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곰상 수상작 <악마는 없다>의 배우 바란 라술로프와 심사위원장 제레미 아이언스

칸, 베니스와 함께 세계 3대 영화제로 손꼽히는 베를린 영화제가 지난 2월 20일부터 3월 1일까지 개최됐다. 세계 각지의 신작들이 최초로 선보인 가운데, 이란 영화 <악마는 없다>가 최고상을 받았다. 올해 베를린 영화제에서 상영된 화제작 8편을 소개한다.


악마는 없다

شیطان وجود ندارد

2020년 베를린 영화제의 황금곰상 수상작. 이란 감독 모함마드 라술로프는 <이별>(2011), <집념의 남자>(2017) 등이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되어 모두 수상하면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올해 처음 베를린 영화제 경쟁부문에 올라 최고상의 영예를 안았다. 라술로프에 따르면 <악마는 없다>는 자기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매일 아침 서둘러 일어나는 모범적인 가장 헤쉬메트, 남을 죽이는 걸 상상조차 할 수 없지만 그래야만 하는 푸야, 연인의 생일에 프로포즈를 계획하는 자바드, 진찰을 볼 수 없는 의사 바흐람. 서로 느슨하게 이어지는 네 남자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란의 사형제도에 향한 의문을 던진다. 줄곧 자국 이란의 현실을 꼬집는 영화를 만들어온 라술로프는 2010년 체포돼 6년간 투옥됐고, 출소 후에도 출국 금지 명령이 내려져 베를린 영화제에 참석하지 못해, 감독의 딸이자 <악마는 없다>의 배우인 바란 라술로프가 대리수상 했다.


도망친 여자

홍상수는 베를린 영화제와 연이 깊다. 2008년 작 <밤과 낮>부터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2013), <밤의 해변에서 혼자>(2016), <풀잎들>(2018)이 여러 부문에 초청됐다. 홍상수의 24번째 장편 <도망친 여자>는 페르소나 김민희와 더불어 서영화, 송선미, 김새벽, 권해효 등 그의 근작에서 자주 얼굴을 비춘 배우들이 출연했다. 감희(김민희)는 남편이 출장 간 사이 친구들의 집에 방문하거나 영화관에서 우연히 친구를 만나 대화를 나눈다. 홍상수의 영화가 늘 그랬던 것처럼 세 번의 대화는 약간의 반복과 변주를 거쳐 이어진다. 이 구조가 남자들의 달갑지 않은 개입으로 흐트러진다고 하는데, '도망친 여자'라는 제목은 바로 그것과 연관되어 있는 것 아닐지. 베를린 영화제는 보도자료에서 이젠 홍상수를 에릭 로메르나 우디 앨런이 아닌 19세기 극작가 안톤 체홉과 연관시켜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감독상을 안겼다.


퍼스트 카우

First Cow

요리사 피고위츠(존 마가로)는 밀렵꾼들과 함께 오리건 준주로 이동하다 중국인 이민자 킹 루(오리온 리)를 만나고, 돈 많은 지주의 젖소를 이용한 사업을 시작한다. 켈리 레이커트와 여러 작품의 시나리오를 함께 쓴 작가 조나단 레이몬드의 소설 <하프 라이프>를 바탕으로 한 <퍼스트 카우>는 레이커트의 지난 작품을 이룬 요소들이 눈에 띈다. <올드 조이>(2006)에 이어 레이몬드의 소설을 각색했고, 시대극 <믹의 지름길>(2010)와 같이 19세기 미국 오리건을 배경으로 삼았으며, <웬디와 루시>(2008)처럼 동물이 제목을 차지하고 있다. 소가 초기 자본주의가 몸집을 불리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만큼, 원작소설에 등장하지 않았던 소를 통해 자본주의를 탐구해보겠다는 의지가 자명해 보인다. 레이커트와 오랫동안 작업해온 영화음악가 제프 그레이스가 아닌 포크 뮤지션 윌리엄 타일러가 음악을 맡아 목가적인 정서를 더했다. <웬디와 루시>의 프롤로그를 영화 사상 최고의 오프닝 중 하나로 말한 봉준호는 작년 최고의 영화 리스트에 <퍼스트 카우>를 포함시킨 바 있다.


나날들

日子

<떠돌이 개>(2013) 이후 일련의 단편 작업에 매진하던 차이밍량이 7년 만에 내놓은 새 장편.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차이밍량의 오랜 페르소나 이강생 외에 새로운 얼굴이 주인공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 출연은 처음인 대만의 라오스인 이민자 아농 호웅흐앙시다. 저택에 혼자 사는 중년 강(이강생)은 머리와 목 통증을 치료 받은 병원에서 마사지사인 논(아농 호웅흐앙시)을 만나 함께 외로움을 서로 공유한다. 단출한 미장센 아래 대화를 거의 나누지 않는 인물들을 느린 호흡으로 담는 차이밍량의 연출 스타일은 여전하다. 그의 작품에서 언제나 가난하고 불안한 청년이었던 이강생이 부유한 중년을 연기해 젊은 남자와 사랑하는 모습은 어떤 감흥을 자아낼까.


눈물의 소금

Le sel des larmes

프랑스의 노장 필립 가렐은 2010년대 들어 2년에 한 번 꼴로 신작을 부지런히 발표하고 있다. <평범한 연인들>(2004)들부터 꾸준히 루이 가렐, 에스더 가렐 등 가족들을 주연으로 기용한 그는 <눈물의 소금>의 주인공 릭 역에 신예 로간 앙투오페르모를 캐스팅 했다. 이번 영화 역시 사랑 이야기. 목수 지망생인 뤽은 목공 학교 시험을 보기 위해 파리에 들렀다가 고향에 돌아가서 다시 파리로 돌아오는 사이, 세 명의 여자와 가벼운 만남을 갖는다. <인 더 섀도우 오브 우먼>(2015)부터 협업을 시작한 명 촬영감독 레나토 베르타의 아름다운 흑백 이미지 안에 서로 상처 주고 상처 받는 이들의 잔인한 로맨스가 담겼다.


시베리아

Siberia

미국영화계 명감독/명배우 콤비가 또 한번 뭉쳤다. 아벨 페라라는 근래 발표한 장편 <고고 테일스>(2007), <4:44 지구 최후의 날>(2011), <파졸리니>(2014)의 주인공을 연기해온 윌렘 대포를 또 한번 기용해 신작 <시베리아>를 완성했다. 시베리아에서 바를 운영하는 클린트는 영어를 쓰지 않는 손님을 마주하며 살아가다 환각을 일으켜 아버지와 형제, 전처와 아들에 대한 기억을 마주하는 동굴로 향한다. 쉽사리 감이 오지 않는 시놉시스. 예고편 역시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뒤섞인 채 서사를 설명하는 데엔 전혀 관심이 없는 이미지들이 이어지는 걸로 보아, 한 사내가 자기 내면을 파고들어가는 과정을 난해한 형식으로 그려낸 작품인 것 같다. 페라라의 부인 크리스티나와 어린 딸 애나도 배우로 참여했다.


바람의 전화

風の電話

스와 노부히로는 프랑스의 대배우 장 피에르 레오를 캐스팅 한 <사자는 잠들지 않는다>(2017) 등을 비롯해 근 20년간 프랑스 배우들과의 작업들로 필모그래피를 채워왔다. <바람의 전화>는 그의 '일본영화'다. 쓰나미로 가족을 잃은 17살 소녀 하루(모톨라 세레나)가 히로시마에서 도쿄, 후쿠시마, 가족과 함께 살던 오쓰지를 지나는 여정을 따라간다. 하루는 그 길에서 저마다 다른 사람을 만나며 그들이 경험한 상실을 듣는다. 오랫동안 해외에서 영화를 만들었던 스와 노부히로는 자국에서 오랜만에 작업한 작품을 통해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 남긴 상처를 뒤늦게 돌이켜본다. 일본의 떠오르는 모델 출신의 배우 모톨라 세레나의 독특한 외모가 가족을 떠나보낸 아픔을 품고 살아가는 일본 사람들의 얼굴을 대변한다.


마지막 그리고 첫 번째 사람

Last and First Men

<사랑에 대한 모든 것>(2014), <시카리오>(2015), <컨택트>(2016)의 영화음악가 요한 요한슨은 2018년 2월 세상을 떠났다. 그가 생전에 연출한 영화 <마지막 그리고 첫 번째 사람>이 올해 베를린 영화제를 통해 최초 공개됐다. <마지막 그리고 첫 번째 사람>엔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다. 건축사진가 얀 켐페나어스의 작업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유고슬라비아의 건축물을 담은 수퍼 8m와 16mm 푸티지들 위에 SF 소설가 올라프 스테이플던의 소설에서 발췌한 텍스트를 낭독하는 틸다 스윈튼의 음성을 얹은 영상이 70분간 이어진다. 설명만 봐도 요한슨의 몽환적인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