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극장에 걸리지 않았지만 이대로 놓치기 아쉬운 영화들을 한 주에 한 편씩 소개합니다.
<오버커머>는 1월 9일(목) 올레 TV를 통해 볼 수 있습니다.
모두가 잘하는 걸, 좋아하는 걸 마음껏 할 수 있는 세상이라면 참 좋을 텐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누군가는 성취를 거머쥐려는 찰나 외부 환경 때문에 놓치고, 누군가는 좋아하는 걸 하고 싶은데 어떤 장애물에 부딪힌다. 영화 <오버커머>의 두 주인공 존(알렉스 켄드릭)과 해나(아린 라이트-톰슨)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은 각자의 고난을 어떻게 극복(Overcome)했을까.
존 해리슨은 고등학교 농구부 코치다. 그의 팀은 챔피언십 대회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내년엔 반드시 우승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오른다. 하지만 지역에서 가장 큰 공장이 문을 닫으면서 에이스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고, 존도 농구팀을 운영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때 교장 올리비아(프리실라 C. 샤이어)는 그에게 크로스컨트리 팀의 코치를 맡긴다. 하지만 크로스컨트리의 부원은 단 한 명, 해나 스콧. 해나는 빼어난 달리기 실력을 갖췄지만, 선천적인 천식과 가정 문제로 애정결핍을 겪는 학생. 존과 해나가 나름대로 크로스컨트리 ‘팀’의 실력을 향상시켜가는 가운데, 존은 병원 자원봉사 도중 토마스 힐(카메론 아넷)을 만난다.
<오버커머>는 기본적으로 스포츠 영화의 틀을 따르고 있다. 궁지에 몰린 코치와 결점을 가진 선수. 그 둘이 만나서 경기력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는 구조는 익히 봤을 스포츠 영화와 다를 바가 없다. 그렇다면 <오버커머>가 기존 영화와 다른 점은 뭘까. 세상에 대한 관심이다.
스포츠 영화가 특유의 깔끔한 맛을 내는 건 그만큼 묘사해야 할 인물에만 집중하기 때문이다. 주인공과 라이벌, 혹은 선수와 코치, 이 정도의 관계에 묘사하고 그 결말을 ‘승부’에 집중하니 완결성은 탁월하다. 하지만 관계를 제대로 묘사하지 못하면 전개는 정형화되고 인물은 단편화된다. 스포츠 영화 장르가 재미를 보장하되 개별 작품의 특별함을 찾기 어려워진 것도 이런 이유다.
반면 <오버커머>는 존과 해나를 중심으로 다양한 인물을 그려낸다. 그들이 서로에게 주고받는 영향을 좇아가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선택과 언어가 어떤 결과를 내는지를 재차 짚어낸다. 영화의 발단부터 지역 사회의 와해를 짚어내고, 존과 가족들, 존과 토마스, 해나와 교장 등 이들 각자의 교류를 통해 서로의 역경을 이해하려는 과정을 묘사한다.
해나와 존이 처음 크로스컨트리를 연습하는 날, 존의 아들 윌도 크로스컨트리에 도전한다. 그는 골인 직후 숨을 헐떡이며 “이 스포츠의 문제는 공을 안 쓴다는 거예요”라고 말한다. 농구부 코치의 아들다운 대사라 코믹하면서도, 사실 그의 말이 꽤 정확하긴 하다. <오버커머>는 왜 덩크 슛도, 골도 없는 크로스컨트리를 주요 소재로 삼은 걸까.
크로스컨트리는 단순한 스포츠다. 코스를 달려서 골인하면 된다. 순위는 있지만, 점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 운동에서 의지할 수 있는 건 나뿐이다. 크로스컨트리에서 이기는 방법은 누군가의 말처럼 등뼈에 의지해 달리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얘기,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지 않은가. 그렇다, (주로 마라톤에 자주 비유되는) 인생이다.
<오버커머>가 농구 같은 팀 스포츠에서 크로스컨트리로 눈길을 돌린 이유. 누군가의 경쟁에서 오는 승리가 아니라, 스스로 모든 과정을 감내하면서 오는 성취를 다루고 싶기 때문이다. 영화 속 인물들이 내면적인 고요함을 통해 외부 환경의 영향을 헤쳐나가는 방식과 자신만을 믿고 달려야 하는 크로스컨트리가 겹쳐 보이는 건 당연하다.
물론 이렇게만 말하면 크로스컨트리나 <오버커머>가 매정한 영화처럼 느껴질 수 있다. 혼자서 모든 걸 해내야 하는 것처럼 느껴지니까. 하지만 마라톤이 그렇듯 크로스컨트리에도 수많은 관중들이 있고 그들은 각자 누군가를 응원한다. <오버커머>도 그런 풍경을 포착한다. 달리는 건 혼자여도, 골인하기까진 많은 이들의 사랑과 응원이 있다. <오버커머>는 외롭고 고된 과정조차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관객들을 따스하게 응원해준다.
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