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로마>

‘위’와 ‘아래’

쿠아론 감독의 영화 <로마>의 한 장면……. 하녀 클레오와 소피아네 가족이 크리스마스 여행을 떠난다. 떠들썩하고 풍요로운 백인 부르주아들의 거실에서 나와, 개와 닭이 어지럽게 돌아다니는 돌계단을 한참 걸어 내려가면, 마을 농민들과 하녀들이 모여 따로 파티를 열고 있는 허름한 지하 주점이 나온다. 복장과 음식과 문화 등등, ‘위’와 ‘아래’는 무척 다르다.

영화 <기생충>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의 한 장면……. 비가 억수로 퍼붓던 그 밤, 전망 탁 트인 동익네(그 집에서는 짜장 라면에도 큼직한 한우 덩어리를 넣어 먹는다) 저택에서 겨우 벗어나 자신들의 집으로 서둘러 돌아가는 기택씨네 가족……. 오랫동안 앵글은 마치 비스듬히 기운 사각(斜角) 같은데, 왜냐하면 그들이 자신들의 반지하방에 도착하려면 도로를, 계단을, 다리를 끊임없이 ‘내려가야’하기 때문이다. 도착한 그들의 방은 이미 물에 잠겨 있고, 그나마 그 방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변기마저 역류한다. 역시나 위와 아래는 그렇게 다르다.

생각해보면 이렇듯 더럽거나 두렵거나 추한 것들은 항상 ‘아래’에 있다. 반면 위대하고 이상적인 것들은 모두 ‘위’에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위와 아래’의 이와 같은 위상학에 과학적인 근거 따위는 없는데, 무한하다는 우주의 어디를 기준으로 삼아야 높고 낮음의 위치를 가를 수 있는지 알 수 없고, 지구 또한 둥글어서 나와 정확히 대칭되는 남반구의 어떤 지점에 서 있는 한 사내는 지금 내가 아래라고 부르는 방향을 쳐다보며 저 높은 하늘이라고 말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구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극복할 수 없는 선험적 조건으로서의 중력, 그것만이 이 위상학의 근거가 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그저 우리를 (이 지긋지긋한) 지상의 세계에 붙잡아두는 힘이 작용하는 방향을 ‘아래’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힘이 맥을 못 추는 방향을 ‘위’라고 부른다. 그리고는 위쪽에 모든 영화로운 것들(신, 이상, 불멸, 무한 등등)을 올려놓고, 아래쪽에 모든 추하고 더럽고 불편하고 공포스러운 것들(죽음, 거인족, 괴물, 노예 등등)을 내려(혹은 묻어) 놓는다. ‘위와 아래’의 위상학적 비유, 그것은 아주 오래된 것이어서, 가령 올림포스의 신들이 타이탄 족을 감금한 곳도 아래고, 하데스가 죽은 이들을 지배하는 곳도 아래다. 신이 우리를 내려다보는 곳은 위이고, 이성의 빛이 몽매했던 중세인들을 비추는 것도 위로부터다.

거의 태곳적부터 유지되어 온(왜냐하면 어느 문화권이든 태초에 신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위와 아래, 곧 땅과 하늘을 나누는 일이니까) 이 같은 위상학적 비유의 근대 판본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마르크스의 이른바 ‘토대/상부구조’론이다. 토대가 상부구조를, 즉 아래에 있는 것(생산력과 생산관계, 곧 생산수단과 노동력과 계급구조)이, 위에 있는 것(정치, 법, 이데올로기, 문화)을 결정한다. 위와 아래의 전도, 아래가 위를 틀 짓는 근거가 된다는 이 생각은 혁명적이다.

미국의 터널들

영화 <어스>는 이런 문장들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미국 대륙 밑엔 수천 마일에 이르는 터널들이 있다. 사용되지 않는 채 버려진 지하철 노선, 폐광의 갱도, 용도를 알 수 없는 것도 많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미국의 밑, 즉 ‘아래’에 대한 영화다. 아니나 다를까, 자신의 그림자(레드)를 죽여야만 할 때, 애디는 ‘내려가야’ 한다. 거울의 방(거기엔 간판에 “자신을 발견하세요”란 문구가 씌어 있다)을 통해 낡은 계단을 한참 내려간 후, 다시 무척 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더 내려가야 복제된 인간들의 지하세계가 나온다.

마르크스의 위상학적 비유에 따를 때, 그 아래는 물론 토대다. 그런데 조던 필 감독이 생각하는 미국 사회의 위상학도 그와 유사한 듯하다. 미국(흥미롭게도 영화제목이 ‘US’다)에도 광범위한 ‘아래’가 있다. 아메리칸 드림과 가족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지상의 삶은 그 아래를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은폐하고 감춤으로써 유지된다. 특히 애디 가족과 레드(감독이 이 지하 세계의 복제인간 종에게 붙여준 의미심장한 이름이다) 가족이 처음 만났을 때 나누는 충격적인 대화는 미국이 아래에 무엇을(마치 터널처럼) 감춰두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레드가 말한다.

“오래 전 아주 옛날에 한 소녀가 있었지. 걔한테는 그림자가 있었어. 둘은 서로 연결돼 있었지. 한 몸처럼. 소녀가 식사할 땐 따뜻하고 맛있는 음식이 주어졌지만 그림자는 배고플 때 피 묻은 토끼의 날고기를 먹어야 했어. 크리스마스가 되면 소녀는 멋진 장난감들을 받았어. 부드럽고 말랑한... 하지만 그림자의 장난감은 차갑고 날카로워서 갖고 놀면 손가락을 베이곤 했지. 소녀는 잘생긴 왕자님을 만나 사랑에 빠졌어. 하지만 그림자는 같은 무렵에 에이브러햄을 만났어. 사랑하고 안 하고는 중요하지 않았지……”.

휴양지에 별장을 가지고 있고, 맘만 먹으면 충동적으로 보트 하나쯤은 구입할 수 있고, 산타크루스에서 며칠 정도 휴가를 즐길 수도 있는 부르주아 가족의 눈을 따라오던 관객들의 시선은 이제 그 안온한 삶 아래에 있는 가혹한 진실과 대면해야 한다. 복제 토끼의 날고기로 연명하면서 좀비처럼 어슬렁어슬렁 위의 삶을 흉내 내며 살아야 했던 저 아래의 사람들……. 그런 점에서 애디의 남편 게이브가 “당신들 정체가 뭐야?”라고 물었을 때, 레드가 한 대답은 의미심장하다. “우린 미국인들이야”. 조던 필이 보기에 미국은 그렇게 위와 아래로 양분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지상의 안온한 삶에 대해 지하의 비참한 삶은 구성적이다. 아래의 비참이 위의 안온의 조건이다.

1111:1111

그러던 차, 레드의 지도하에 오랜 준비를 마친 지하의 복제인간들이 지상으로 올라온다. 지하의 비참이 지상의 안온을 침범한다. 물론 그들의 상승은 계급투쟁의 알레고리일 것이다(이 투쟁은 백인 최고층 계급인 조시네 가족과 흑인 중상층 계급인 게이브네 가족 사이에서도 벌어진다. 피 튀기는 혈투 끝에 자동차와 호화 별장은 결국 게이브네 것이 된다).

지상인과 지하인들의 투쟁은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투쟁보다도 살벌하다. 누군가 죽어야만 누군가는 살 수 있다. 즉 자유와 목숨을 건 싸움이 아니라 목숨과 목숨을 건 싸움이다. 이 영화에서는 싸움이 기이하게도 항상 1:1로 벌어지기 때문이다. 게이브는 자신으로부터 복제된 에이브레험을 죽여야 하고, 아내 애디 역시 자신으로부터 복제된 레드를 죽여야 한다. 아들 제이슨은 복제 아들 플루토(!)를, 딸 조라는 역시 복제 딸 엄브레를 죽여야 한다.

무슨 말인가 하면 네 가족들이 각각 죽여야 하는 것, 그것은 바로 지하에 살고 있었으나 그 존재를 알지 못했던 또 다른 자기 자신이다. 역으로 지하의 복제 가족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지상의 공기를 마시기 위해서는 다른 자기를 (가위로) 죽이고 그들과 연결된 영혼의 끈을 끊어내야만 한다. 싸움이 항상 1:1일 수밖에 없는 것은 그런 이유다.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 전편을 통해 이 1:1 투쟁을 지시하는 기호들이 꾸준히 증식한다는 점이다. 최초의 1:1 도식은 물론 어린 애디가 거울의 방에서 자신과 똑같이 생긴 지하의 어린 레드를 조우하는 순간 만들어진다. 그러나 바로 그 직전, 놀이 공원에서 길을 잃기 전에 애디의 아빠가 야구공을 던져 얻어낸 상품 넘버가 11번이었다는 사실, 해변으로 내려가면서 본 어떤 사내가 들고 있던 팻말에 (종말을 예고하는) ‘예레미아서 11장 11절’이란 문구가 씌어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보다 조금 전에는 TV 아나운서가 “11시에 다시 뵙겠습니다”라는 멘트로 뉴스를 마무리했다는 사실도 상기해 두어야 한다(찾아보면 아마도 더 많은 11들이 있으리라).

그러다가 11과 1:1의 도식이 배수 수준으로 급속히 증식하기 시작하는 것은 두 가족이 대면하는 장면에서부터다. 레드네 가족이 별장(중산층 부르주아답게 게이브는 그곳을 자신의 ‘사유지’라고 강조한다)에 침입하기 전, 막 잠들려던 제이슨에게 애디가 노래를 불러주는 시간은 11시 11분, 게이브가 보고 있던 야구 하이라이트 경기 점수는 11:11, 그 즈음 창에 비친 레드네 가족이 서 있는 형상은 1111(일렬 횡대)이다. 그리고 얼마간의 결투가 있은 후 거실에 나란히 마주 보고 앉은 두 가족의 형상은 1111:1111이 된다. 4:4가 아니라 111:1111인 것은 그들이 정확히 자기 자신과 대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이브:에이브래험, 애디:레드, 제이슨:플로토, 조라:엄브레…….

똑같이 생긴, 그러나 하나는 위 하나는 아래인 1:1들의 무한 증식은 이후로도 더 이어진다. 백인 조시네 가족(조시, 키티, 베카, 린제이)에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1111:1111). 그리고 별장을 탈출해 조시네 저택에 도착한 게이브네 가족과 조시네 가족의 레드들(텍스, 달리아, 로, 닉스) 사이에서도 1111:1111의 도식이 만들어진다. 그 사이 미국 전역에서 그런 일들이 일어난다. 그렇다면 1:1 도식은 결국 이렇게 다시 표기되어야 할 듯하다. (n)......1111:1111......(n), 1:1들의 무한증식이다.

그런데 나로서는 저 도식이 영화 말미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펼쳐진 레드들의 거대한 인간 사슬을 닮았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다. 영화 초반부 관객이 TV 화면을 통해 보게 되는 실제 1986년 기아 퇴치 캠페인 “미국인들이 맞잡은 손”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지상의 인간들이 만든 거대한 부르주아 휴머니즘의 띠였지만, 이제 레드들이 만든 띠는 지상의 인간들과 1:1의 혈투를 치르고 얻어낸 인간사슬이기 때문이다. 죽기 전 레드는 이런 말을 했다.

단지 널 죽이는 것뿐 아니라 우리의 존재를 알려야 했거든 온 세상이 다 볼 수 있도록 이젠 우리의 시간이 온 거야. 저 위에서의 시간이.

‘시위(示威)’라는 단어가 있다. 축자적으로 ‘위력을 드러내 보임’이란 의미인데, 나는 “우리의 존재를 알”린다는 레드의 저 말이, ‘이게 진짜 시위야’라는 말로 밖에는 달리 들리지 않는다. 조던 필은 공포영화를 잘 만드는 감독이라지만, 공포 속에 급진적인 정치적 메시지를 담는 데 아주 능숙한 감독이기도 하다는 점은 확실해 보인다.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그가 어떻게 정치적 메시지를 공포와 결합시키는가 하는 점이다.

섬뜩함(unheimlich, uncanny)

저들의 투쟁을 1:1의 투쟁이라고도 했고, ‘자기 자신과의 대면’이라고도 했다. 그렇다면 이 싸움은 더 이상 계급투쟁만은 아니다. 마르크스보다 좀 더 현대적인 프로이트의 위상학이 유용해지는 것은 이 대목에서일 듯하다. 위의 ‘의식’과 아래의 ‘무의식’, 의식의 수면 위에 존재하는 자아와 수면 아래 무의식에 존재하는 (비)자아의 대결이라는 테마가 그것이다. <어스>에서는 그 싸움이 오히려 계급투쟁보다 더 치열한데, 그로 인해 스크린에서는 살벌한 가위질과 몽둥이질, 살 찢어지는 소리와 피 튀는 소리가 난무한다. 잊고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이 영화가 속한 장르는 ‘호러’다.

그러나 전작 <겟 아웃>에서도 그랬듯이 조던 필의 공포는 좀 남다른 데가 있다. 잔인하고 구역질나는 장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 건 공포 영화에 필수적이니까……. 그러나 <어스>의 공포는 이상하게 관객의 신경을 자극한다. (적당히 검고 이목구비 뚜렷한 할리우드 흑인 배우들과는 달리) 지나치게 검은 주인공들, 그들의 기계적인 움직임과 무표정, 자꾸 되풀이되는 우연한 반복(11), 1인 2역으로 소화해낸 분신 모티프들 등등……. ‘섬뜩함’이라고 부르는 것이 가장 정확할 듯한 그 이상한 자극은 내 생각에 프로이트의 논문 「두려운 낯설음」(Unheimlich, Uncanny)을 경유해야 제대로 해명될 수 있을 듯하다. 낯익지만, 또한 나의 저 깊은 ‘아래’에 있다는 어떤 것(it)의 드러남……. 이제 그 얘기를 해볼 참이다.


저자 | 김형중

1968년 광주에서 태어나 전남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0년 문학동네신인상 평론 부문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평론집 《켄타우로스의 비평》 《변장한 유토피아》 《단 한 권의 책》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 《후르비네크의 혀》 등과 에세이 《평론가 K는 광주에서만 살았다》가 있으며, 소천비평문학상(2008), 팔봉비평문학상(2017)을 수상했다. 현재 조선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