서 한 번…. 그러나 그날 밤 ‘어떤 사건’이 있었고 그는 영영 집에 돌아가지 못한 채 행방불명된다. 훗날 그의 차가 강에서 건져 올려지고, 형사들이 이 공동체를 수사하지만 단서나 증거가 없었으므로, 그저 빅 조지가 요리한 바비큐만 수 인분씩 맛있게 먹고 돌아간다. 재판에서는 심지어 잇지와 적대적이던 침례교 목사님마저 (가짜 성경에 선서하고) 잇지의 알리바이를 위증해 주는 반전도 일어난다. 그러나 저러나 그렇다면 도대체 프랭크는 어디로 간 걸까?


법이 먹은 것

암시만 하자면, 그 밤이 지난 후 새벽이 올 때, 잇지는 빅 조지에게 이렇게 말한다. “조지 이제 돼지를 삶을 시간이에요”. 그리고 다음 날 형사가 먹은 바비큐는 유난히 맛있었고, 그 겨울에 미시시피 강의 메기들은 배라도 부른 듯 미끼를 잘 물지 않았다. 혹시 법(가부장적이고 남근 중심적인)이 뭔가 자신이 찾고 있던 것(역시 가부장적이고 남근 중심적인)을 먹은 건 아닌지 모르겠다.


저자 | 김형중

1968년 광주에서 태어나 전남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0년 문학동네신인상 평론 부문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평론집 《켄타우로스의 비평》 《변장한 유토피아》 《단 한 권의 책》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 《후르비네크의 혀》 등과 에세이 《평론가 K는 광주에서만 살았다》가 있으며, 소천비평문학상(2008), 팔봉비평문학상(2017)을 수상했다. 현재 조선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