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누구도 아닌>

<그 누구도 아닌>에는 두 명의 아델이 출연한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 출연한 아델 에넬과 <가장 따뜻한 색, 블루>의 아델 에그자르코풀로스다. 아델 에넬에 대해서는 최근에 소개한 적이 있다. 다른 아델을 만나보자. <가장 따뜻하나 색, 블루> 이후 아델 에그자르코풀로스의 여정을 따라가보려 한다.

참고로 에그자르코풀로스라는 긴 성은 그리스인 할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것이다. 또 참고로 <그 누구도 아닌>은 2016년에 개봉한 영화다. 코로나19 사태 여파로 국내에 개봉하게 됐다. 영화수입배급사협회가 주최하는 <영화로운 일상을 위한 신작展>의 상영작 가운데 하나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2013)

<가장 따뜻한 색, 블루>

에그자르코풀로스는 여전히 <가장 따뜻한 색, 블루>을 빼고 이야기하기 어려운 배우다. 안타깝게도 이 작품을 능가할 만한 작품이 나오지 않은 탓이다. 먼저 <가장 따뜻한 색, 블루>가 어떤 작품이었는지 돌아본다. 레아 세이두와 함께 출연한 이 영화는 2013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보통 감독에게 트로피를 수상하는 것과 달리 <가장 따듯한 색, 블루>는 에그자르코풀로스와 세이두도 수상자에 이름을 올렸다. 이는 이례적인 결정인데 영화의 많은 부분에 두 배우들의 공이 크다고 인정한 결과다. 특히 에그자르코풀로스는 역대 가장 어린 수상자가 됐다. <가장 따듯한 색, 블루>는 에그자르코풀로스가 연기한 아델의 이야기가 중심이다. 배우 이름과 캐릭터의 이름이 같고, 프랑스 원제는 ‘아델의 삶’(La vie d'Adele)이다.


<다운 바이 러브>(2016)

<다운 바이 러브>

<다운 바이 러브>는 파격적인 사랑을 다룬다. ‘사랑에 갇힌 교도소장과 여죄수의 파격 실화!’라는 문구가 매우 자극적이다. 2011년 프랑스 베리사유에서 일어난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됐다. 에그자르코풀로스는 안나라는 캐릭터를 연기했다. 반항적이고 도발적인 모습이 인상적이다. 다만 <다운 바이 러브>는 에그자르코풀로스라는 배우를 소모적으로 이용한 느낌이 든다. ‘가디언’은 “에그자르코폴로스는 자연스러운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지만 그가 연기한 캐릭터는 평면적이다. 캐릭턱의 뒷이야기를 노골적으로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라스트 페이스>(2017)

<더 라스트 페이스>

<가장 따뜻한 색, 블루> 이후 세이두는 자타공인 세계적인 스타가 됐다. 에그자르코풀로스는 그렇지 못했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 이전에도 <미션 임파서블: 고스트 프로토콜> 등 할리우드 메이저 프랜차이즈 영화에 출연했던 세이두와 직접 비교는 어렵다. 그럼에도 에그자르코풀로스의 행보는 아쉬움이 남는다. 할리우드에 진출할 기회가 있긴 했지만 이뤄지지 않았다. 조 라이트 감독이 연출한 <팬>에 출연할 뻔했다. 피터 팬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에서 에그자르코풀로스는 루니 마라가 연기한 타이거 릴리 역의 출연 물망에 올랐다. <팬> 대신에 <라스트 페이스>에 출연할 기회를 얻었다. 배우가 아닌 감독 숀 펜이 연출한 영화다. 쟁쟁한 배우들이 출연했다. 에그자르코풀로스는 하비에르 바르뎀, 샤를리즈 테론, 장 르노 등과 호흡을 맞췄다. 화려한 캐스팅 사이에서 에그자를코풀로스는 빛을 발하기 힘들었다. <라스트 페이스>는 2016년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됐지만 평가는 최악이었으며 국내 개봉도 이뤄지지 않았다.


<화이트 크로우>(2018)

<화이트 크로우>

에그자르코풀로스는 다시 한번 유명 배우의 연출작에 출연했다. 랄프 파인즈 감독의 <화이트 크로우>다. 이 영화는 유명 발레리노 루돌프 누레예프(올레그 이벤코)의 인생을 그렸다. 구 소련에서 태어난 그는 1961년 파리 공연 이후 서방으로 망명한 인물이다. <라스트 페이스>와 달리 이 영화에 대한 평가는 나쁘지 않다. 감독 능력 면에서 숀 펜보다 랄프 파인즈가 더 훌륭했던 것일까. 에그자르코풀로스는 루돌프의 친구가 되는 클라라라는 인물을 연기했다. <화이트 크로우> 역시 개봉은 하지 않았고 VOD 등 2차 판권 시장에서 바로 소개됐다.


<시빌>(2019)

<시빌>은 지난해 11월에 개봉한 영화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 이후 국내 관객이 스크린에서 에그자르풀로스를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였다. 다만 이 기회를 붙잡은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극장을 찾은 사람이 1만 명도 되지 않는다. <시빌>은 일종의 심리스릴러 영화다. 배우들의 연기가 중요한 장르이기도 하다. 에그자르코풀로스는 무명배우 마고를 연기했다. 소설가가 되고 싶은 정신과 의사 시빌(버지니아 에피라)은 마고를 소설의 소재로 삼고 그의 삶에 개입하기 시작한다. <시빌>은 2019년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됐다. <가장 따듯한 색, 블루>부터 <시빌>까지 에그자르코풀로스의 필모그래피에는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오른 작품이 많은 편이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 이후 에그자르코풀로스가 출연한 몇몇 작품을 돌아봤다. <레베니어>(2019), <레이서 앤 제일버드>(2017), <스파이: 디 오리지날>(2015), <불안>(2014), <저니 투 더 마더>(2014) 등에도 출연했다. 꽤 많은 작품에 출연했지만 <가장 따뜻한 색, 블루> 만큼 국내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준 작품은 없다. 할리우드 영화가 아닌 국내에 소개가 잘 되는 않는 프랑스영화에 출연했고, 상업영화 대신 영화제에 출품되는 작가주의 영화에 출연한 경향이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팬이라면 아쉬운 마음이 들 수 있다.

에그자르코풀로스는 자신의 고유한 매력이 여전히 돋보이는 배우다. <시빌> 이후 국내 관객과 만나게 되는 <그 누구도 아닌>에서도 그 매력을 어김없이 보여준다. 그는 살짝 낮고 허스키한 느낌의 목소리로 건성건성 말하고, 큰 갈색 눈동자는 간혹 초첨이 없어 보일 때가 있다. 무표정할 때는 매우 어두워 보이지만 활짝 웃을 때는 도톰한 입술의 입꼬리가 올라가며 천진난만해 보이기까지 한다. 머리칼은 늘 헝클어져 있다. 거의 모든 영화에서 에그자르코풀로스의 캐릭터는 꾸민 듯 안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준다. 문득 ‘프렌치 시크’(french chic)라는 말이 떠오른다. 주로 패션업계에서 사용하는 단어이지만 그 기원은 분명 프랑스영화에 있을 것이다. 카트린 드뇌브, 제인 버킨, 진 세버그처럼 아이콘이 된 배우들의 이름도 떠올려본다. 에그자르코풀로스가 프랑스를 대표하는 배우 가운데 한 명으로 기억될 수 있을까. 지금은 레아 세이두, 아델 에넬이 그 위치에 더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 이후 기억에 남을 만한 에그자르코풀로스의 작품이 나오길 기대해보자. 여전히 매력적인 배우임에는 틀림없다.


씨네플레이 신두영 기자