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큘라>(2020)

2020년을 정초를 맞아 넷플릭스가 자신 있게 공개한 첫 작품은 BBC와 함께 선보인, <셜록> 제작진의 새 삼부작 드라마 <드라큘라>다. 브램 스토커가 19세기 말 발표하자마자 흡혈귀 장르의 고전이 된 이 작품은 현재까지 전 세계적으로 연극과 영화, 뮤지컬 등 수많은 콘텐츠로 만들어지며 압도적인 인기와 지위를 자랑한다. 모든 흡혈귀물의 교본이자 집대성이라 말할 수 있는데, 매번 만들어질 때마다(원작의 아우라를 넘지 못함에도) 다양한 화제를 낳고 관심을 모아왔다. 그런 만큼 스타 배우의 출현이나 감독의 연출력 외에 음악에서도 놀라운 결과물들을 안겨줬다. 새롭게 도전한 넷플릭스 버전의 <드라큘라>와 함께 무수히 많은 드라큘라 영상물들 중 뚜렷한 족적을 남겼거나 의미 있는 시도였던 사운드트랙들을 시대 순으로 골라 소개해본다.


드라큐라 (1931)

<드라큐라> 사운드트랙 표지

연출: 토드 브라우닝

음악: 필립 글래스

드라큘라의 전설을 시작한 건 토드 브라우닝의 이 고전의 몫이 컸다. 타이틀롤을 맡은 벨라 루고시는 카리스마 넘치는 뱀파이어 백작의 효시가 되었지만, 평생 이 이미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저주도 품게 되었다. 딱히 독자적인 스코어가 없는 무성영화인지라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나 바그너의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등에서 곡을 뽑아 상영 내내 연주되곤 했는데, 여기에 새로운 빛을 내린 건 현대음악가이자 미니멀리즘으로 유명한 필립 글래스였다. 그는 1993년부터 96년까지 ‘장 콕토 삼부작’을 완성했는데, 콕토의 오래된 영화와 소설에 노래와 연주를 새로 덧입혀 자신만의 오페라를 만든 색다른 방식이었다. 유니버셜은 1998년 2차 판권으로 영화를 출시하며 이런 작업을 해봤던 글래스에게 새 음악을 의뢰했고, 자신의 작업을 오랫동안 함께 해온 혁신적이고도 도전적인 크로노스 사중주로만 격정적이고 음울한 아르페지오의 마법을 펼쳐냈다. <캔디맨> 1-2편과 <언더토우>, <테이킹 라이브즈> 등 여러 호러/스릴러에 참여하며 음악의 효과와 메시지 전달에 대한 실험을 그치지 않았던 글래스의 참신한 시각이 돋보인 시도였다. 영화가 상영되며 연주되는 필름 콘서트로 많은 인기와 호평을 받았다.


괴인 드라큐라 (1958)

<괴인 드라큐라> 사운드트랙 표지

연출: 테렌스 피셔

음악: 제임스 버나드

벨라 루고시의 드라큘라가 전설을 시작했다면, 이를 완성 지은 건 단연 크리스토퍼 리였다. 그리고 숙적이자 진주인공인 반 헬싱 역의 피터 쿠싱 존재감도 빼놓을 수 없다. 햄머 영화사에서 십 년이 넘도록 계속 된 이 드라큘라 시리즈는 현재 관객들이 알고 있는 모든 흡혈귀물의 전형과 재미, 카리스마를 각인시켰다. 그들만큼이나 잊어선 안 되는 인물이 바로 햄머 영화사의 전속이나 다름없던, 음악을 맡은 제임스 버나드다. 특이하게 작곡가보다 폴 덴과 함께 쓴 <세븐 데이즈 투 눈>으로 오스카 각본상을 받으며 유명해졌는데, 당대 최고 작곡가인 벤자민 브리튼의 격려를 받아 음악 공부를 계속하며 대타로 들어간 <쿼터매스 익스페리먼트>로 영화음악가에 데뷔하게 된다. 버나드 허먼보다 앞서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현악의 서스펜스를 조성하는 한편, 질주하고 날뛰는 타악 편성과 서로 다른 하모니가 충돌하며 만들어내는 위압감의 사운드는 햄머만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서정적이며 낭만적인 분위기를 돋우는 동시에 스릴과 공포를 선사하는 장중하고 탁월한 그의 관현악은 불운하게도 영화의 퀄리티에 밀려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드라큘라를 얘기하는 데 있어 절대 놓쳐선 안 될 요소다.


드라큐라 (1979)

<드라큐라> 사운드트랙 표지

연출: 존 바담

음악: 존 윌리엄스

1979년은 의도치 않게 드라큘라의 해가 됐다. 베르너 헤어초크가 클라우스 킨스키와 이자벨 아자니, 브루노 간츠를 데리고 <노스페라투>를 리메이크했고, 코미디 버전인 <드라큐라 도시로 가다>도 개봉했다. 그러나 가장 큰 야심작은 토드 브라우닝의 원조를 이은 유니버셜의 <드라큐라>였다. 연출을 맡은 존 바담은 전작 <토요일 밤의 열기>로 대히트를 기록했고, 타이틀롤을 맡은 프랭크 란젤라는 바로 전해 연극 드라큐라로 토니상 후보에 오른 기대주에, 반 헬싱으론 로렌스 올리비에가 나왔다. 게다가 음악엔 <죠스>와 <스타워즈>, <슈퍼맨> 등으로 가장 압도적인 전성기를 보내던 존 윌리엄스가 합류했다. 실패할 수 없는 조합이었음에도 일류 스태프들이 모인 초특급 프로젝트는 흥행에 참패하고 만다. 로맨틱한 드라큘라와 진부한 플롯이 전혀 관객들에게 어필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존 윌리엄스가 맡은 고딕적이고 드라마틱한 스코어는 환상적이다. 생전 단 한편의 흡혈귀 영화도 안 봤다고 고백하는 마에스트로와 달리 이처럼 매력적이고 짜릿하게 드라큘라의 로망을 품어낸 사운드는 여태껏 존재하지 않았다. 호러물의 본령을 벗어나긴 했어도 윌리엄스의 모든 특징들이 명징하게 휘몰아치는 음악만으로 가치가 있다.


드라큐라 (1992)

<드라큐라> 사운드트랙 표지

연출: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음악: 보이치에크 킬라르

흥행을 위해 <대부 3>를 연출하며 논쟁에 휩싸였던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마지막 흥행작으로, 78년 <드라큐라>가 실패했던 애절한 로맨스와 화려한 비주얼, 운명과 욕망에 방점을 찍고 재해석한 방향성이 결합돼 가장 많이 화자 되는 대중적인 비전을 제시했다. 여기에 게리 올드만, 키아누 리브스와 위노나 라이더, 안소니 홉킨스 등 호화 캐스팅도 한몫했다. 동유럽 감성의 음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코폴라가 애초에 염두에 둔 작곡가는 폴란드의 거장 비톨드 루토슬라프스키였으나, 그의 거절로 역시 같은 폴란드 출신의 보이치에크 킬라르에게 기회가 주어졌다. 영화음악가로도 탁월한 활약을 보인 킬라르의 첫 번째 할리우드 영화가 된 셈인데, 공포와 사랑, 절망과 복수, 정욕과 구속의 교차점을 드러내는 코폴라의 에로틱 비전에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사운드를 선사했다. 불쾌한 속삭임과 성스러운 종교적 합창, 괴로움에 울부짖는 괴성 등 다양한 목소리들을 혼용한 채 비극적이면서 아름답고, 오싹하면서도 감동적인 관현악 테마들은 매우 강력하다. 아쉽게도 영화상에선 편집되고 재단돼 온전하게 그의 스코어를 즐길 수 없지만, 최근 복각된 사운드트랙 완전판을 통해 그 진가를 확인할 수 있게 됐다.


드라큐라 2000 (2000)

<드라큐라 2000> 사운드트랙 표지

연출: 패트릭 루지어

음악: 마르코 벨트라미

밀레니엄을 맞아 드라큘라를 현대적으로 각색한 버전이 만들어진다. 제작에 참여한 건 유명한 호러 감독 웨스 크레이븐. 21세기 미국에 기독적인 해석이 곁들어져 19세기 고딕 흡혈귀 스토리를 풀어냈다. 제랄드 버틀러가 타이틀롤을, 조니 리 밀러가 반 헬싱 역할을 물려받는 사이몬 역을 맡았다. 감독과 각본은 크레이븐 후기작들의 편집을 도맡던 패트릭 루지어가 담당했는데 이 작품으로 데뷔했다. 호러의 베테랑이라 할 수 있는 스콧 데릭슨과 에런 크루거 등이 스크립 닥터로 참여했지만 엉성한 이야기를 살리는데 실패하며 상업적인 재앙을 맛봤다. 하지만 마르코 벨트라미가 맡은 하이브리드한 스코어만큼은 영리한 접근법을 취한다. <스크림> 4부작과 <미믹>, <패컬티>, <마이너스 맨> 등 다양한 호러 스릴러로 두각을 나타낸 편이라 다크한 오케스트라와 호러에 잘 어울리는 합창, 트렌드인 일렉트릭 요소에, 실험적인 사운드디자인적 시도들이 결합돼 고전을 현대식으로 해석한다는 영화의 취지에 걸맞은 음악이 완성됐다. 이건 락킹하고 메탈 사운드가 가득한 세기말적인 판테라, 린킨파크, 시스템 오브 어 다운, 갓헤드와 마릴린 맨슨, 파워맨 5000, 디스터브드 등의 삽입곡들과도 훌륭한 조화를 이룬다.


드라큘라: 전설의 시작 (2014)

<드라큘라: 전설의 시작> 사운드트랙 표지

연출: 게리 쇼어

음악: 라민 자와디

<드라큘라: 전설의 시작>은 부제처럼 이전까지 작품들에서 제대로 다루지 않았던 실제 롤 모델 발라히아 공국의 영주 블라드 체페쉬 생애를 바탕으로 드라큘라의 전사를 풀어낸 작품이다. 유니버셜은 이 영화를 필두로 마블의 MCU나 디씨의 DCEU처럼 장대한 몬스터 기반의 세계관 '다크 유니버스'를 구상했지만, 차기작 <미이라>가 기대 이하의 흥행을 거두자 미련 없이 접고 말았다. 하지만 흑화 되어가는 주인공을 호러가 아닌 중세 암울한 판타지로 풀어낸 참신한 시도와 루크 에반스의 열연은 인정받았다. 음악을 담당한 건 <왕좌의 게임> 시리즈로 유명한 라민 자와디로, 한스 짐머 휘하에 있던 작곡가답게 파워풀하고 스펙터클한 사운드를 들려준다. 음산한 코러스와 동유럽 민속 악기를 동원해 이국적인 질감을 살린 채 규모의 미학을 자랑하는 에픽 스코어는 그의 다른 작품인 <타이탄>이나 <워크래프트: 전쟁의 서막>, <그레이트 월> 등을 연상케 한다. 뒤틀린 복수심과 용맹스러운 무장으로 봉인된 힘을 각성하는 부분에서 현재 유행인 슈퍼히어로 장르의 맥락과도 맞닿아있으며, 그가 MCU의 첫 작품 <아이언 맨> 1탄의 작곡가라는 건 시사하는 지점이 크다. 공포스럽지 않은 드라큘라 음악.


드라큘라 (2020)

<드라큘라> 사운드트랙 표지

기획: 마크 게이티스 & 스티브 모팻

음악: 데이빗 아놀드 & 마이클 프라이스

<닥터 후>와 <셜록> 제작진이 뭉쳐 만든 작품답게 가장 최근의 드라큘라 이야기는 고전을 자유자재로 비튼 절묘한 창의력과 블랙 유머, 색다른 볼거리들로 가득하다. 익숙한 기시감으로 시작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그들의 악동적인 기질과 유희 정신은 이 섬뜩하고 고전적인 공포를 재조합해 더 극단의 자극적인 재미로 이끈다. 유머와 공포가 만나는 금단의 지점에서 느껴지는 오묘한 쾌감은 이 드라마만의 매력이다. <셜록>에서 함께 했던 데이비드 아놀드와 마이클 프라이스가 그대로 음악에 복귀해 드라큘라 냄새가 나는 놀라운(?) 사운드를 직접 창안했다. 이를 위해 피가 담긴 컵을 공명시켜 소리를 내고, 관을 타악기로 활용했으며, 우는 아기들 목소리로 오르간을 만들고, 비명 지르는 아기 소리를 녹음에 써먹었다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인터뷰를 남겼다. 보헤미안 색채가 농후하던 <셜록>과 조금 유사한 분위기를 풍기지만 근원적으론 더 깊고 어두우며 미스터리 해졌고, 이것이 쌉싸름한 유머와 긴장감을 더욱 강조한다. 삼부작 TV물 음악이 아닌 한편의 영화음악으로 접근할 응집력의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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