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누벨바그의 여신' 배우 안나 카리나가 12월 14일 세상을 떠났다. 프랑스 문화부장관이 “오늘 프랑스 영화계는 고아가 됐다. 또 하나의 전설을 잃어버렸다”며 그의 부고를 알릴 만큼, 카리나가 프랑스 영화계에 남긴 유산은 깊고 넓다. 카리나의 생전 흔적들을 기리며 그의 명복을 빈다.


#hanne_karin_bayer

안나 카리나 본명은 한느 카린 베이어, 1940년 9월 덴마크 솔브예르그에서 태어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2살 되던 해 아버지는 집을 나갔고, 8살 때까지 외조부모와 위탁가정에서 자랐다. 18살에 어머니의 곁을 떠나 무작정 파리로 왔다. 오갈데 없던 그는 한 신부의 도움으로 거처를 마련했고 유명 모델 에이전트 카트린 아를레에 눈에 띄어 <엘르>의 모델로 활동하던 그에게 안나 카리나라는 예명을 만들어준 건 코코 샤넬이었다.

1959년 촬영한 화보


#godard

프랑스의 명망 있는 영화지 <카이에 뒤 시네마>의 평론가였던 장 뤽 고다르는 비누 광고에서 본 안나 카리나에게 첫 장편 <네 멋대로 해라>(1959)에 단역으로 출연해달라고 청했지만, 카리나는 노출 신을 이유로 거절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0년 2번째 영화 <작은 병정>에 카리나를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을 지원하는 주인공 베로니카 역으로 캐스팅 했다. 스위스를 배경으로, 알제리 전쟁을 수년째 이어가던 프랑스 정부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 담은 <작은 병정>은 검열로 인해 1963년에서야 공개됐다. 1961년 봄 부부가 된 카리나와 고다르는 영화사에 길이 남을 걸작들을 쏟아냈다.

<작은 병정>, 1960

<여자는 여자다>, 1961 / 베를린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안나 카리나

카리나는 고다르와의 두 번째 작업이자 첫 번째 컬러 영화 <여자는 여자다>(1961)에서 애인인 에밀(장 클로드 브리알리)과 그의 친구 알프레드(장 폴 벨몽도)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는 스트립댄서 안젤라를 연기해 베를린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온전히 카리나를 위한 영화 <비브르 사 비>는 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놓지 않는 나나의 절망스러운 삶을 그려, 그해 프랑스에서 4번째로 큰 수익을 거두는 상업적인 성공까지 거뒀다. 삼각관계가 놓인 세 남녀가 절도를 감행하는 <국외자들>은 카페에서의 댄스, 루브르 박물관을 9분 43초 만에 질주하는 신, 발 없는 새에 대해 이야기 하는 대목 등 후대 많은 영화들로 변주됐다. <미치광이 삐에로>, <알파빌>, <메이드 인 USA>는 각각 당대 최고의 배우 장 폴 벨몽도, 에디 콘스탄틴, 장 피에르 레오와 투톱으로 활약한 작품이다. 옴니버스 영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의 일환으로 제작된 단편 <기대>(1966)를 마지막으로 카리나는 고다르와 헤어졌다.

<비브르 사 비>, 1962

<국외자들>, 1964

<미치광이 삐에로>, 1965

<알파빌>, 1965

<메이드 인 USA>, 1966


#realisateurs

<5시부터 7시까지 클레오>, 1961

안나 카리나는 장 뤽 고다르 외에도 여러 감독들과 작업해왔다. 아녜스 바르다의 초기작 <5시부터 7시까지 클레오>에선 고다르와 함께 살짝 얼굴을 비췄고, <그리고 신은 여자를 창조했다>로 브리짓 바르도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로제 바딤이 할리우드 배우 제인 폰다를 캐스팅 한 <라 론데>에 주연으로 참여했다. 프랑스 누벨바그를 대표하는 또 다른 감독 자크 리베트가 드니 디드로의 소설을 각색한 <수녀>로 1963년 처음 연극 무대에 올랐던 카리나는, 3년 뒤 제작된 영화에서도 수녀원에서 벌어지는 온갖 폭력을 감내하는 주인공 수잔을 연기했다. 기독교에 대한 비판과 레즈비언 수녀 원장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가 담긴 영화는 프랑스에서 상영 금지 판결을 받았다.

<라 론데>, 1964

<수녀>, 1966

<안나>, 1967

TV 방영을 위해 제작된 프랑스 최초의 컬러 영화 <안나>의 주연을 안나 카리나가 맡았다는 점은 자국 영화계에서 카리나의 영향력과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가늠해볼 수 있는 지표다. 프랑스 최고의 뮤지션으로 손꼽히는 세르쥬 갱스부르가 음악을 맡은 뮤지컬 영화 <안나>는 광고회사를 운영하는 남자가 지하철역에서 본 사진 속 여자를 찾아헤맨다는 이야기다. 고다르와의 작업과 <안나>의 주제가가 성공을 기록한 덕분에 해외에서도 뜨거운 반응을 얻었던 카리나는 틈틈이 해외 감독들과 협업하면서 다채로운 필모그래피를 구축해갔다. 이탈리아 감독 루키노 비스콘티가 알베르 카뮈의 소설을 영화화 한 <이방인>은 이탈리아의 명배우 마르셀로 마스트로얀니와 호흡을 맞췄다. 그밖에 폴커 슐뢴도르프(독일)의 <마이클 콜하스>, 조지 큐커(미국)의 <쥐스틴>,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독일)의 <중국식 룰렛>(1976), 라울 루이즈(칠레)의 <보물섬>, 조나단 데미(미국)의 <찰리의 진실> 등 외국의 명장들이 카리나와 함께 제 비전을 완성했다.

<이방인>, 1967

<마이클 콜하스>, 1968

<쥐스틴>, 1969 / <중국식 룰렛>, 1976 / <찰리의 진실>, 2002


#realisateur_annakarina

<리빙 투게더>, 1973

서른세 살 되던 해, 안나 카리나는 감독으로서 첫 작품 <리빙 투게더>를 만들었다. 잘 정돈된 생활을 영위하던 알랭(미셸 랑슬로)이 자유분방한 여인 줄리(안나 카리나)를 만나 직업을 버리고 같이 뉴욕으로 건너가 보헤미안적 삶을 사는 과정을 그렸다. 라스카 프로덕션을 설립해 직접 제작까지 도맡은 <리빙 투게더>는 평소 친한 스탭들과 함께 카리나의 집과 뉴욕에서 촬영을 진행했다. 제작비로만 재산을 거의 탕진해 펀딩에 중요성을 깨달았던 카리나는 오랫동안 감독으로 돌아오지 못하다가 2008년 두 번째 연출작 <빅토리아>를 발표했다. 교통사고로 실어증과 기억상실증에 걸린 빅토리아가 두 프랑스 가수와 퀘벡을 여행하는 로드무비다. 카리나는 심사위원 자격으로 <빅토리아>를 들고 부산국제영화제에 방문한 바 있다. <빅토리아>는 카리나의 마지막 출연/연출작이다.

2008년 부산국제영화제 방문 당시


#musique

덴마크 시절부터 카바레 가수로 활동했다고 알려진 안나 카리나는 여러 영화들에서 출중한 노래 솜씨를 자랑했다. <셸부르의 우산>의 미셸 르그랑이 음악을 만든 <여자는 여자다>에서 부른 ‘Chanson d'Angela’가 영화 속 카리나의 첫 노래다. TV 영화 <안나>가 흥행에 성공한 데엔 세르쥬 갱스부르가 관장한 사운드트랙 중 카리나가 노래한 ‘Roller Girl’과 ‘Sous le soleil exactement’(태양 바로 아래서)의 인기에 힘입은 바가 크다. 감독을 맡은 영화 <리빙 투게더>에선 갱스부르와 작업한 미발표곡 둘을 사용했다. 이후에도 영화 속에서 가창을 선보인 카리나는 자크 리베트의 <파리의 숨바꼭질>(1995), <양들의 침묵>의 조나단 데미가 할리우드 고전 <샤레이드>(1963)를 리메이크 한 <찰리의 진실>에서는 카바레 가수 역할을 맡기도 했다.

2000년엔 <사랑의 역사>라는 이름의 음반을 발표했다. 프랑스 뮤지션 카트린이 음악을 만들고, 카리나가 가사를 쓰고 노래한 작품들이 모였다. 이 앨범을 발표하면서 가수로서 세계 투어를 진행하던 와중 스페인에서 만난 이의 지원으로 <빅토리아>를 연출할 수 있었다고. 안데르센의 동화 <미운 오리 새끼>, <인어공주>를 바탕으로 한 동요앨범에도 가사와 노래로 참여한 바 있다.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