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재즈 색소포니스트 케니 지(Kenny G)가 2월 21일, 23일 각각 서울과 부산에서 콘서트를 연다. 두루두루 듣기 좋은 멜로디로 전 세계를 사로잡았던 그는 최근 칸예 웨스트(Kanye West)의 가스펠 앨범 <Jesus is God>에 참여하면서 새삼 그 명성을 확인시켰다. 케니 지의 음악을 사용한 영화들을 소개한다.


"Songbird"

<귀여운 여인> (1990)

로맨틱코미디의 고전 <귀여운 여인> 하면 떠오르는 대목. 로이 오비슨(Roy Orbison)의 'Pretty Woman'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비비안(줄리아 로버츠)이 가게들을 돌아다니면서 쇼핑을 즐기는 신이다. 케니 지를 대표하는 곡 'Songbird'는 그 흥겨운 시간들이 끝나고 등장한다. 사랑에 빠진 에드워드(리차드 기어)는 동료에게 자네 요즘 좀 이상하다는 핀잔을 듣고, 비비안은 'Songbird'를 틀어놓고 넥타이만 걸친 채 에드워드를 기다리고 있다가 그가 들어오자 비비안은 힐을 신은 다리를 식탁에 올려놓고 그를 맞이한다. 에드워드가 씨익 웃으며 "멋진 타이군" 하자 비비안은 "당신 주려고요"라고 대답한다. 색소폰 특유의 에로틱한 무드를 정조준한 인용이다. 'Songbird'는 케니 지가 1986년 발표한 4번째 앨범 <Duotones>의 문을 여는 곡으로, 전 세계 500만 장 이상을 팔아치운 이 앨범을 통해 세계적으로 스타로 거듭나게 된다.


"Theme from Dying Young"

<사랑을 위하여> (1991)

<사랑을 위하여>(Dying Young)는 <귀여운 여인>으로 단숨에 90년대 초 최고의 스타로 올라선 줄리아 로버츠가 큰 성공을 거둔 스릴러 <적과의 동침>(1991)에 이어 작업한 로맨스영화다. 케니 지가 영화음악에 정식적으로 처음 참여하게 된 작품이기도 하다. 그가 만든 곡들이 오리지널 스코어를 이룬 건 아니고, 음악감독 제임스 뉴튼 하워드(James Newton Howard)가 만든 음악들 가운데 4개 곡에 색소폰 연주를 보탰다. 동거하던 애인이 바람피는 현장을 목격하고 무작정 부잣집에 간병인으로 들어가게 된 힐러리(줄리아 로버츠)가 빅터(캠벨 스코트)의 저택으로 찾아가는 과정에 흐르는 'Hillary's Theme'부터 메인 테마 'Theme from Dying Young', 사랑 테마 'I'll Never Leave You' 등 하워드가 만든 아름다운 선율에 케니 지의 감미로운 색소폰 연주가 더해져 병마를 이겨내는 힐러리와 빅터의 사랑에 절절함을 더한다.


"Even If My Heart Would Break", "Waiting for You"

<보디가드> (1992)

<보디가드>에 케니 지의 색소폰 연주가 실렸다고? 맞다, 무려 두 곡에 참여했다.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의 최전성기를 담은 영화답게 'I Will Always Love You', 'I Have Nothing', 'I'm Every Woman', 'Run To You', 'Queen Of The Night' 같은 휴스턴의 명곡들로 꽉꽉 채워졌기에 가려졌을 뿐. 한시도 경계를 놓지 않는 경호원 프랭크(케빈 코스트너)는 어린 팬이 레이첼(휘트니 휴스턴)에게 갑자기 달려들어 사인을 요구하자 제지하지만, 레이첼은 흔쾌히 사진까지 찍어주곤 프랭크에게 면박을 준다. 간단히 지나가는 장면이지만 월터 아파나시에프(Walter Afanasieff)가 만든 노래를 아론 네빌(Aaron Neville)이 부르고, 케니 지가 색소폰을 연주한 'Even If My Heart Would Break'가 흐르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케니 지의 솔로 트랙 'Waiting for You'도 등장한다. 옷가게에 들른 레이첼은 탈의실에 들어가면서 "여기는 안 따라오나봐요?"하고 살짝 쏴붙이고, 옷을 갈아입으면서 그의 사무적인 태도에 대한 대화가 이어진다. 부드러운 분위기의 음악이 무색하게도 프랭크와 레이첼의 대화는 냉랭하기 짝이 없다.


"Have Yourself a Merry Little Christmas"

<34번가의 기적> (1994)

크리스마스 영화의 고전 <34번가의 기적>(1947)을 리메이크한 1994년 판 <34번가의 기적>에 음악감독 브루스 브로튼(Bruce Broughton)의 오리지널 스코어와 함께 나탈리 콜(Natalie Cole), 디온 워윅(Dionne Warwick), 레이 찰스(Ray Charles),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사라 맥라클란(Sarah McLachlan) 등이 부른 고전 캐롤들이 사용됐다. 케니 지가 재해석한 캐롤은 'Have Yourself a Merry Little Christmas'다. 빈센트 미넬리의 걸작 뮤지컬 영화 <세인트 루이스에서 만나요>(1944)에서 주디 갈란드(Judy Garland)의 노래로 처음 발표돼, 프랭크 시나트라(Frank Sinatra)를 비롯한 수많은 가수들에게 리메이크 된 명곡이다. 케니 지 버전의 'Have Yourself a Merry Little Christmas'는 산타 할아버지의 존재를 믿지 않는 수잔과 백화점에서 산타로 일하는 노인 크리스가 우정을 쌓는 사이, 수잔의 엄마 도리가 애인 브라이언과 뉴욕에서 데이트를 즐기는 1분30초 간의 시퀀스에 흐른다. 두 연인의 대화 대신 음악이 사운드 전체를 차지해 크리스마스의 평화로운 무드를 한껏 살린다.


"Songbird"

<카> (2006)

이른 바 '릴렉싱 뮤직'의 대표주자답게 'Songbird'는 영화계에서 단연 가장 많은 러브콜을 받았다. 픽사 애니메이션 <카> 역시 'Songbird'를 재미있게 인용했다. 주인공 라이트 맥퀸(오웬 윌슨)은 매니저인 맥(존 라첸버거)의 트레일러에 실려 캘리포니아까지 이동한다. 급박한 스케줄 때문에 맥퀸이 휴게소에도 들르지 못하게 하고, 졸음운전을 걱정하던 맥은 아니나 다를까 한밤 중에 꾸벅꾸벅 졸면서 도로를 달린다. 그때 고속도로에 4인조의 폭주족이 나타나 맥이 조는 걸 발견하자 케니 지의 'Songbird'를 틀고 결국 맥은 맥을 못 추리고 헤롱댄다. 차선도 못 지키면서 흔들리다가 문이 열려 맥퀸은 트레일러에서 빠져나와 맥은 홀로 도로에 남겨진다. 그리고 한밤 중의 레이싱이 이어진다.


"The Girl from Ipanema"

<알파 독> (2006)

LA에서 펼쳐지는 액션 범죄물 <알파 독>은 힙합/R&B 트랙이 전면에 배치됐다. 모든 사건이 마무리 되고 자니(에밀 허쉬)가 말쑥한 차림으로 화창한 거리를 걷고 있는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보사노바 'The Girl from Ipanema'가 더욱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The Girl from Ipanema'는 색소포니스트 스탄 겟츠(Stan Getz)의 연주와 '보사노바의 아버지' 주앙 지우베르투(João Gilberto)의 보컬이 더해진 명곡으로, 보사노바가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알파 독>에 수록된 건 케니 지가 연주하고 주앙 지우베르투의 딸 베벨 지우베르투(Bebel Gilberto)가 노래한 커버 버전이다. 90년대 내내 탄탄대로를 걷고 있던 케니 지가 1999년 발표한 첫 번째 커버 앨범 <Classics in the Key of G>에 수록됐다. 90년대 최고의 프로듀서로 군림하던 월터 아파나시에프와 함께 만든 트랙은 어딘가 살짝 비어 있는 듯 짙은 감흥을 안기는 원곡과 달리 얼핏 들어도 달달한 소리가 가득한(돈 냄새가 풀풀 나는!) 소리들로 완성됐다.


"Deck The Halls / The Twelve Days Of Christmas (Medley)"

<배드 맘스 크리스마스> (2017)

밀라 쿠니스, 크리스틴 벨 주연의 <배드 맘스>(2016)가 쏠쏠한 흥행을 기록하고, 이듬해 홀리데이 시즌을 노린 속편 <배드 맘스 크리스마스>가 제작됐다. 전편의 트러블메이크가 두 자식의 엄마 에이미(밀라 쿠니스)였다면, <배드 맘스 크리스마스>의 에이미의 엄마 루스가 말썽을 일으킨다. 에이미가 "스시도 없고, 낙타도 없고, 무엇보다 케니 지도 없"는 크리스마스를 보낼 거라고 말했지만, 말은 결국 씨가 되어 돌아온다. 애인의 가족과 평화롭게 집으로 돌아오던 에이미는 동네로 들어서자 색소폰 소리와 함께 낙타가 걸어다니는 시끌벅쩍한 파티가 벌어지고 있는 걸 본다. 물론, 에이미의 집이다. 집에는 처음 보는 사람들이 그득그득 모여 있고, 케니 지가 폼을 재면서 캐롤을 연주하고 있다. 기괴하게 웃어대는 엄마한테 가서 다 쫓아내라고 화를 내자, 엄마는 국보 같은 케니 지를 어떻게 쫓아내냐고 답한다. 결과는? 에이미는 케니 지에게 "피리 들고 어서 꺼지라"고 소리를 지르고, 케니 지는 "이거 피리 아니거든, 나쁜 X" 욕을 내뱉는다. 케니 지의 목소리를 이렇게 처음 듣게 되다니.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