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재글에서 이어집니다)
……전작 <겟 아웃>에서도 그랬듯이 조던 필의 공포는 좀 남다른 데가 있다. 잔인하고 구역질나는 장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 건 공포영화에 필수적이니까……. 그러나 <어스>의 공포는 이상하게 관객의 신경을 자극한다(적당히 검고 이목구비 뚜렷한 할리우드 주연급 흑인 배우들과 달리) 지나치게 검은 주인공들, 그들의 기계적인 움직임과 무표정, 자꾸 되풀이되는 우연한 반복(11), 1인 2역으로 소화해낸 분신 모티프들 등등……. ‘섬뜩함’이라고 부르는 것이 가장 정확할 듯한 그 이상한 자극은 내 생각에 프로이트의 논문 「두려운 낯설음」(Unheimlich)을 경유해야만 제대로 해명될 수 있을 듯하다. 낯익지만 낯선, 나의 저 깊은 ‘아래’에 있다는 어떤 것의 드러남……. ‘위와 아래’의 위상학적 비유(마르크스의 ‘토대/상부구조’)에 따라 <어스>의 정치적인 면모를 주로 살펴본 지난 글에 이어서, 이제 그 얘기를 해볼 참이다.
이드(id)와 에고(ego)
‘위/아래’의 위상학적 비유들(가령 ‘하늘엔 영광/땅에는 평화’, ‘올림포스/타르타로스’, ‘천국/지옥’, ‘이성/몽매’, ‘상부구조/토대’ 등등) 중 가장 현대적인 판본은 아무래도 프로이트의 것일 듯하다. 등장한 시기를 봐도 그렇고(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현재까지 그것이 누리고 있는 위세(우리 시대는 누구나 한번쯤 자신의 정신 상태를 의심해볼 만큼 정신의학이 일반화된 시대다. 게다가 라캉과 지젝은 현재 한국 지식장의 우점종이다)를 봐도 그러한데, ‘무의식/의식’ 혹은 ‘이드/에고’의 위상학이 그것이다. 물론 이 위상학에서 의식과 에고는 ‘위’에 있고, 이드와 무의식은 ‘아래’에 있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의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빙산의 예는 유명하다. 알다시피 빙산은 그 일각만을 수면 위에 내밀고 있을 뿐, 나머지 대부분의 실체는 물 아래에 잠겨 있다. 프로이트에게 빙산의 드러난 부분이 의식이라면 잠겨 있는 부분은 무의식이다. 의식의 영역에서 무의식의 침범을 검열하고 내리 누르는 것이 ‘에고’이고, 호시탐탐 에고의 검열을 피해 기필코 수면 위로 올라오려 발버둥치는 ‘그것’들의 처소가 ‘이드’다.
그것들이 거기 ‘아래에’ 묻혀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지나치게 폭력적이거나 음탕해서 이루어지지 못한, 혹은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욕망들이 바로 그것들의 성분을 이루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소 역설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우리가 느끼는 심리적 불안이나 공포는 실은 우리가 무언가를 획득하거나 성취하지 못한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획득하거나 성취하기를 포기한(억압한) 욕망이 실제로 이루어지게 될 지도 모른다는 데서 오는 것이다. 그것들이 의식의 영역 밖으로 기어 나와 채우지 못한 욕망을 채우려고 시도한다. 그럴 때 에고는 불안과 공포라는 신호를 내보내 주체로 하여금 그것들의 침범에 대비하게 한다.
그렇다면 말을 이렇게 바꿔도 무방하겠다. 외적 요인(가령 신체적 위협 같은)이 없을 때 발생하는 대부분의 공포와 불안은 바로 나(의 가장 아래에 있는 것)를 향해 있다. 나는 다름 아닌 내가 제일 무섭다. 예컨대 사탄은 내 안에 있는 괴물의 외화된 형태이고, 드라큘라도 늑대인간도 마찬가지다. 그것들이 약속하는 것, 이를테면 불멸과 정력과 권세와 (부권에 대한) 증오 같은 것들을 한 번도 욕망해보지 않은 이, 나에게 돌을 던지시라(돌을 맞더라도 프로이트에 대한 신의를 버리진 못하겠지만……왜냐하면 그 돌을 던진 자 또한 무의식중에 스스로를 그것들로부터 방어하는 중이었을 테니 ).
섬뜩함(unheimlich, uncanny)
프로이트가 <섬뜩함>(1919)이란 소논문에서 밝히고자 했던 내용의 골자가 그와 같다. 외적 요인이 없음에도 우리가 기이하게 낯설어하고 두려워하는 것들이 실은 오래 전부터 우리에게 낯익은 것이고 우리가 한 번쯤은 (실은 훨씬 더 자주) 욕망했던 것들이라는 사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그가 예로 든 것들은 대충 이렇다.
자동인형 : 어렸을 적, 우리는 얼마나 자주 인형과 대화하고 그것을 껴안고 또 우리에게 말 걸어오기를 기대했던가. 죽은 자의 귀환 : 죽음의 공포 앞에서 불멸을 꿈꿔보지 않은 이가 있을까? 마술이나 서커스 :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결과를 얻어 내는 손과 육체와 주문, 말하자면 전능에 대한 욕망! 시력 상실 :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취한 근친상간자에게 내려졌던 벌, 곧 상징적 거세. 생매장 : 산 채로, 내가 나왔고 내가 욕망한 어머니의 자궁으로 돌아감! 절단된 신체의 자율적인 경련 : 잘려도 죽지 않는 생명! 동일한 것들의 반복 : 가령 4시 44분 44초처럼 필연을 예고하는 우연들의 징조, 미래를 내다보는 생각의 전능성. 분신, 도플갱어 : 내가 죽은 뒤에도 나를 대신해 살아가게 될 또 다른 나. 등등.
그토록 강렬하게 욕망했던 것들을 우리는 이제 두려워한다. 지적으로 성장했고 사회적으로 성인이 되었으므로 우리는 이제 저것들을 욕망할 수 없다. 그러나 어떤 상황이나 사물이 그것들의 존재를 상기시키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때, 에고는 불안과 공포의 감정을 신호처럼 내보내 주체가 그것들을 피하도록 조치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섬뜩한(집 같지 않은, unheimlich)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은 원래 집처럼 편안했던(heimlich) 것들이다. 섬뜩함은 우리 스스로 억압해버린 어떤 욕망이 실제로 이루어지려고 할 때, 소스라치게 놀란 자아가 내보내는 경고 신호와 같다.
섬뜩한 Us
우리가 호러 장르에 속한다고 분류하는 거의 대부분의 영화들이 실은 바로 그 경고신호들의 (관습적이거나 독창적인)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드라큘라, 늑대인간, 인형들, 좀비들, 거울들, 도플갱어, 자궁처럼 생긴 괴물의 입, 반복되는 숫자나 상황, 유전자 복제 등등……(다만 ‘안전 메커니즘’이 최우선이 된 생명정치 시대에는 거기에 호들갑스러운 바이러스 공포증 정도를 더할 수 있으리라).
이제 조던 필 감독의 호러 영화 <Us>가, 두 계급으로 양분된 미국 사회에 대한 묵직한 알레고리이면서 동시에 탁월한 공포물이 될 수 있었는지 길게 설명할 이유는 없어진 듯하다. 저 아래에 억압당한 채 살아온 레드들(id), 지상의 인간들과 완벽하게 1:1로 대응하는 도플갱어들(분신), 게다가 그들은 인형처럼 검고 기계적으로 움직인다(자동인형). 주인공들은 거울 속에서 자기 자신과 마주치고, 반복되는 숫자 11이 예견하는 종말론적 운명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반복).
이렇게 프로이트가 섬뜩함의 요소들이라고 나열한 많은 것들을 조던 필 감독은 정치적 주제와 잘도 버무려 놓는다. 안온한 나의 일상 아래 그토록 참혹한 계급적 진실이 있었음을 발견하게 하되, 그것을 나와 무관한 것으로서가 아니라 바로 내 안에서, 내가 억압해 온 것으로서 발견하게 하기……. 그래서 <어스>는 낯익으면서도 낯설다. 감독이 프로이트를 알았건 몰랐건, <어스>가 아주 ‘섬뜩한’ 정치영화로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거기에 있는 듯하다.
저자 | 김형중
1968년 광주에서 태어나 전남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0년 문학동네신인상 평론 부문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평론집 《켄타우로스의 비평》 《변장한 유토피아》 《단 한 권의 책》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 《후르비네크의 혀》 등과 에세이 《평론가 K는 광주에서만 살았다》가 있으며, 소천비평문학상(2008), 팔봉비평문학상(2017)을 수상했다. 현재 조선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