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니 보일 감독

인기가 있는 사람들은 힘들다. 부르는 곳이 너무 많으니까. 영국 출신 대니 보일 감독도 작품을 준비하는 동안 여러 작품을 거절하며 필모그래피를 쌓아왔다. <슬럼독 밀리어네어>가 재개봉을 앞둔 지금, 그가 거절한 영화들은 뭔지 살펴봤다.


BBC 드라마 <북쪽의 우리 친구들>

영화 작업에 몰두하고자 거절

<북쪽의 우리 친구들>

대니 보일의 첫 거절 상대는 BBC. BBC는 피터 플래너리의 <북쪽의 우리 친구들>(Our Friends in the North)이란 9부작 드라마를 제작할 예정이었다. 제작자는 1순위로 대니 보일을 선택했다. 이미 BBC 드라마 <미스터 로스 버진>이란 3부작 드라마를 연출한 바 있었기 때문. 다만 당시 보일은 <쉘로우 그레이브>의 개봉을 앞두고 있어서 이 작품의 반응을 먼저 보고 차기작 방향을 결정하고 싶어했다. <쉘로우 그레이브>가 호평을 받으며 보일은 영화 작업에 전념하기 위해 바로 <트레인스포팅> 제작 과정에 투입했다.


<에이리언 4>

<인질> 연출하기 위해

<에이리언 4>

<인질>

<에이리언 3>에 신예 데이비드 핀처를 기용한 제작진은 흥행 실패에 새로운 방향을 모색했다. 리들리 스콧, 제임스 카메론급은 안되도 영화 연출 경험자에 볼거리를 만들 줄 아는 감독. 1순위가 <트레인스포팅>으로 화려한 영상미와 편집 감각을 보여준 대니 보일이었다. 대니 보일은 당시 제작자, 특수효과 슈퍼바이저와 미팅까지 했다. 하지만 자신이 연출해야 할 만큼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하차했다. 그리고 <쉘로우 그레이브>, <트레인스포팅>을 함께 한 이완 맥그리거와 <인질>을 만들었다. <에이리언 4>는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를 만든 장-피에르 주네가 맡게 된다.


<풀 몬티>

시나리오에 흥미를 느끼지 못해 거절

<풀 몬티>

만일 대니 보일이 했으면 이 영화는, 혹은 대니 보일은 어떻게 변했을지 가장 궁금한 작품은 <풀 몬티>. 이 영화는 지방 산업인 철광 산업이 쇠퇴하면서 일자리를 잃은 광부들이 스트리퍼로 활동하는 내용을 그린다. 대니 보일에게 이 시나리오가 갔었는데, 대니 보일은 스토리가 흥미롭지 않다는 이유로 거절했단다. 광부가 스트리머가 되는 이야기인데, 흥미롭지 않다니. <풀 몬티>는 피터 카타네오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고, 이후 뮤지컬로도 제작되는 등 인기를 모았다.


<파이트 클럽>

<비치> 연출하기 위해

<파이트 클럽>

<비치>

<파이트 클럽>은 수많은 감독들의 손을 거쳤다. 1순위는 피터 잭슨. 피터 잭슨은 원작 소설 작가 척 팔라닉의 팬이었지만, 당시 <반지의 제왕>을 준비하기 위해 이미 뉴질랜드에 머물고 있었다. 그 다음 타자는 브라이언 싱어. 제작자가 싱어에게 책을 보내며 영화화를 권유했지만, 나중에야 그는 책조차 읽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대니 보일이 후보에 올랐다. 이번에도 프로듀서와 미팅을 가진 보일. 그는 원작도 다 읽고 분명 좋은 작품이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미 <비치>를 하기로 계획한 상태여서 연출 제안을 고사했다. 그렇게 돌고 돌아 데이비드 핀처의 <파이트 클럽>이 탄생했다.


<8 마일>

<28일 후> 연출하기 위해

<8 마일>

<28일 후>

대니 보일이 <8 마일>을 연출했다면, 좀비 영화의 부흥은 좀 더 미뤄졌을까? 에미넴이 직접 출연한 영화 <8 마일>은 꽤 쟁쟁한 후보 둘이 거론됐다. 하나는 쿠엔틴 타란티노, 다른 하나는 대니 보일. 두 사람 다 영화에 흥미가 있었지만, 당장 프로덕션을 진행 중인 상태였다. 쿠엔틴 타란티노는 <킬 빌> 시리즈를, 대니 보일은 <28일 후>를 준비하고 있던 것. <28일 후>는 분노 바이러스라는 '뛰어다니는 좀비'라는 현대적인 개념을 적용해 <새벽의 저주>와 함께 현대 좀비물의 장을 열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대니 보일이 <8 마일>을 선택했다면 결과는 어땠을까.


거절은 아니고, 할 뻔했던 영화들

<엑스맨>

<스크림>

<아메리칸 싸이코>

1990년대 말에 데뷔해 두각을 드러낸 감독답게 당시 많은 작품의 연출자 후보로 올랐다. 다음 소개하는 작품은 대니 보일이 거절한 작품은 아니고, 후보에 올랐으나 최종 단계에서 다른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작품들이다. <아메리칸 싸이코>, <엑스맨>, <스크림>. <아메리칸 싸이코>는 메리 해론이, <엑스맨>은 대니 보일처럼 1990년대 두각을 드러낸 브라이언 싱어가, <스크림>은 공포영화의 거장 웨스 크레이븐이 최종 연출자로 발탁됐다.

더불어 그의 SF 영화는 앞으로 보기 힘들 듯하다. 대니 보일은 2007년 <선샤인>을 제작하면서 너무 많이 힘들었다고, 그래서 다시는 안 할 것 같다고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영국인 감독의 숙명, 007 시리즈

'본드 25'란 가제를 사용했던 <007 노 타임 투 다이>

잘 나가는 영화 감독, 특히 영국인 감독이면 한 번쯤 고심할 수밖에 없는 007 시리즈. 대니 보일 역시 007 시리즈의 연출과 관련해 홍역을 겪었다. 먼저 23번째 영화이자 50주년 기념작인 <007 스카이폴>이 제작에 들어가기 전, 대니 보일이 연출을 맡는다는 오보가 있었다. 007 영화 중에서도 의미 있는 작품인데 기존 대니 보일 영화의 감성과 007이 잘 맞는지에 대한 여러 의견들이 충돌했고, 진위 여부를 묻는 질문이 사방에서 쏟아져 시달렸다고.

이후 2018년 3월, 다니엘 크레이크의 마지막 007 영화 <본드 25>(당시 가제)에 연출자로 발탁됐다. 그러나 반년이 지나기도 전인 8월, <본드 25> 제작진은 창작적인 견해의 차이로 대니 보일이 하차한다고 보도했다.

흔히 '창작적 견해'라는 말은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에, 대니 보일의 하차에도 많은 추측이 오갔다. 텔레그래프는 다니엘 크레이그와 대니 보일이 캐스팅을 두고 대립하면서 갈등이 빚어졌다고 보도했다. 007을 죽게 한다는 설정을 두고 대립했다는 루머도 돌았다.

캐리 후쿠나가 감독이 후임으로 임명돼 제작이 재개된 후, 대니 보일은 하차에 관해 "각본가 존 호지와 함께 집필한 시나리오를 제작자가 탐탁치 않아했다"고 설명했다.


최고로 멋있는 거절, 기사 작위

대니 보일 거절사의 마지막은 영국 기사 작위 수여를 거절한 것. 대니 보일은 2012년 런던 올림픽 개막식 연출자로 참여한 후 영국 왕실로부터 기사 작위 수여를 제안받았다. 그러나 보일은 그동안 모든 인간이 평등한 존재로 인정받기 위한 싸움이 계속됐다는 걸 언급하며 "특권을 가진 대상이 되는 게 내 스스로 평등한 시민이라고 느끼는 자부심을 증진시켜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전에 기사 작위를 거절하며 "기득권"이란 단어를 사용한 제레미 아이언스처럼 영국 내부의 계급 사회를 지적했다고 볼 수 있다.


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