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터는 영화의 얼굴이다. 속내를 알기 전 얼굴만 봐도 호감이 피어나듯, 포스터가 주는 인상은 영화를 선택하는 데에 꽤나 큰 영향을 미친다. 2019년 공개된 영화 포스터 가운데 유독 인상적인 작품들을 소개한다.


버즈 오브 프레이

(할리 퀸의 황홀한 해방)

Birds of Prey (and the Fantabulous Emancipation of One Harley Quinn)

절대적인 매력으로 <수어사이드 스쿼드>(2016)를 구사일생 시킨 할리 퀸의 첫 솔로영화 <버즈 오브 프레이 (할리 퀸의 황홀한 해방)>은 포스터부터 '약빤' 영화임을 드러낸다. 오랜 연인이던 조커를 떠나 보낸 할리 퀸(마고 로비)이 헌트리스, 블랙 카나리, 몬토야 형사 등 여성 동료들과 함께 고담시의 가장 사악한 빌런 블랙 마스크(이완 맥그리거)에 맞서 싸우는 형국이 그저 장난스러워 보인다. DC 유니버스 특유의 어두컴컴한 세계관을 떠올리자면 더욱 의외의 모양새다.


존 윅 3: 파라벨룸

John Wick Chapter 3: Parabellum

2010년대를 대표하는 액션 히어로 존 윅을 가로지르는 두 개의 키워드. '무적'과 '외로움'이다. 시리즈를 거듭할수록 더 많은 적들을 마주하는 존은 3편에 이르면, 국제암살자연맹의 파문 조치가 내려져 세계 각지 출신의 킬러들을 상대해야 한다. 다행히 동료들의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싸움 판에선 결국 그는 혼자가 된다. 티저 포스터는 새파란 밤빛 아래, 존이 눈 앞에 수십 명의 킬러들을 마주한 처지를 대각선의 구도로 제시해 막막함을 강조했다.


어스

Us

휴가철을 맞아 산타 크루즈에 놀러간 애들레이드(루피타 뇽)의 가족은 시뻘건 옷을 입은 도플갱어들의 습격을 받는다. 말로는 좀체 이해가 안 되는 설정을 포스터가 직접 제시한다. 온화한 얼굴을 한 애들레이드의 가면을 벗으면 섬뜩하리만치 눈을 크게 뜬 채 눈물을 흘리는 레드가 보인다. 전혀 처음 보는 루피타 뇽의 얼굴이 순식간에 오싹한 분위기를 퍼트린다.


강변호텔

홍상수의 <강변호텔> 포스터는 본편에 대한 정보가 전무하다. 영화 주인공인 영환(기주봉)은 온데간데 없고, 뒷모습이라 제대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상희(김민희)와 연주(송선미)가 저 먼데까지 새하얀 설원을 바라보는 풍경을 바라보는 게 전부. 김형구 촬영감독이 담아낸 영화 속 장면을 세로로 잘라낸 것이다. 먹으로 그린 풍경화를 보는 듯한 아름다움. 눈발 같은 도트가 모인 폰트로 하늘을 채운 제목과 두 여자 곁에서 서 있는 키 작은 나무가 온전히 프레임에 담긴 해외용 포스터가 훨씬 좋다.


원더 우먼 1984

Wonder Woman 1984

싸이키델릭! 대성공을 거둔 <원더 우먼>(2017) 이후 3년 만에 공개될 속편 <원더 우먼 1984> 티저 포스터는 시신경을 확 자극하는 원색의 'W'들에 둘러싸인 채 꼿꼿하게 서 있는 원더 우먼의 자태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전편의 배경이었던 1차 세계 대전 시기보다 훨씬 미래인 1984년에서 펼쳐지는 <원더 우먼 1984>은 블링블링 디스코가 한창인 호화로운 시대의 한복판에서 진행될 거라고 선언하는 듯하다. 그나저나 새 수트는 얼마나 강력할까? 황금관은 왜 벗어던진 걸까?


언컷 젬스

Uncut Gems

당대 미국영화계 가장 빛나는 재능으로 손꼽히는 사프디 형제의 신작 <언컷 젬스> 포스터는 온통 흑백이다. 핫핑크 페인트를 뒤집어 쓴 두 형제의 처지처럼 붉은색 기운이 전면에 퍼졌던 전작 <굿타임>과는 딴판. 여기저기 엉망이 된 얼굴을 매만지는 애덤 샌들러가 하단을 크게 차지하고 있는 포스터는 빚에 쫓기는 보석상 하워드가 뉴욕 한복판에서 고군분투 하는 <언컷 젬스>의 줄기를 단출하되 강력하게 나타낸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Once Upon a Time... in Hollywood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의 주인공 릭 달튼(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은 '왕년의' 액션스타다. 들어오는 작품도 신통치 않고, 제 연기력도 성에 차지 않아 괴로워하는 릭은 한 제작자의 소개로 이탈리아 액션영화들에 출연하게 된다. 과거의 문화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드러내온 쿠엔틴 타란티노는 릭이 출연한 이탈리아 영화들을 따로 포스터로 제작해 프로모션에 활용했다. 극장 간판 화가가 그린 듯한 화풍, 큼직큼직 배치된 제목, 이탈리아 영화 포스터 특유의 세로가 월등히 긴 비율까지 완벽하게 재현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Portrait de la jeune fille en feu

2019년 최고작으로 손꼽히는 프랑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미국 개봉 포스터는 미니멀리즘 그 자체다. 엘로이즈(아델 에넬)가 불타는 모습만 담은 오리지널 포스터와 달리, 이 비전은 물감의 질감을 확 살려 불의 형상을 표현한 추상화만 커다랗게 박혀 있다. 그야말로, 타오르는 아름다움. A24를 잇는 미국의 핫한 배급사 'NEON'(봉준호의 <기생충>도 여기서 배급했다)의 센스가 돋보인다.


기생충

봉준호가 글로벌 프로젝트 <설국열차>와 <옥자>를 마치고 오랜만에 한국 배우들이 한국어를 구사하는 영화로 돌아온 <기생충>은 포스터부터 도전적이었다. 네 가족 모두가 무직자인 가정의 아들이 부잣집에 과외를 가면서 생기는 사건을 그린 블랙코미디라고 알려져 있던 영화를 보다 알쏭달쏭 하게 만드는 요소로 가득했다. 최우식이 들고 있는 수석과 유리창에 비춰진 인디언 텐트는 무엇이고, 인물들의 눈은 왜 가려져 있고 왜 그 색은 서로 다른지, 결정적으로 왼쪽 하단의 창백한 여자 다리는 포스터엔 없는 박소담과 장혜진 둘 중 누구의 것인지, 2019년 최고 기대작에 대한 궁금증을 부풀렸다. <그때 그 사람들>(2005), <친절한 금자씨>(2005), <괴물>(2006) 등의 포스터를 만든 김상만 디자이너가 영화감독 활동에 매진하다가 오랜만에 작업한 포스터다.


애드 아스트라

Ad Astra

<애드 아스트라>는 제작자/배우로서 브래드 피트의 야심으로 가득한 SF다. 피트가 운영하는 제작사 '플랜 B'가 제작하고, 피트가 연기한 로이가 러닝타임 대부분을 홀로 활약한다. 제임스 그레이 특유의 시적인 연출이 고스란히 담긴, (천박하게) 다시 말하자면 상업적인 성공에 대한 고려가 거의 없는 듯한 영화에 1억 달러를 쏟아부은 영화의 티저 포스터는 할리우드 최고 스타 브래드 피트의 얼굴은커녕 몸 전체에 노이즈가 끼어 있고 그 크기조차 작은 편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칠흑 안에 사내의 육체를 덩그라니 띄워놓은 포스터야말로 영화를 제대로 함축하고 있다고 깨닫게 될 터.


미드소마

Midsommar

<유전>(2018)으로 성공적인 신고식을 치른 아리 애스터는 불과 1년 만에 신작 <미드소마>를 발표했다. 낮이 가장 긴 시기에 진행되는 스웨덴의 축제 하지제(미드소마)를 소재 삼아 대낮에 펼쳐지는 호러라는 특징을 밀어붙였다. 차라리 "우는 여자를 찍은 영화"라고 부르고 싶을 만큼, 가족 모두가 죽고 사랑이 박살나고 있음을 직감하는 주인공 대니(플로렌스 퓨)는 영화 내내 서럽게 운다. 그리고 그 많은 눈물 끝에 웃고 만다. 눈물 흘리고 있는 플로렌스 퓨의 얼굴만 비스듬히 클로즈업 한 포스터는 얼핏 보기에 전혀 공포영화의 것 같지 않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千と千尋の神隠し

중국의 디자이너 황해는 작년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웃집 토토로>(1988)과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어느 가족>(2018)의 중국 개봉 포스터를 만들어 극찬 받았다. 올해 6월, <이웃집 토토로>에 이어 또 다른 지브리 작품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중국에 개봉됐는데, 이 포스터 역시 눈부시게 아름답다. 물이 가득 고인 철길 위를 씩씩하게 거슬러 올라가는 센의 모습 위로 용이 된 하쿠와 가오나시의 형상이 어른거린다. 이미지 안에 담긴 조형미와 무드가 놀라울 따름.

2018년에 공개된 <어느 가족>, <이웃집 토토로> 포스터


결혼 이야기

Marriage Story

노아 바움백이 스칼렛 요한슨/애덤 드라이버와 손잡고 만든 <결혼 이야기>는 뉴욕에서 결혼 생활을 하던 배우/감독 부부가 아내의 고향인 LA에서 이혼 소송을 벌이는 과정을 담은 작품이다. 햇볕이 풍성하게 내리는 LA의 모습이 담긴 스칼렛 요한슨의 실루엣과 어스름이 오기 전의 적막한 뉴욕 풍경으로 채워진 애덤 드라이버의 실루엣, 두 버전으로 티저 포스터가 나왔다. 형식은 비슷하지만 세부는 전혀 다른 모양새가 이제는 서로 남이 되는 부부의 '결혼' 이야기임을 나타낸다.


수베니어

The Souvenir

올해 믿을 만한 '최고의 영화' 리스트에는 빠짐 없이 등장하던 <수베니어>는 그 포스터까지 찬사를 받았다. 부유한 가정에서 걱정 하나 없이 자란 여자와 믿을 구석이 단 하나도 없는 남자의 건조한 로맨스를 반영하듯 서로 다른 곳을 보는 연인의 얼굴은 저 위에 배치돼 반 이상이 잘려졌고, 그 아래 프레임 과반을 차지한 물체에 흐릿하게 비춰져 있다. 실제 얼굴과 투영된 얼굴의 크기가 서로 제각각인 형상이 그들의 관계를 은유하는 것 같다.


캡틴 마블

Captain Marvel

고양이.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