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걸출한 인디 밴드 본 이베어(Bon Iver)가 오는 1월 12일 내한 공연을 갖는다. 2016년 2월 이후 3년 만의 내한공연. 그 사이 본 이베어는 전작과 전혀 다른 스타일의 앨범 <22, A Million>과 <i, i>를 발표했고, 한달 뒤 열리는 그래미 어워드에 '올해의 앨범'과 '올해의 레코드' 부문에 오를 만큼 외적으로도 성장했다. 영화 속에 쓰인 본 이베어의 음악들을 곱씹어보면서 콘서트에 대한 기대를 한껏 높여보자.


"Roslyn"

<뉴 문> (2009)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사운드트랙은 오리지널 스코어와 여러 아티스트의 노래들을 모은 컴필레이션 두 판본으로 나왔다. <그레이 아나토미>와 <가십 걸> 등의 음악 수퍼바이저를 담당했던 알렉산드라 팟사바스는 기존의 명곡들이 아닌 해당 영화를 위한 신곡을 각 아티스트들에게 의뢰해 그 결과물을 모아 <트와일라잇> 속 음악을 구성했다. 제작비 대비 14배에 달하는 수익을 모아 <트와일라잇> 시리즈에서 가장 큰 성공을 기록한 <뉴 문>은 톰 요크(Thom Yorke), 킬러스(The Killers), 뮤즈(Muse), 데스 캡 포 뷰티(Death Cab for Beauty) 등의 새 싱글들로 이 뱀파이어 로맨스의 오글거림을 얼마간 중화시킨다. <그레이 아나토미> 시즌 2에 본 이베어의 'Skinny Love'를 선곡한 바 있는 팟사바스는 본 이베어와 함께 2009년 당시 미국 인디 신의 새로운 재능으로 주목 받던 세인트 빈센트(St. Vincent)의 듀엣 'Roslyn'을 성사시켜 출중한 기획력을 다시 한번 증명했다. 자신이 영영 뱀파이어가 될 수 없을 거라는 걸 깨닫게 된 벨라(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에드워드(로버트 패틴슨)와의 사진을 반으로 접어 놓고, 그를 그리워 하다가 이내 만나게 되는 대목에 쓰였다.


"Wisconsin"

<레스트리스> (2011)

포근한 어쿠스틱 악기들과 몽롱한 앰비언트가 어우러진 본 이베어의 음악은 한밤 중의 BGM으로 아주 그만이다. '좋은 겨울'이라는 밴드 이름처럼 그게 서늘한 계절의 밤이라면 더더욱 황홀할 터. 미국 인디 문화의 거장 구스 반 산트 역시 본 이베어의 장점을 파악해 데뷔 앨범 <For Emma, Forever Ago>의 히든 트랙으로 공개된 'Wisconsin'을 배치했다. 어렵사리 마음의 문을 연 이녹(헨리 후퍼)과 싸운 뒤 애니(미와 바시코브스카)는 한밤까지 깨어 있다가 홀로 할로윈 사탕들을 분류하고 있고, 곧 언니가 곁에 앉는다. "이녹 얘기 안 하니?"라고 묻자 애니는 "언니는 전 남친들 보고 싶어?"라고 대답한다. 갑자기 훈훈한 분위기가 틀어지는 듯하다가 'Wisconsin'이 퍼트리는 새벽의 따뜻한 공기는 다시금 자연스러워진다. 그럼에도 얼마 지나지 않아 애니가 발작을 일으키면서 평화는 깨지고 만다. 여전히 잔잔한 음악 때문에 상황은 더욱 다급해 보인다.


"Holocene"

<우리는 동물원을 샀다> (2012)

음악잡지 <롤링스톤> 기자 출신의 감독 카메론 크로우는 <클럽 싱글즈>(1992), <올모스트 페이머스>(2000), <바닐라 스카이>(2001) 등을 통해 특유의 선곡 센스를 발휘해왔다. 시규어 로스(Sigur Rós)의 욘시(Jónsi)가 오리지널 스코어를 만든 <우리는 동물원을 샀다> 역시 영화 전반에 윌코(Wilco), 밥 딜런(Bob Dylan), 에디 베더(Eddie Veder), 닐 영(Neil Young) 등의 명곡들이 넘실댄다. 본 이베어의 두 번째 앨범이자 최고 걸작 <Bon Iver, Bon Iver>에 수록된 'Holocene'은 격한 감정을 다소 성급히 다독이는 역할을 한다. 벤자민(맷 데이먼)은 새 집에 딸린 동물원을 인수하고 개장을 준비하는 가운데, 호랑이 스파에 대해 견해 차이로 켈리(스칼렛 요한슨)와 언성을 높이며 싸운다. 켈리가 집에 돌아와 어둑어둑해지자 'Holocene'이 흐르면, 그는 벤자민의 아들과 감정을 털어놓는 것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격렬했던 분위기는 한순간에 녹아버린다. 뒤늦게 집에 오는 벤자민이 아무런 말 없이 켈리의 손을 꼭 붙드는 것조차 자연스러울 정도의 온기.


"Wash." & "The Wolves (Act I And II)"

<러스트 앤 본> (2012)

이만큼 본 이베어의 음악에 애정을 드러낸 영화가 또 있을까. 프랑스 영화 <러스트 앤 본>은 오프닝과 엔딩에 각각 본 이베어의 'Wash.'와 'The Wolves'를 사용했다. 삼류복서 알리(마티아스 쇼에나에츠)가 아들과 함께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는 도입부는 처음엔 주변의 현실적인 소리만 강조하다가 그들이 열차에 탑승한 후에는 'Wash.'와 함께 이 부자의 여정을 따라간다. 아무리 이동해도 그들은 정착하지 못한 채 거리에서 시간을 보내고, 'Wash.'의 따뜻한 소리는 처량한 처지에 가까스로 숨통을 트이게 한다. 'The Wolves'가 쓰인 결말은 차라리 판타지 같다. 좌절과 희망을 끊임없이 오가던 영화는 결국 희망으로 마무리되는 것'처럼' 멎는다. 기타 소리의 공명을 중첩된 목소리들이 감싸면서 서서히 감정을 부풀리는 'The Wolves' 아래, 러닝타임 내내 빛을 더듬던 인물들은 빛에 싸여 사라지고 만다. 이를 해피엔딩으로 받아들일지는 관객의 몫에 남겨둔다. 비슷한 시기에 한국에 개봉한 <플레이스 비욘드 더 파인즈> 역시 엔딩에 본 이베어의 'The Wolves'를 사용한 바 있다.


"Skinny Love"

<우리가 들려줄 이야기> (2013)

본 이베어의 노래들은 좀처럼 격해지지 않는다. 감정의 농도가 아무리 깊어질지언정 저스틴 버논의 보컬은 거센 소리를 내뱉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Skinny Love'는 그 드문 예외다. 시작부터 꽤나 힘차게 컨트리 풍의 멜로디를 풀어내고 갈수록 텐션을 올리는 버논의 열창으로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가는 전개 덕분에 'Skinny Love'는 본 이베어의 데뷔 앨범 <For Emma, Forever Go>에서 유독 많은 사랑을 받았다. 배우로 데뷔해 <우리도 사랑일까>(2011)로 감독의 입지를 굳힌 사라 폴리의 자전적인 다큐멘터리 <우리가 들려줄 이야기>는 'Skinny Love'가 오프닝을 장식한다. 폴리의 가족들이 카메라 앞에 서고 아버지가 스튜디오로 들어오는 과정이 이 기운찬 노래를 만나 그저 밝아 보이지만, 흑백 화면 속 어머니가 드문드문 비춰지면서 "우리가 들려줄 이야기"가 바로 현생의 모습으로 카메라를 마주할 수 없는 이 여인에 관한다는 걸 직감한다.


"Hinnom, TX"

<웜 바디스> (2013)

모든 게 파괴돼 버렸지만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공항을 빠져 나온 R(니콜라스 홀트)와 줄리(테레사 팔머). M의 도움 덕분에 안전한 곳으로 도착하지만 거기에서도 좀비들은 인간인 줄리를 알아채고 서서히 몰려든다. R은 줄리의 손을 잡고 좀비들 사이를 빠져나온다. 오픈 카에 탄 두 사람이 빗속을 달리는 신에서 본 이베어의 'Hinnom, TX'가 울려퍼지기 시작한다. 수면 위에 퍼지는 진동처럼 건반 소리가 일정치 않은 속도로 공명하는 가운데, R은 방향 없이 또렷한 눈빛을 하고 가만히 앉아 있다. 손을 맞잡는 순간, 사랑이라는 걸 깨달은 것처럼. 저스틴 버논의 독특한 목소리 덕분에 본 이베어의 음악은 으레 숭고하다는 감상이 따르곤 하는데, 제대로 된 대화 없이 빗속을 질주하는 이 신에 깔리는 'Hinnom, TX'은 분명 관능적으로 들린다. 이 음악 덕분에, 줄리의 집에 들어와 진행되는 시퀀스에 섹슈얼한 긴장이 유효해진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터.


"Do You Need Power?"

<크리드 2> (2018)

스포츠, 그것도 복싱을 다룬 영화와 본 이베어에 음악이 쓰인다니. <크리드 2>의 OST 트랙리스트가 공개됐을 때 많은 음악 팬들이 놀랐다. 힙합 프로듀서 마이크 윌 메이드잇(Mike Will Made-It)이 프로듀싱을 맡은 'The Album' 버전 사운드트랙을 가득 메운 힙합/R&B 뮤지션들 명단 가운데 본 이베어의 존재는 확실히 별나 보였다. 하지만 위화감은 없다. <크리드 2>의 엔딩 크레딧을 장식하는 'Do You Need Power?'는 본 이베어의 작업이라기보다 마이크 윌 메이드잇의 비트에 저스틴 버논이 목소리와 멜로디를 보탠 트랙이라고 보는 게 맞기 때문이다. 릴 웨인(Lil Wayne)의 랩 트랙 'Amen'과 한 곡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Do You Need Power?'는 주요 기술진 스탭들이 지나가고 배우들의 크레딧을 수식한다.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