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한 후보>

라미란 주연의 <정직한 후보>는 거짓말로 인해 인생의 위기를 맞은 3선 국회의원 주상숙(라미란)의 이야기를 담습니다. 거짓말 없인 대화를 이어나가지 못하던 그녀에게 하루아침만에 거짓말을 못 하게 되는 능력(!)이 생기며 각종 소동이 벌어지죠. 쫀득한 긴장감을 전하는 거짓말 소재 영화는 그간 많은 관객에게 사랑받아왔습니다. 주상숙을 보며 생각난 그의 선배들을 한자리에 모아봤습니다. 거짓말로 먹고살던 영화 속 역대급 거짓말쟁이들, 이들의 레벨을 매겨볼까요?


Level 1

: 거짓말로 인생을 갱신(?)한 캐릭터

바틀비 <억셉티드> | Level 1

원서를 넣은 대학에 다 떨어졌다면? 보통의 사람이라면 자신에게 맞는 또 다른 길을 찾아 나설 겁니다. 학교 입학을 위해 다시 학업에 열중할 수도 있고요. <억셉티드>의 바틀비는 직접 대학을 세웁니다. 부모님의 실망을 잠재울 용도의 가상 대학이죠. 클릭 한 번으로 입학 통지서가 발생되는 홈페이지를 꾸리고, 폐업한 병원을 쓸고 닦아 깔끔한 캠퍼스를 꾸린 바틀비. 부모님을 속이는 데 성공하며 한숨 돌리려는 찰나, 본격적인 문제가 발생합니다. 전국의 대학 낙방생들이 바틀비 대학의 신입생이 된 거죠. 그는 대학을 운영할 처지에 놓입니다. 틀에 박힌 교육제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바틀비의 거짓말은 꽤 유익한(!) 편에 속합니다. 모두에게 교훈을 전하는 거짓말이니, 넓은 의미에서 ‘선의의 거짓말’ 카테고리로 분류해두죠.

플레처 <라이어 라이어> | Level 1

플레처는 잘나가는 변호사입니다. 누구든 깜빡 속게 만드는 능숙한 거짓말 덕분에 승소 전문 변호사가 될 수 있었죠. 법정에서는 물론, 가족들에게도 거짓말을 달고 사는 그. 그에 실망한 아들 맥스는 아빠가 하루라도 거짓말을 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신기하게도 그 시간 이후부터 플레처는 거짓말을 못 하죠. 의지와 상관없는 정직한 말만 쏟아내며 곤욕을 치릅니다. 뱉는 말마다 거짓말인 플레처는 이미 주변 사람들에게 신뢰를 잃은 상태입니다. 아들의 기도 덕에, 플레처는 그간 애용한 거짓말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진실에 대한 무게를 깨달아가죠. 누군가에게 실망을 안기는 정도에 불과한 플레처의 거짓말은 아래 언급될 캐릭터들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에 속합니다. 다음 캐릭터를 알아볼까요?


Level 2

: 거짓말로 남의 인생 & 본인 인생 망친 캐릭터

브라이오니 <어톤먼트> | Level 2

1935년 영국, 상류층 집안의 세실리아(키이라 나이틀리), 가정부의 아들이자 명문대 의대생인 로비(제임스 맥어보이)는 서로에 대한 마음을 확인합니다. 그 사이에 로비를 좋아하던 세실리아의 동생, 브라이오니(시얼샤 로넌)가 있죠. 집 근처에서 강간 사건이 발생한 밤. 질투심에 휩싸인 브라이오니는 아무 죄 없는 로비를 범인으로 지목합니다. 이 거짓말이 세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줄은 아무도 몰랐겠죠. 누명을 쓴 로비는 전쟁터로 끌려가고, 세실리아는 내내 로비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립니다. 이들을 지옥에서 살게 만든 브라이오니 역시 평생 속죄의 늪에 빠져 삽니다. 하지만 누구도 용서받을 수 없고, 용서할 수 없습니다. 브라이오니를 연기한 시얼샤 로넌은 14살의 나이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에 노미네이트됐습니다. 떡잎부터 훌륭했던 그녀의 연기 덕에 관객은 고구마 100개 먹은 듯한 답답함을 느낄 수 있었죠.

리플리 <리플리> | Level 2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거짓말 밥 먹듯이 하는 캐릭터 여기 또 있습니다. 밤에는 피아노 조율사, 낮에는 호텔에서 일하며 별 볼일 없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리플리(맷 데이먼). 그는 거짓말로 운명이 바뀌는 사건을 경험합니다. 파티 자리에서 만난 선박 부호에게 자신을 프린스턴 대학 출신 피아니스트로 소개한 그. 신분세탁에 성공한 리플리는 부호의 아들, 딕키(주드 로)와 얽히며 자신이 꿈꿔왔던 화려한 세계에 입성합니다. 한 개의 거짓말을 완성하려면 열 개의 거짓말이 필요한 법. 리플리는 탐욕과 질투, 열등감에 눈이 멀어 온갖 범죄를 섭렵해나갑니다. 아득바득 제 인생을 거짓으로 채워나가는 리플리는 동정심과 끔찍함을 동시에 소환합니다. 맷 데이먼의 만렙 연기가 캐릭터를 더 입체적으로 살려냈습니다.

재스민 <블루 재스민> | Level 2

거짓말로 자신의 인생을 갉아먹는 캐릭터도 있습니다. 재스민(케이트 블란쳇)은 뉴욕 상위 1%에서 바닥으로 추락한 캐릭터입니다. 그녀가 기댈 수 있는 건 자신과 정반대의 삶을 사는 여동생 진저(샐리 호킨스) 뿐이죠. 차이나타운 한가운데 위치한 진저의 아담한 집은 재스민에겐 신경안정제 없인 버틸 수 없는 공간입니다. 180도 달라진 현실에 좌절하며 살던 그녀의 삶에도 빛이 들 날이 찾아왔으니! 친구가 초대한 파티에서 근사한 외교관 드와이트(피트 사스가드)를 만난 거죠. 거짓말로 자신의 삶을 우아하게 포장하며 그에게 다가서는 재스민. 과거의 영광에 젖은 채 허영과 기만에 휩싸인 가짜 삶을 꾸려낸 재스민은 드와이트와 위태로운 연애를 시작합니다. 자기합리화에서 비롯된 재스민의 거짓말은 우리의 삶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유형의 것이라 더한 안쓰러움을 소환합니다. 케이트 블란쳇은 <블루 재스민>에서의 연기로 그 해 모든 시상식의 여우주연상을 휩쓸었죠.

기택 가족 <기생충> | Level 2

선으로도 악으로도 분류할 수 없는 인물들이 가장 매력적인 법이죠. 각자만의 출중한 능력을 지녔지만 사회에선 번번이 외면받기만 했던 기택(송강호) 가족. 명문대에 다니는 친구 덕에 과외 선생의 자격으로 부잣집의 대문을 넘은 아들 기우(최우식)을 시작으로, 포토샵에 재능 있는 딸 기정(박소담), 대리운전으로 다져진 기가 막힌 핸들링 실력을 지닌 아빠 기택(송강호), 운동으로 다져진 완력과 가사 능력을 지닌 엄마 충숙(장혜진)이 미술 선생, 운전기사, 가사도우미로 줄줄이 부잣집 취업에 성공합니다. 문제가 있다면 문서 위조, 거짓 행각으로 남을 밀어내고 이룬 비도덕적 취업이라는 점이겠죠. 정재일이 작곡한 ‘믿음의 벨트’가 흐르는 7분 동안, 네 가족이 머리를 맞대고 문광(이정은)을 쫓아내는 과정이 담긴 ‘복숭아 신’은 <기생충>의 명장면 중 하나입니다. 유려한 편집으로 해외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죠.


Level 3

: 거짓말에 목숨 건 캐릭터

스티븐 러셀 <필립 모리스> | Level 3

레벨 3부터는 차원이 다른 거짓말쟁이, 사기꾼들을 소개합니다. 교통사고로 죽다 살아난 뒤 원하는 대로 살겠다고 다짐한 스티븐 러셀(짐 캐리)은 게이라는 정체성을 숨기지 않고, 있는 돈 없는 돈 끌어모아 펑펑 쓰다 사기 행각에 발을 담습니다. 천재적인 두뇌로 보험, 카드, 식품 사기를 전전하다 감옥에 들어간 스티븐은 그곳에서 운명의 상대, 필립 모리스(이완 맥그리거)를 만나죠. 스티븐은 사랑하는 필립과 남은 생을 함께하기 위해 탈옥 사기에 도전합니다. 스티븐은 탈옥을 위한 완벽한 거짓말을 꾸며내기 위해 자신의 몸을 학대하며(!) 죽음의 문턱을 오가는 사투를 벌입니다. 사랑과 거짓말에 목숨을 건 셈이죠. 사랑이 힘이 이렇게 위대합니다.

어빙&시드니 <아메리칸 허슬> | Level 3

어빙(크리스찬 베일)과 시드니(에이미 아담스)는 커플 사기단입니다. 어빙은 사기를 치는 데 탁월한 능력을 지녔고, 시드니는 사기의 필수 조건인 순발력과 센스를 지녔죠. 이들은 FBI 요원 디마소(브래들리 쿠퍼)에게 덜미를 잡히고 맙니다. 디마소는 더 큰 범죄를 소탕하기 위해 이들을 끌어들이죠. 어빙과 시드니는 정치인 카마인(제레미 레너)와 그의 동료들, 심지어 마피아들에게까지 사기를 쳐야 하는 상황에 놓입니다. 들키는 순간 죽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으니, 이들 역시 목숨을 걸고 거짓말을 이어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불어나는 거짓말과 인물들 사이 얽히고설킨 거짓말을 통해 전혀 예상치 못한 곳으로 관객의 멱살을 끌고 가는 전개가 인상 깊은 영화입니다. 펄떡이며 살아 숨 쉬는 배우들의 연기 역시 압권이죠.

프랭크 <캐치 미 이프 유 캔> | Level 3

갑작스러운 부모님의 이혼을 받아들이지 못한 프랭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집을 뛰쳐나와 수표를 위조하며 하루하루를 버팁니다. 수표 위조로 시작했던 사기 행각은 서류 위조로, 사칭으로 불어나죠. 천연덕스러운 연기력과 비상한 두뇌를 지닌 프랭크는 항공사의 부기장, 변호사, 외과 전문의로 변장하며 거액의 돈을 손을 손에 쥡니다. 21년 경력의 베테랑 FIB 요원 칼 핸러티(톰 행크스)가 그를 뒤쫓지만, 천재적인 사기 행각을 지닌 프랭크는 늘 이리저리 빠져나가기 일쑤입니다. 프랭크와 칼의 관계를 보고 있자면 <톰과 제리>가 떠오릅니다. 경쾌한 리듬감이 일품인 영화죠. 영화라서 가능할 것 같던 프랭크의 사기 행각, 알고 보면 실화입니다. <캐치 미 이프 유 캔>은 사기꾼 출신 보안 컨설턴트, 프랭크 에버그네일 2세의 이야기죠. 영화 속에서도 깜짝 카메오로 등장하는 그를 만날 수 있습니다.


Level 4

: 인생 자체를 거짓으로 만든 캐릭터

크리스토프 <트루먼 쇼> | Level 4

평범한 보험회사 직원으로 살던 30세 남성 트루먼(짐 캐리). 평화롭던 그의 삶에 예측하지 못한 사건이 줄줄이 일어납니다. 하늘에서 조명이 떨어지거나, 길거리에서 죽은 아버지를 만나는 식이죠. 제 삶에 의심을 품은 트루먼. 그는 자신의 사생활이 방송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30년 동안 함께 해온 가족, 친구, 직장, 그의 인생을 둘러싼 모든 것이 가짜였던 거죠. 트루먼이 삶에 균열을 느낀 순간, 그의 일상은 코미디에서 끔찍한 공포로 전락합니다. 트루먼의 인생을 한 땀 한 땀 조작해낸 건 ‘트루먼 쇼’의 프로듀서, 크리스토프(에드 해리스)입니다. 어쩌면 트루먼의 마지막 결정 역시, 크리스토프의 설계도 안에 있는 내용일 수도 있겠죠. 그를 능가할 거짓말쟁이는 없을 것 같습니다.


씨네플레이 유은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