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래버티와 켄 로치

'블루칼라의 시인'이라 불리는 영국의 거장 켄 로치 감독은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줄곧 인권변호사 출신의 시나리오 작가 폴 래버티와 함께 협업을 이어오고 있다. 그 사이 그들의 작품은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두 번이나 수상하는 쾌거를 기록했다. 절찬상영중인 2019년 신작 <미안해요, 리키>와 더불어 켄 로치& 폴 래버티 콤비의 대표작을 살펴본다.


칼라송

Carla's Song, 1996

켄 로치와 폴 래버티의 첫 협업. 로치의 전작 <랜드 앤 프리덤>(1995)에 출연한 래버티는 시나리오 데뷔작 <칼라 송>으로 로치와의 오랜 여정을 시작했다. 스페인 내전을 다뤘던 <랜드 앤 프리덤>을 통해 자국 영국을 넘어 국제 사회를 향한 관심을 드러냈던 로치의 시선은 중앙아메리카 니카라과로 향했다.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 버스를 운전하는 조지는 버스에서 무임승차 시비에 휘말린 니카라과에서 온 무용수 칼라를 돕고 둘은 사랑에 빠진다. 고국에서 경험한 내전으로 인한 상처에 괴로워 하는 칼라와 함께 니카라과에 간 조지는 칼라가 겪은 참상들을 목격하게 된다. 사랑이라는 개인사를 경유해 내전의 현실로 침투하는 형식이 인상적이다.


내 이름은 조

My Name Is Joe, 1998

다시,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알콜중독자인 조는 술을 끊고 실업수당으로 연명하면서 알콜중독을 앓는 이들로 이뤄진 아마추어 축구단의 코치로 활약한다. 가정보호소 상담원인 사라와 가까워지면서 새로운 삶을 꿈꾸던 그는 마약 때문에 빚 독촉에 시달리는 축구단의 일원 리암을 도우려다가 그 역시 위험에 빠지게 된다. 데이트 비용이 없으면 근처에 있던 경찰이 돈을 보태줄 정도로 마을에서 착한 심성으로 소문난 인물 조를 통해 사회의 위험에 노출된 서민들의 처지를 고발하고 실낱같은 희망을 찾아가는 작품이다. 켄 로치의 1991년 작 <하층민들>에 작은 역할로 참여한 바 있는 피터 뮬란은 주인공 조를 연기해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빵과 장미

Bread and Roses, 2000

노동자 계급에 향한 켄 로치의 관심은 미국 LA에서도 여전하다. 1912년 메사추세츠주 로렌스시에서 일어난 이민 여성들의 섬유 파업에서 그 제목을 따온 영화는, LA의 으리으리한 빌딩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미화원의 노조 결성을 이끄는 활동가 샘(애드리언 브로디)이 멕시코에서 이주해온 마야를 만나 보다 힘찬 목소리로 노동자의 권리를 외치는 과정을 그린다. 미화원의 열악한 노동 조건을 고발하면서도 꽤나 유쾌한 톤으로 희망을 향해 나아간다. 시나리오도 없이 오직 켄 로치에 대한 믿음으로 출연을 결정한 애드리언 브로디는 직접 비밀리에 LA 내 노동조합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샘의 캐릭터를 구축했다.


달콤한 열여섯

Sweet Sixteen, 2002

<달콤한 열여섯>은 미성년을 주인공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켄 로치의 초기 걸작 <케스>(1969)가 떠오른다. 내전이나 파업 같은 정치적인 현장과는 동떨어져 보이지만, 사회의 약체인 청소년이 보호받지 못하는 사회를 경유하기 때문에 현실의 잔혹함이 더 두드러진다. 제목 '달콤한 열여섯'은 완전한 반어다. 16살 소년 리암은 마약을 판다. 감옥에서 복역 중인 마약중독자 엄마와 같이 사는, 지극히 평범한 가정을 꾸리는 게 그의 유일한 소망이다. 온갖 역경에도 끈질기게 희망을 더듬어가던 켄 로치와 폴 래버티는 <달콤한 열여섯>의 소년에게 유독 가혹한 현실을 덧씌운다. 욕이 많이 나오는 탓에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을 받았던 <달콤한 열여섯>은 영화의 배경인 스코틀랜드 사람들의 항의 힘입어 그 지역에서만 청소년 관람가를 받았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The Wind That Shakes the Barley, 2006

아일랜드 시인 로버트 드와이어 조이스의 시에서 제목을 려온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독립 전쟁이 일어난 1920년대 아일랜드를 재현한다. 아일랜드 출신의 배우 킬리언 머피와 패드레익 들러니가 주인공에 캐스팅 됐다. 아일랜드의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참전한 두 청년 데미엔과 테드는 같은 목표를 품고 전쟁에 투신한다. 하지만 일부 지역의 자치만 허용하는 평화 조약을 둘러싼 의견차를 좁히지 못하고 서로 등 돌린다. 켄 로치는 이 작품이 특정한 시대를 배경 삼았지만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던 투쟁과 독립 이야기고, 형과 동생 어느 한쪽에 손을 들어주기보다 상반된 선택의 지독함을 보여주는 데에 초점을 맞췄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2006년 칸 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돼 왕가위 감독을 비롯한 심사위원들의 만장일치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앤젤스 셰어: 천사를 위한 위스키

The Angels' Share, 2012

가볍다. 어두운 현실에 향한 냉철한 시선으로 똘똘 뭉쳤던 전작들에 비하면 <앤젤스 셰어: 천사를 위한 위스키>는 한결 유쾌한 터치가 돋보인다. 불행한 유년시절을 보낸 로비는 변변한 직장 하나 없는 채로 아버지가 됐다. 장인어른마저 돈을 줄 테니 가족을 떠나라고 강요하는 상황. 좌절하지 않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모색하던 그는 와인 감별에 남다른 재능이 있음을 알게 된다. 한통에 수십 억을 호가하는 위스키를 훔치기 위한 소동극이 펼쳐지는 <앤젤스 셰어: 천사를 위한 위스키>는 팍팍한 현실보다는 그들의 벌이는 소동이 우여곡절 끝에 굴러가는 데에 집중한다. 너무나 관대해진 켄 로치의 태도가 낯설긴 해도, 캐릭터들의 사랑스러운 매력이 돋보이는 판타지 같은 이야기에 매료될 수밖에 없을 것.


나, 다니엘 블레이크

I, Daniel Blake, 2016

1930년대를 배경으로 마을회관을 지키기 위한 과정을 담은 <지미스 홀>(2014) 이후 은퇴를 선언했던 켄 로치는 2015년 보수당이 집권하는 걸 보고 여전히 자신이 영화로 보여줄 현실이 많다는 걸 깨닫고 폴 래버티 뿐만 아니라 프로듀서, 음악감독, 미술감독, 편집감독 모두 그대로 참여한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발표했다.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고 혼자 살아가는 목수 다니엘은 심장병이 악화되자 실업급여를 받으려고 하지만 관공서의 까다로운 절차에 밀려 번번히 좌절한다. 부당한 복지제도와 관료주의에 대한 비판이 먼저 보이지만 결국 관객들의 마음에 남는 건 다니엘 블레이크라는 소시민이 보여주는 의지와 존엄이다. 켄 로치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이후 꼭 10년 만에 다시 한번 칸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그해 심사위원장은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로 건재함을 증명한 조지 밀러였다.


미안해요, 리키

Sorry We Missed You, 2019

켄 로치가 <나, 다니엘 블레이크> 이후 또 한번 은퇴를 번복하게 만든 건 '기그 이코노미'의 문제성을 환기시키기 위해서다. 이는 기업이 근로자를 정규 채용하지 않고 필요할 때만 임시로 일을 맡기는 고용 형태를 뜻한다. <미안해요, 리키>는 켄 로치와 폴 래버티가 그려낸 현실 중 가장 잔인하다. 연이어 사업에 실패하고 방문간병인 일을 하는 아내의 차까지 팔아 택배기사 일을 시작한 리키는 목돈을 벌기는커녕 갈수록 험난한 고난에 부딪힌다. 부모 모두가 한나절 이상을 바깥에서 일하는 탓에 아이들은 방치되고, 한 식탁에 앉아 다함께 밥을 먹는 걸 중요하게 여겼던 리키 가족은 서서히 부서진다. 한국 개봉 버전이 가장인 리키를 향한 연민을 담고 있지만, 리키와 그의 아내. 아들, 딸 모두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경험한다는 점에서 그 아픔이 더 크게 닿는다.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