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검사외전>과 <대배우>가 비슷한 시기에 개봉하면서 '한국대표 감독의 조감독들 충무로 접수'류의 기사가 많이 떴다. <검사외전>은 윤종빈 감독의 조감독이었던 이일형 감독이, <대배우>는 박찬욱 감독의 조감독을 지낸 석민우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첫 작품이다. 이 대열에 또다른 감독을 추가해야겠다. 바로 <럭키>의 이계벽 감독이다. 그는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2002) 연출부와 <올드보이>(2003) 조감독을 거쳐 2005년 <야수와 미녀>로 데뷔한 바 있다. <럭키>는 그가 11년 만에 내놓는 두 번째 연출작이다.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충무로에서 감독이 되기 위해 연출부, 조감독 생활을 거쳐야 하는 게 불문율이었던지라 (홍상수, 김기덕을 제외하곤 모두 이 도제 시스템을 거쳤다) 현재까지도 이 과정을 지내고 감독으로 데뷔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은 편이다. 범위를 조금 좁혀, 한국영화계를 대표하는 네 감독 김기덕, 홍상수, 박찬욱, 봉준호의 조감독 출신 감독들은 누가 있는지 짚어보자.
감독 최다 배출!
'김기덕 사단'
누가 있을까?
<빈 집>(2004)의 연출부, <활>(2005)과 <시간>(2006)의 조감독이었던 장훈 감독은 김기덕이 제작과 각본을 맡은 <영화는 영화다>(2008)로 데뷔했다. 6억이라는 저예산으로 제작돼 초반엔 소지섭과 강지환 두 배우의 이름값에 비해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결국 제작비 8배의 수익을 거둬들이며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만족시켰다. 성공적인 데뷔 이후, 장훈 감독은 <의형제>(2010)로 550만 관객을 기록하고, <고지전>(2011)이 전쟁영화로서 뛰어난 완성도를 인정받으면서 충무로가 가장 주목하는 감독으로 손꼽혔다. 4년 사이 3편을 만들 정도로 왕성한 창작력을 보여주던 장훈은, <고지전> 개봉 즈음 김기덕 감독과의 불화가 알려지면서,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다. 현재 송강호와 독일배우 토마스 크레취만이 함께 하는 6년 만의 신작 <택시운전사>를 작업 중에 있다.
장철수 역시 ‘김기덕 사단’ 출신 가운데 성공적인 커리어를 자랑하고 있는 감독이다. (장훈이 연출부로 합류하기 직전의 시기인) <해안선>(2002)의 연출부,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과 <사마리아>(2004)의 조감독을 지낸 그는, 외딴 섬마을에서 온갖 착취에 시달리는 여성의 잔혹한 복수를 그린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2010)로 입봉했다. 처참한 현실과 상당한 수위의 폭력 묘사로 화제를 모은 영화는 장철수 감독의 다음 작품에 대한 기대치를 확 올려놓았다. 3년 후 발표한 <은밀하게 위대하게>(2013)는 배우 김수현의 티켓파워와 원작 웹툰의 인기로 700만 명에 육박하는 흥행을 기록했지만, 만듦새는 전작에 비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기덕 감독이 한국영화계에 남긴 의미있는 흔적 중 하나는, 2004년 설립한 '김기덕 필름'을 통해 자신의 제자였던 감독들의 데뷔를 적극적으로 이끌었다는 점이다. <아름답다>(2007)와 <풍산개>(2011)를 연출한 전재홍 감독, <붉은 가족>(2012)의 이주형 감독, <신의 선물>(2013)의 문시현 감독, <메이드 인 차이나>(2015)의 김동후 감독 모두 김기덕 필름이 제작한 영화로 연출자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피터 팬의 공식>(2005)과 <폭풍전야>(2010)의 조창호 감독, <시라노: 연애조작단>(2010)과 <쎄시봉>(2015)의 김현석 감독은 <섬>(2000), <나쁜 남자>(2001) 등 김기덕의 초기작 현장 경험을 거친 케이스다.
현실적이거나
꿈을 헤메거나.
홍상수와 그의 조감독들,
사제는 닮는다?
<극장전>(2005), <해변의 여인>(2006), <잘 알지도 못하면서>(2008), <하하하>(2009) 등 오랫동안 홍상수의 영화 현장을 지켰던 이광국 감독은 독립영화 <로맨스 조>(2011)로 데뷔했다. 언뜻 밋밋해 보이는 이야기들이 복잡하게 얽히고설키는 기묘한 로맨스는 소수 마니아층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고, 이듬해 발표한 단편 <말로는 힘들어>(2012)는 일상과 환상의 발을 걸친 채 귀여운 순간들을 포착해내는 감독의 재능을 각인시켰다. 홍상수 영화를 대표하는 배우인 유준상을 기용한 장편 <꿈보다 해몽>(2014)은 꿈이라는 모티브를 전면에 내세워 미처 보지 못한 현실의 이면을 들여다본다. 최근 인권 옴니버스영화 <시선 사이>의 일환으로 연출한 단편 <소주와 아이스크림>까지, 소소한 일상을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풀어낸 진귀한 이야기들로 필모그래피를 빼곡하게 다져나가고 있다.
단편 <느린 여름>(1998)으로 부산국제영화제 선재상을 받았던 박찬옥 감독은, 홍상수 감독의 <오! 수정>(2000)의 조감독으로서 현장을 배운 뒤, 데뷔작 <질투는 나의 힘>(2002)을 내놓았다. 일상의 면면이 고스란히 살아 있는 대사와 지질한 구석까지 파고드는 연애의 풍경이 주를 이루는 영화는, 로테르담영화제에서 경쟁부문 최고상에 해당하는 타이거상과 부산국제영화제의 상징이라 할 만한 뉴커런츠상을 받으며 독보적인 존재감을 기대케 했다. 하지만 7년 만에 발표한 두 번째 장편 <파주>(2009)가 평단의 호평을 받은 데 반해 관객수 13만을 기록하며 시장에서 참패한 후, 오랫동안 감감무소식인 상황이다. <오! 수정>의 연출부였던 부지영 감독은 훗날 공효진, 신민아 주연의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2008)로 데뷔해 '여성영화'에 대한 관심을 드러낸 후 '여성'과 '노동자'의 키워드를 가로지르는 <카트>(2014)를 연출했다.
<럭키> 이계벽 감독을 잇는
박찬욱 연출부 출신
감독 또 있다고?
<잉투기>(2013)로 독립영화계 스타로 떠오른 엄태화 감독 역시 박찬욱 감독의 연출부 출신이다. (옴니버스 영화 <쓰리, 몬스터> 가운데 하나인) 단편 <컷>(2004)에 참여한 그는 <친절한 금자씨> 연출부와 (박찬욱과 동생 박찬경 감독이 공동연출한) 단편 <파란만장>(2010)의 조연출을 거쳤다. 대개 몇년 간의 연출부 생활을 지낸 후 상업영화 데뷔를 모색하기 마련인데, 엄태화 감독은 독립영화계로 발을 돌려 동생인 엄태구를 주연으로 삼아 <유숙자>(2010), <하트바이브레이터>(2011), <숲>(2012) 등 단편을 꾸준히 연출한 뒤 첫 장편 <잉투기>를 내놓았다. 오는 11월, 강동원 주연의 판타지 <가려진 시간>(2016)으로 상업영화 출사표를 던진다.
이경미 감독은 단편 <잘돼가? 무엇이든>(2004)이 미장센 단편영화제에서 수상하며 심사위원이었던 박찬욱 감독과 연을 맺기 시작했다. <친절한 금자씨>(<대배우>의 석민우 감독이 이 영화의 조감독이었다)의 스크립터를 맡았던 이경미는, 3년 뒤 박찬욱 감독이 제작하고 각본을 같이 쓴 첫 장편 <미쓰 홍당무>(2008)를 연출했다. 전대미문의 여성 캐릭터 양미숙을 내세운 기괴한 코미디로 평단의 갈채를 받은 반면, 손익분기점에는 살짝 못 미치는 흥행을 기록했다. 이경미 감독은 8년 만에 발표한 신작 <비밀은 없다>(2016)의 각본을 박찬욱 감독과 함께 쓰면서 다시 한번 돈독한 파트터십을 과시했다.
그렇다면, 봉준호 감독은?
<건축학개론>(2012)으로 뭇 남성 관객들에게 첫사랑의 추억을 자극했던 이용주 감독은, 봉준호 감독의 걸작 <살인의 추억>(2003)의 연출부로 영화계에 입문했다. 오랫동안 고집하던 시나리오들을 접어두고 순전히 데뷔를 위해 쓴 이야기 <불신지옥>(2009)으로 입봉했지만, 시나리오가 좋다는 영화계의 극찬과 호러 마니아들의 열렬한 지지에도 불구하고, 시장에서는 외면받았다. 하지만 전작의 음산한 분위기와는 한껏 다른 톤의 로맨스 <건축학개론>이 410만 명의 관객을 기록하며 전작의 실패를 만회했다. 한편 봉준호 감독과 함께 <살인의 추억>의 시나리오를 쓰고 스크립터로도 참여한 심성보 감독은 2014년 <해무>로 데뷔했다. 봉준호가 직접 제작을 맡고, 그의 촬영 파트너 홍경표 촬영감독이 카메라를 잡았지만, 대중과 평단에서 모두 어정쩡한 반응을 얻었다.
씨네플레이 에디터 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