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트 영화. 소수 마니아들이 지지하는 영화를 '컬트 영화'라고 부른다. 이 한 가지 조건만 충족하면 어떤 범주의 것도 들어갈 수 있어서 코에 붙이면 코걸이, 귀에 붙이면 귀걸이같이 마법의 단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확실한 건 컬트 영화는 연출자나 각본가의 시선이 뚜렷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확고한 팬층을 거느리며 오래 회자될 거란 점이다. 요즘 시대엔 어떤 영화가 컬트 영화로 남을까. 해외 매체 '테이스트 오브 시네마'에서 선정한 컬트 영화가 될 2019년 영화를 소개한다.
하이 라이프
클레어 드니 감독
<하이 라이프>에 대해선 씨네21 김혜리 기자의 한 줄 평 "클레르 드니 감독의 도발적 창세기"보다 간략하고 명확하게 규정하기 어렵다. 우주와 범죄자, 이런 단어에 <포트리스> 류의 영화를 떠올리며 영화를 선택한 관객들은 병적으로 그려지는 섹슈얼리티와 반복적인 모티브에 몸서리쳤을 것이다.
다만 다른 무언가를 기대하지 않은 관객이라면 <하이 라이프>의 독창성에 감탄했을 것이다. 우주에 대한 인류의 열망이 끝없듯, 우주 배경 SF 영화들은 불쑥 걸작 하나씩을 내놓곤 한다. <하이 라이프>는 그 걸작 리스트의 무엇과도 겹치지 않는 고유한 톤을 유지한다. 호불호가 극단적으로 갈리는데, 그거야말로 진정한 컬트의 밑바탕이 아니겠는가.
머더리스 브룩클린
에드워드 노튼 감독
중절모와 코트를 갖춰 입은 탐정. 1950년대 누아르풍이 지겨운 사람도 있겠지마는, <머더리스 브룩클린>은 딱 하나만으로 차별화된다. 주인공 라이오넬(에드워드 노튼)이 투렛 증후군을 앓는다는 것. 시시때때로 의도하지 않은 행동과 말을 내뱉는 라이오넬은 자신의 멘토 프랭크가 살해당한 사건을 쫓기 시작한다.
조나단 리덤의 소설을 에드워드 노튼이 연출과 주연을 맡아 스크린으로 옮겼다. 누아르를 새롭게 해석한 네오 누아르들 사이에서 정통 누아르의 본거지 1950년대를 다시 소환한 용기부터 가상하다. 비록 평단에서 극찬할 만큼 걸작을 뽑아내지 못했지만, 지금까지 만나지 못한 중절모 탐정과 노튼을 비롯한 윌렘 대포, 알렉 볼드윈, 구구 바샤-로 등 명배우들이 등장하는 기묘한 색채의 탐정물, 2시간 24분을 꽉 채운 다니엘 펨버턴의 재즈 스코어 등 관객들의 사랑을 받기엔 충분했다.
더 비치 범
하모니 코린
컬트라는 단어의 이미지만 떠올리면, 이 영화들 중 <더 비치 범>이 가장 어울릴 것이다. 첫째, 어마어마하게 망했다. 매튜 맥커너히, 잭 애프론, 아일라 피셔, 스눕 독이란 나름 호기심이 동하는 캐스팅에도 불구하고 매튜 맥커너히 출연작 중 최악의 오프닝 성적을 거뒀다. 둘째, 불호가 압도적으로 많지만 반대로 극찬에 가까운 일부 평가. 일례로 <더 가디언>지에서 크리스티 퍼치코는 별 4개 반을, 피터 브래드쇼는 한 개를 줬다.
내용은 이렇다. 시인 문독(매튜 맥커너히)은 돈 많은 아내(아일라 피셔)와 살면서 한량처럼 지낸다. 문독도, 부인도 문란한 성생활과 술, 약에 빠져살고 그러다가 문독은 치료소에 수감된다. <더 비치 범>은 마치 사명감만 쏙 빼낸 히피 문화에 현란한 네온 사인을 곁들인 모양새다. 관객 대부분은 목적 없이 자극적인 스토리와 불쾌한 캐릭터에 등을 돌렸다. 일부 관객들은 <더 비치범>을 허무주의가 현현한 영상 작품이라고 치켜세웠다. 관객 반응만 들어도 '컬트'에 딱 어울리지 않는가.
어스
조던 필 감독
컬트 영화가 가져야 할 미덕 중 하나는 반복 관람 욕구를 충족해 주는 것이다. 누구나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를 여러 번 보겠지만, 컬트 영화라면 반복 관람을 통해 다르게 읽히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점이 마니아를 만드니까. <어스>는 그 부분을 완벽하게 충족하는 공포 영화다.
<어스>가 공포 영화치고 썩 무서운 영화가 아니라는 관객들도 이 영화의 상징성이 주는 복합적인 의미를 준다는 것엔 동의할 것이다. US라는 제목부터 실제로 있었던 '핸즈 어크로스 아메리카' 캠페인, 예레미야 11장 11절, 붉은색 점프 슈트와 금색 가위 등 다양한 상징을 통해 수많은 해석의 갈래를 제공한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근본이 되는 설정은 팬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충분하다.
언컷 젬스
조슈아 사프디, 베니 사프디 감독
앞으로의 영화계를 책임질 거라고 평가받는 사프디 형제. 이들이 신작 <언컷 젬스>로 호평을 받은 건 놀랄 일이 아니다. 그들은 전작들에서 그랬듯 인물을 극한으로 밀어 넣으며 관객들에게 극도의 긴장감과 불안감을 유발하는데 천재적 소질이 있다. 보석상 하워드가 도박 중독으로 궁지에 빠지는 <언컷 젬스> 또한 사프디 형제의 주특기 안에 속하니까.
그러나 누구도 '최악의 배우'로 번번이 뽑히던 아담 샌들러가 재평가 받으리라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보석상 하워드로 출연한 그는 언제 폭탄이 될지 모르는 자신의 이미지를 새롭게 표현하면서 <언컷 젬스>의 긴장감을 이끌었다. 만일 <언컷 젬스>가 사프디 형제의 다른 작품들을 제치고 오랫동안 컬트로 남는다면, 그건 분명 아담 샌들러의 폭발적인 연기 덕분임을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클라이맥스
가스파 노에 감독
그의 작품은 규정할 수 없는데, 그 이름은 브랜드가 됐다. 가스파 노에는 영화 좀 안다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주 거론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국내 개봉작은 두 편뿐이다. 유명 배우 모니카 벨루치와 뱅상 카셀이 나온 <돌이킬 수 없는>과 전라 노출과 실제 성교 장면으로 화제가 된 <러브>. 가스파 노에의 작품은 파격적인 소재나 표현 방법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대중성이 현저하게 떨어지기 때문.
신작 <클라이맥스>도 마찬가지. 리허설을 위해 외진 곳을 찾은 무용단이 누군가가 LSD를 탄 술을 마시고 벌어지는 하룻밤 소동을 그린다. 가스파 노에 특유의 인상적인 영상미와 폭력과 성을 향한 집착마저 느껴지는 카메라가 여전했고, 웬만한 관객들을 이를 견디기 어려워했다. 반대로 여전히 가스파 노에만의 브랜드를 온건히 지킨 작품이기에 그를 사랑하는 팬들이 향유하기엔 더없이 좋은 선물이었다.
기생충
봉준호 감독
2020년 아카데미 작품상이 컬트라니! 그런데 <기생충>의 수상이 우리나라 국민들에게도 이변이었듯, 해외에서 받은 충격은 더했을 것이다. <기생충>은 대서사시도, 감동 실화도, 어떤 메시지를 극렬하게 주장하거나 연출자의 독보적인 색채가 강한 작품도 아니었다. 다만 <기생충>은 완벽하게 잘 설계된 상업 영화의 표본이자 한 감독이 오랜 시간 정제한 세계관이다. 더할 수 없이 영화적이다.
<기생충>이 컬트라고 추앙받는다면, 그 이유는 인물의 페이소스가 아닐까 싶다. 기택(송강호)의 가족은 분명 나쁜 짓으로 다른 사람의 삶을 박탈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미워하긴커녕 공감하거나 연민한다. 반대로 박사장(이선균)의 가족 또한 결코 나쁜 사람은 아닌데도 관객은 그들보다 기택네를 더 응원한다. 왜? 단순히 계급적 문제일까? 아니면 인물 묘사? 배우 연기? 정확히 설명하기 힘들다. <기생충>은 보면 볼수록 (영화의 대사처럼) 선을 넘지 않고 교묘하게 관객들을 흔든다. 이 배덕감, 그것이야말로 <기생충>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컬트적인 부분이 아닐까 싶다.
라이트하우스
로버트 에거스 감독
배급사 A24의, 혹은 로버트 에거스 감독의 팬들이라면 2020년 초부터 힘 빠지는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더 위치>처럼 <라이트하우스>도 정식 개봉 없이 바로 2차 매체로 직행했으니까. 4년 만의 신작을 극장에서 볼 수 없다니. 고전 공포 영화를 연상시키는 예스러운 흑백 영화를 극장에서 볼 수 없다니.
엄밀히 따지면 쉽게 개봉할 수 있는 작품이 아니긴 하다. 1890년대라는 배경, 등대라는 생경한 풍경, 딱 두 배우(그 두 명이 윌렘 대포와 로버트 패틴슨이지만)뿐인 출연진 등. 하지만 해외 평단에서 극찬을 하지 않은 작품을 극장에서 만날 수 없는 건 여전히 아쉽다. 특히 이런 고립의 공포, 명암이 짙은 영상을 담은 영화를 말이다.
조커
토드 필립스 감독
2019년 최고의 화제작이자 사랑받은 작품 <조커>가 컬트? 의문이 들 수도 있지만, 조커란 캐릭터가 애초 주류문화로 분류된다면 그것만큼 위험한 게 있을까? 토드 필립스는 그런 점을 유념해 아서 플렉을 사회에서 배제된 소수자로 그리면서도 그가 정신질환자임을 영화 내내 환기시켰다.
그럼에도 <조커>가 대중들에게 열광적인 인기를 모은 이유는 여러 가지 있겠지만, 호아킨 피닉스의 명연기가 가장 클 것이다. 사회 변두리에서 위태롭게 자신의 삶을 이어가는 호아킨 피닉스의 아서 플렉은 누구라도 연민할 수밖에 없는 초상으로 비친다. 그 덕분에 '위험한 영화'라는 눈총도 받았으나 서브컬처의 아이콘이 현실적인 영화에서도 주효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미드소마
아리 애스터 감독
<미드소마>는 어떤 의미로든 컬트 영화다. 영화에서 스웨덴의 한 컬트 문화를 다루고 있으니 컬트 영화고, 극중 많은 부분을 모호하게 처리해버리니 컬트 영화다. 농담이 아니라 <미드소마>는 많은 부분을 컬트 문화가 주는 기묘함, 그 공간에 퍼져있는 분위기를 통해 전개해 나간다. 표현 방법은 또 어떤가. 공포 영화면서 흔히 사용하는 '깜놀' 포인트도 거의 없고, 백야가 지속되는 지역 특성상 어두움으로 관객을 몰아세우지도 않는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모순이야말로 <미드소마>가 가진 영화적 매력이다. 축제라는 즐거운 자리에서 죽음이 동반돼 공포가 시작되고, 이분법적이어야 할 낮과 밤이 백야로 합쳐져 이질감을 자아낸다. 외면하기엔 아름답고 향유하기엔 기괴한 이 하르가의 축제는 컬트 종교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동시에 컬트 영화를 공유하는 게 얼마나 재밌는지 느끼게 한다.
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